# 왕의 명령
궁궐 서쪽 회랑의 어둠 속에서 이준은 무릎을 꿇었다. 왕의 전령이 전한 소환이 명령이었고, 거부는 죽음이었다. 심문관실의 황금빛 벽들이 멀어지면서 그의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15년간 그 벽 앞에서 수백 개의 기억을 태워왔고, 이제 자신의 차례가 올 것만 같았다.
왕의 침실 옆 밀실. 그곳은 이준이 본 적 없는 공간이었다. 창문이 없고, 벽은 검은 대리석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중앙에는 단순한 왕좌가 하나 놓여 있었다. 왕 이세준은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희미한 촛불 아래서도 명확했다. 절대 권력의 피로함. 그것이 이준이 처음 읽은 표정이었다.
"15년을 시켜왔고, 15년 동안 당신은 충실했다."
왕의 목소리는 낮았다. 음악처럼 들릴 수도 있었을 그 목소리가 이준의 등을 곧게 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충실함이 배신이 되었다."
이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질문도 없었다.
"서연을 지우라. 그리고 당신이 본 모든 것을 지워라. 당신이 기억한 모든 것을. 황태자는 반역자였고, 당신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다. 그 외의 것은 없다."
왕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이준의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느껴본 거부였다. 그의 신체는 기억하고 있었다. 황금빛이 인간을 태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태웠는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이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지 않았다.
왕이 움직였다. 침대 위에서 내려와 이준에게 가까워졌다. 한 발, 또 한 발. 그 발걸음은 심문관실의 바닥을 울리는 발걸음과 같았다.
"할 수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할 수 있게 만들어야겠군."
왕이 이준의 턱을 잡았다. 손가락이 턱뼈를 누르며 얼굴을 들게 했다. 이준은 왕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처음 알았다. 절대 권력도 두려워한다는 것을.
"당신을 만든 사람은 나다. 당신을 지울 사람도 나다. 이해하는가?"
"네."
"그럼 왜 거역하는가?"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왜 거역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거역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이 순간이 다른 모든 순간과 달랐다. 신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깨어나고 있었다. 15년간 억눌러온 기억의 편린들이 표면으로 떠오르려 했다.
밀실의 문이 열렸다.
남궁현이 들어왔다. 그의 복장은 궁중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옷과 허리의 검. 왕은 이준을 놓고 뒤돌아섰다.
"남궁 가주. 여긴 왕실의 밀실이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남궁현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심문관의 능력이 궁중에 얼마나 큰 위협인지 아십니까, 폐하?"
"당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가거나 지워질 준비를 하라."
왕이 손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황금빛이 나오지 않았다. 왕은 이준에게 기억 조작 능력이 없었다. 그는 오직 명령만 할 수 있었다.
"심문관은 당신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남궁현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년간의 모든 명령, 모든 거짓, 모든 죽음. 그리고 그는 지금 깨어나고 있습니다."
"거짓이다."
"아닙니까? 그럼 왜 서연을 지우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왜 그 여인을 죽은 것으로 위장했습니까?"
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공포였다. 남궁현은 그 표정을 읽었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아름다운 웃음이었고, 매우 위험한 웃음이었다.
"당신은 정당한 왕이 아닙니다. 황태자 서준호는 반역자가 아니었고, 당신은 첩의 아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심문관도 이제 알게 될 것입니다."
남궁현은 배신당한 세력의 대리인이었다. 15년 전 쿠데타로 몰락한 가문의 후손. 그는 이준을 통해 왕의 비밀을 폭로하고 자신의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이준의 기억을 어느 정도 복구했는지는 불명확했지만, 그의 도움 없이는 이 밀실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궁현은 이준을 도구로 삼으려 했고, 이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준은 그 말을 들었고, 가슴이 다시 뛰었다. 황태자가 반역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운 것은 무엇인가. 서연의 기억. 그녀는 누구였는가. 왜 그녀를 지웠는가.
"당신과 함께라면, 심문관. 당신의 능력으로 이 왕의 모든 거짓을 폭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왕위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남궁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초대였다. 그리고 거래였다.
이준은 그 손을 보았다. 그 손이 자신을 구원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감옥으로 끌어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그것도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도 명령이었다. 다만 다른 주인의 명령일 뿐.
"당신은 누구의 도구입니까?"
이준이 물었다. 남궁현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자신의 영토를 되찾으려는 자입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당신도 정의를 말합니까, 심문관?"
남궁현의 웃음이 더 깊어졌다.
"황태자를 지운 사람이?"
이준은 그 말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왕 앞에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죄 앞에서였다.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약했다. 촛불 같은 빛. 15년간 너무 많이 태워왔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도구가 아닙니다."
이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낮지 않았다. 신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였다. 억눌려온 15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당신들 중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겠습니다."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당신이 거역합니까? 나를 거역합니까?"
"네."
이준의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폭발했다. 그것은 왕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서연을 지우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죄와 마주해야 했다. 15년간 지워온 모든 기억, 모든 사람들. 그 무게가 한 번에 밀려왔다. 신체가 격렬하게 떨렸다. 부분적으로 돌아오는 기억들이 조각으로 흩어졌다. 황태자가 반역자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서연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그녀를 지웠는지.
왕이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호위대를 부르는 손짓이었다. 밀실의 문이 열리고 무장한 인물들이 들어서려는 순간, 밀실의 벽이 흔들렸다. 그것은 지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역류였다. 이준의 황금빛이 공간 자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남궁현이 칼을 빼었다. 하지만 이준의 황금빛이 먼저였다. 약한 빛이지만, 그것은 남궁현의 기억을 스쳤다. 남궁현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기억이 부분적으로 태워지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잊고 있었다. 그의 몸은 경련을 일으켰고, 눈은 흐릿해졌다. 의식이 흐려지면서 남궁현은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심문관..."
남궁현의 목소리가 약해졌다.
"나는 누구입니까?"
"죽어가는 자입니다."
이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차갑고 명확했다.
밀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민서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책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기억의 도서관에서 나온 책이었다. 이준의 일기장. 그의 모든 기억이 기록된 책.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민서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기억의 도서관 그 자체처럼 오래되고 깊었다.
"당신이 지운 모든 기억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당신이 지운 모든 사람들의 기억도."
"그 대가는?"
"당신입니다. 당신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민서가 책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속죄입니다."
왕이 다시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칼이었다. 호위대의 칼이었다. 이준은 그 칼을 보지 않았다. 그는 민서의 눈을 보았고, 그 눈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완전한 소멸. 기억도 없고, 정체성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이 자신이 이미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준이 일어섰다. 그의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다시 타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자신이 아니라, 왕을 향해.
"폐하, 당신의 기억을 되살려 드리겠습니다."
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15년 전 그 밤,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황금빛이 왕을 감싸기 시작했다. 왕은 비명을 지르며 벽에 부딪혔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모든 거짓이. 그의 모든 죄가. 왕은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들을 다시 경험하고 있었다. 아들을 죽인 것. 딸을 지우려 한 것.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밀려오자, 왕의 정신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흐르는 것은 피였고, 눈에서 흐르는 것은 눈물이었다.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죄에 짓눌린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호위대가 밀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준을 향해 칼을 들었다. 하지만 이준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민서의 손을 잡고 밀실의 벽을 향해 달렸다. 벽이 열렸다. 비밀 통로였다. 호위대의 발소리가 뒤따랐지만, 이준과 민서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궁궐의 지하, 기억의 도서관.
이준과 민서, 그리고 서연이 있었다. 서연은 책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책 위에는 이준의 모든 기억이 기록되어 있었다. 책장을 덮은 벽 전체가 수천 권의 책으로 가득했다. 이준이 지워온 모든 사람들의 기억. 그들의 존재가 이 도서관에 갇혀 있었다.
"당신이 나를 기억해주면, 우리 둘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서연이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다만 공포만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15년 동안. 그리고 만약 당신이 나를 기억해주면, 당신도 죽을 것입니다. 진짜로."
이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황금빛이 책을 비추기 시작했다.
황금빛이 책의 첫 페이지를 태웠다.
페이지가 검게 타들어가면서 글자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준은 그것을 보면서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떨림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대였다. 15년 동안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싶었던 욕망이 마침내 폭발하려는 순간.
첫 번째 기억이 돌아왔다.
———
*15년 전, 동쪽 탑의 밤.*
*별이 많았다. 서준호 황태자의 침실 옆 탑의 최상층에서 서연이 별을 셀 때, 이준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서연의 손이 따뜻했다. 그녀가 이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 도망쳐. 여기서."*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이 반란을 일으킬 거야. 내일 밤. 그리고 아버지—아니, 그 사람은 형을 죽일 거야."*
*이준이 물었다. "당신은?"*
*"나도 죽일 거야. 나도 증거거든. 형과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야. 이세준이 아버지가 아니야."*
*서연의 눈이 이준을 보았다. 그 눈 속에는 공포와 함께 절망이 있었다.*
*"우리 도망쳐. 같이."*
———
기억이 끊겼다.
이준은 헐떡거렸다. 책의 다음 페이지로 황금빛을 옮겼다. 그것도 태워졌다.
———
*밤이 더 깊어졌다.*
*왕이—이세준이—침실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칼이 있었다. 그는 이준을 보자 멈췄다.*
*"심문관."*
*"폐하."*
*"서연 왕녀를 데려와라."*
*"폐하?"*
*"모르는 척 하지 마.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안다. 데려와라. 아니면 죽을 것이다. 너도, 그 아이도, 너를 숨겨준 모든 사람도."*
*이준은 알았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왕이 황태자 서준호를 죽였다는 것을. 서연도 죽이려 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서연 왕녀는 반역에 가담했습니다."*
*이준이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거짓말을 계속했다.*
*"죽였습니다."*
*왕이 웃었다.*
*"좋아. 그럼 이제 그 아이의 기억을 지워라. 완전히.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
다음 페이지. 그 다음 페이지. 이준은 계속 책을 태웠다.
기억이 쏟아져 나왔다. 서연을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는 자신. 그녀가 저항하고 울고 이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리고 이준의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폭발해서 서연의 눈이 흐려지는 것.
서연이 쓰러졌다. 그 순간, 이준 자신도 함께 쓰러졌다.
———
*"당신은 뭔가 잊고 있지 않습니까, 심문관?"*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를 지우는 대신, 자신도 함께 지워져야 하지 않습니까?"*
*이준이 일어났다. 그의 기억이 부분적으로 태워지고 있었다. 서연이 누구였는지. 왜 그녀를 지웠는지. 그 모든 것이 연기 같이 흩어지고 있었다.*
*왕이 웃었다.*
*"완벽하군. 이제 당신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당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억이 끊겼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남았다.
이준의 손이 멈췄다. 민서가 옆에 서 있었다. 서연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기억해주면 안 됩니다."
이준이 돌아봤다. 서연의 얼굴을 보았다. 15년 만에 본 그 얼굴. 기억 속의 얼굴과 현재의 얼굴이 겹쳤다.
"왜?"
"왜냐하면..."
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건조했다.
"당신이 나를 기억해주려면, 당신이 나를 지우는 순간부터 벌어진 모든 일들을 다시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5년간 당신이 왕의 도구가 되면서 저질렀던 모든 일들. 수백 명의 기억을 지운 당신이.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돌아올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견디지 못할 거예요. 아무도 견디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완전히 붕괴되면, 내 기억도 함께 사라질 거예요. 당신의 황금빛과 함께."
민서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기억 능력자의 특성상, 능력 사용자가 정신을 잃으면 복구 과정도 중단됩니다. 당신이 미쳐버리면, 서연 왕녀도 영원히 자신을 되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준은 책을 내려놓았다. 황금빛이 손가락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그럼 어떻게..."
"당신의 선택입니다."
민서가 말했다. 기억의 도서관의 벽을 향해 손을 들었다. 수천 권의 책들이 벽을 덮고 있었다. 이준이 지워온 모든 사람들의 존재. 그들의 기억이 여기 갇혀 있었다.
"첫째, 당신이 서연 왕녀를 기억해주고 미쳐버리거나."
민서의 목소리가 명확했다.
"둘째, 당신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모든 것을 끝내거나."
"아니면?"
"셋째, 당신이 지운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되돌려주고, 그들이 당신을 심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민서는 세 번째 선택의 결과를 명시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살아남겠지만, 당신이 저질렀던 모든 죄가 드러날 것입니다. 왕실의 비밀도, 황태자의 죽음도, 서연이 당한 일도. 모든 것이."
서연이 일어섰다. 그녀가 이준에게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이준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것은 기억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신체가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신을 용서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었어요."
서연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증오하러 왔어요. 15년을 기억도 못한 채로 살아가면서 느껴온 고통을, 당신이 똑같이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준이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서연이 계속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을 보니까... 당신이 이미 죽어 있다는 걸 알겠어요. 당신은 이미 15년 전부터 죽어 있었어요."
"서연..."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살려주고 싶어요."
이준이 그 말을 들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서연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검은 불이 타올랐다. 그것은 이준의 황금빛과는 다른 불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불이 아니라, 기억을 만드는 불이었다. 지워진 것을 되살리는 불. 잊혀진 것을 되찾게 하는 불. 서연은 항상 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의 비밀이 되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그녀의 검은 불은 기억을 복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명백해졌다. 왕이 서연을 지우려 한 이유. 그녀의 능력이 자신의 모든 거짓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 기억을 당신에게 드릴게요. 제가 당신이 되어줄게요. 그럼 당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도..."
"사라질 거죠. 하지만 당신 안에서 살아갈 거예요. 그게 속죄예요."
민서가 한 발 물러섰다. 이제 기억의 도서관에는 이준과 서연만 남았다. 수천 권의 책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증인이 되어.
"기억의 융합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민서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당신이 살아남으면, 다시 만날 거예요."
이준은 서연의 검은 불을 보았다. 그것이 자신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황금빛과 만났을 때,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준은 알았다. 자신이 왜 거역했는지. 왜 서연을 지울 수 없었는지.
그것은 사랑이었다. 15년 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사랑.
이준이 손을 들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서연이 말했다.
"당신이 되어달라고 해요."
황금빛과 검은 불이 만났다.
궁궐 전체가 흔들렸다. 기억의 도서관의 책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억들이 해방되고 있었다. 15년간 지워진 모든 기억들이. 황태자의 죽음, 왕의 거짓, 서연의 고통, 이준이 태워온 수백 명의 존재.
모든 것이 빛이 되어 궁궐을 뚫고 올라갔다.
그리고 이준은 더 이상 이준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서연의 검은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황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두 능력이 한 몸 안에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신체가 변화하고 있었다. 황금빛이 검은 불을 감싸고, 검은 불이 황금빛을 스며들게 했다.
이준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 안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도 들렸다. 둘이 겹쳐졌다.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음성이 되었다. 기억이 흐르고 있었다. 서연의 기억. 15년 동안 잊혀 있던 모든 것. 그리고 이준의 기억. 15년 동안 지워온 모든 죄악.
두 기억이 충돌했다. 아팠다. 살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채워지고 있었다. 빈 공간이 채워지고 있었다. 15년간 비워두었던 자리에 다시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생이었다.
이준과 서연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분리된 두 개의 영혼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존재로. 그들의 기억이 섞였다. 그들의 아픔이 섞였다. 그들의 사랑이 섞였다.
마지막 순간, 이준은 생각했다. 이것이 속죄인지, 아니면 구원인지.
하지만 그 구분도 이제 의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