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동쪽 탑의 밤

동쪽 탑의 계단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이준은 서연을 따라 한 계단씩 올라갔다. 손전등의 불빛이 벽을 스쳐 지나갔고, 돌계단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서연은 말이 없었다. 어깨가 긴장으로 움직였다.

"여기가…" 이준의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만." 서연이 손을 들었다. 손전등을 껐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준은 눈을 깜빡였다. 가슴이 두드렸다. 이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다른 것. 익숙한 것. 손가락이 저렸다.

서연이 움직였다. 이준은 그 움직임만으로 그녀의 위치를 알았다. 왜?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문이 있었다. 서연이 밀었다. 문이 열렸고, 별이 쏟아져 내렸다.

동쪽 탑의 최상층은 망루였다. 난간이 없었다. 하늘이 모두였다. 별들이 가슴팍에 박혔다. 이준은 숨을 쉬지 못했다.

"이곳이야."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가 왔던 곳."

우리.

그 단어가 이준의 가슴을 갈랐다. 깊은 곳.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이 한 점에 모이는 느낌. 황금빛이 손가락에서 피어올랐다. 이준은 손가락을 주먹으로 쥐었다.

"기억이 나니?" 서연이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은 별빛으로 반쯤만 보였다. "그날 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이준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머리는 빈 종이였다. 하지만 신체는 말했다.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가슴이 울었다. 목구멍이 아팠다.

"모른다," 이준이 말했다.

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보자 이준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손이 서연의 얼굴에 닿으려 했다. 그것을 멈췄다.

"우리는 여기서 별을 봤어." 서연이 땅에 앉았다. "매일 밤. 망루 끝에 앉아서."

이준이 서 있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으로 가면 안 된다는 신체의 저항.

"당신이 나한테 말했어. '저 별들 저편에 우리가 갈 곳이 있다고.'" 서연의 목소리가 얇았다. "당신은 항상 별을 셌어.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매일 같은 별을 세면서 '오늘도 여기 있네'라고 했어."

이준의 손가락이 저렸다. 하나, 둘, 셋.

"언제쯤 갈 수 있을까?" 그 목소리는 이준의 입에서 나왔다. 그가 말한 것이 아니었다. 신체가 말했다. "언제쯤 우리 도망칠 수 있을까?"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이준을 마주했다. 별빛 속에서 그녀의 눈은 검었다. 검은 별.

"한 달이면 돼." 서연이 말했다. 마치 낭송하듯. "당신이 말했어. 그 말이야. '한 달이면 우리가 궁궐을 떠날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당신은 호위대의 교대 시간을 알고 있었어. 남쪽 정문의 경비 체계도 알고 있었어. 당신은 심문관이니까."

한 달.

이준의 기억이 터졌다. 폭발이었다. 황금빛이 아니라 다른 색. 검은색. 서연의 손을 잡은 손가락에서 검은 불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서연의 검은 불과 닿았다. 색이 바뀌었다. 핑크색. 섬세하고 약한 색. 기억을 태우는 색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색.

이준의 눈이 떠졌다. 정말로 보았다. 처음으로.

긴 검은 머리. 광대뼈 높은 얼굴. 눈썹 아래 작은 흉터. 왼쪽 입가 옆 점. 그리고 눈. 그 눈은 15년을 살아낸 눈이었다. 기억 없이 15년을 살아낸 눈.

"당신이 나를 지웠어." 서연이 말했다.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기계처럼. "그 밤에. 왜?"

이준의 입이 떨렸다. 손이 서연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핑크색 불이 타올랐다. 아팠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통증. 기억이 돌아오는 통증.

"왕이…" 이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더 어린 목소리. 15년 전 목소리. "왕이 명령했어. 당신을 지우라고. 당신을 죽은 것으로 만들라고."

"그리고 당신은 했지."

"나는… 나는…" 가슴이 울었다. 정말로 울었다. 눈에서 물이 나왔다. 자신의 눈물인가, 아니면 15년 전 그 소년의 눈물인가? 차이가 없었다. "나는 당신을 지워야 했어.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야 했어."

서연의 얼굴이 움직였다. 눈이 떨렸다. 하지만 눈물은 없었다. "나는 죽지 않았어. 나는 이렇게 살아남았어. 기억 없이."

핑크색 불이 밝아졌다. 이준의 손가락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서연의 손가락에서도 나왔다. 손이 닿은 곳에서 색이 변했다. 황금색. 검은색. 핑크색. 모든 색이 섞여서 새로운 색을 만들었다. 기억의 색이었다.

"당신이 내 기억을 되살려줄 수 있니?" 서연이 물었다.

이준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다."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준과 서연이 돌아섰다. 망루의 어둠 속에서 민서가 나타났다. 손에는 낡은 책이 있었다. 기억의 도서관에서 나온 책.

"당신은 기억을 지우는 것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민서가 말했다. 목소리는 조용했다. "당신은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어. 역으로."

"어떻게?" 이준이 물었다.

"지워진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어. 숨어 있을 뿐이야. 당신의 능력은 기억을 태우는 게 아니라, 기억을 옮기는 거야. 그것을 옮길 때, 우리는 그 기억들을 기록했어." 민서가 책을 펼쳤다. "이것이 당신이 지운 모든 기억들이야. 서연의 기억도 여기 있어. 당신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이 기억들을 그녀에게 돌려주면, 그녀는 다시 기억할 수 있어."

이준의 손이 떨렸다. 민서는 기억지킴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이 서연을 찾을 때까지.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당신도 함께 기억하게 돼. 당신이 지운 모든 것을 다시 알게 돼." 민서가 말했다. "당신이 누였는지.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당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는지. 그리고 그것을 견딜 수 있니?"

이준은 서연을 봤다. 서연은 이준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준의 기억이 또 터졌다.

그것은 플래시백이 아니었다. 현재이면서 과거였다. 동시에.

그들이 앉아 있었다. 별 아래. 서연이 웃고 있었다. 진짜 웃음. 목이 나올 정도의 웃음. 이준이 그 웃음을 들었다. 자신도 웃었다. 그것이 이준이 웃은 마지막 순간이었다. 15년간 웃지 않은 이준.

"한 달이면 괜찮을까?" 과거의 서연이 물었다.

"괜찮을 거야." 과거의 이준이 말했다. "우리는 이 벽을 넘고, 북쪽 숲을 지나서, 그 너머의 마을로 갈 거야.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 거야. 누가 우리를 찾지 못할 데서."

"약속이야?" 서연이 손을 내밀었다.

이준이 손을 잡았다. "약속이야."

그 손을 지금 이준이 잡고 있었다. 현재의 손. 하지만 과거의 손이기도 했다. 손가락에서 핑크색 불이 타올랐다.

"당신이 내 기억을 되살려주면," 서연이 말했다. "당신도 함께 기억해야 해. 당신이 나를 왜 지웠는지. 그것을 견딜 수 있니?"

이준의 입이 열렸다. 그 순간.

경종이 울렸다.

동쪽 탑을 흔드는 종소리. 왕의 경종이 아니었다. 경보의 종. 위험의 종.

"호위대가 온다." 민서가 말했다. 얼굴이 창백했다. "당신들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어."

이준은 난간 너머로 봤다. 아래에서 불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횃불. 수십 개의 횃불. 호위대.

"도망쳐야 해." 민서가 말했다.

하지만 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연도 놓지 않았다.

"당신이 내 기억을 돌려준다면," 서연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

이준의 눈이 떠졌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또 지운다면," 서연이 계속했다. "나는 당신을 죽일 거야. 내 손으로."

그 말이 이준의 가슴을 뚫었다. 협박이 아니었다. 약속이었다. 서연의 검은 눈에서 나오는 약속. 그 약속이 이준을 움직였다. 왕의 명령보다 강한 무언가가.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호위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준의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폭발했다. 서연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계단 쪽을 향했다. 호위대를 향했다.

황금빛이 계단을 채웠다. 호위대의 외침이 들렸다. 기억이 태워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왜 왔는지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도 함께 잊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서연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황금빛에 태워지고 있었다.

"아니야!" 이준이 외쳤다. 서연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아니야, 아니야!"

너무 늦었다. 호위대의 기억들이 사라졌다. 이준의 기억도 함께 사라졌다. 서연의 웃음. 약속. 목소리. 모두.

이준이 무릎을 꿇었다. 서연이 그를 잡았다.

"당신이 이걸 해야 해." 서연이 말했다. 목소리만 남았다. 다른 모든 것이 황금빛에 타버린 후. "당신이 내 기억을 돌려줄 때까지, 나는 여기 있을 거야. 당신이 나를 기억할 때까지."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눈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황금빛에 태워진 눈에서.

호위대의 발소리가 멈췄다. 그들은 이곳에 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발소리가 났다. 더 빠른 발소리. 더 무거운 발소리.

왕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준은 알았다. 선택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서연의 기억을 되살려주거나, 아니면 그녀를 지우거나. 그 둘 중 어느 것도 왕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

호위대의 발소리가 계단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이준은 서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일어섰다.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상처처럼. 사라진 기억들의 흔적처럼.

"왕이 온다." 민서가 창문 너머를 내다봤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직접 오고 있어. 경비대장을 대동하고."

이준의 귀가 경보음을 들었다. 동쪽 탑 하단에서 울려 나오는 또 다른 종. 왕의 종. 그 종소리는 신체에 박혀 있는 명령이었다. 심문관의 의무. 왕의 소환. 거부할 수 없는 것.

그런데 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연이 이준을 보았다. 검은 눈에 뭔가가 떠올랐다. 놀라움? 다른 감정? 이준은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기억이 너무 많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내 기억을 돌려줘." 서연이 말했다. 단순한 문장. 단순한 요청. 하지만 그 안에는 15년의 무게가 있었다.

"그러면 난 죽어." 이준이 대답했다. 자신도 놀랐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진실이었으니까.

"나도 죽어." 서연이 말했다. "당신의 손에 죽을 거야. 아니면 왕의 손에. 어차피 죽음이라면, 적어도 내 기억을 가지고 죽고 싶어."

계단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한 발씩.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

"숨을 수 있는 곳이 있나?" 이준이 민서를 봤다.

민서가 고개를 저었다. "동쪽 탑의 최상층에는 통로가 하나뿐이야. 이 계단이."

"아니다." 이준이 창문으로 갔다. 동쪽 탑은 궁궐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아래는 60척 이상의 낙차. 죽음의 높이였다.

하지만 이준의 눈에 뭔가가 보였다. 창문 너머, 인접한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 그곳에 설치된 낡은 목재 다리. 15년 전, 자신과 서연이 이곳으로 올라올 때 사용했던 탈출로.

"저기." 이준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미쳤어?" 민서가 말했다. "저 다리는 부러질 거야. 무게를 견디지 못해."

"그럼 죽겠지." 이준이 대답했다. 차갑게. 감정 없이. 자신의 죽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서연이 다가왔다. 창문 너머를 내다봤다. 그리고 웃었다. 광기 섞인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이었다.

"당신이 올라왔던 다리네." 서연이 말했다. "15년 전. 나한테 보여줬어. 이 다리를 통해 우리가 도망칠 거라고."

이준이 그녀를 봤다. 파편이 떠올랐다. 서연의 얼굴. 다리를 보며 웃던 모습. 손을 잡으며 "우리 해낼 수 있어"라고 말하던 목소리.

기억이었다. 진짜 기억.

계단에서 발소리가 최상층에 도달했다.

"이제야."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명령조이고,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 "심문관 이준. 나타나."

문이 열렸다. 왕이 들어섰다. 뒤에는 호위대장과 세 명의 검사들이 있었다. 얼굴에는 공포가 없었다. 오직 의무만 있었다.

"폐하." 이준이 무릎을 꿇었다. 습관처럼. 15년간의 조건반사처럼.

하지만 그 무릎은 서연 쪽으로 향해 있었다.

왕이 서연을 봤다. 눈이 변했다. 공포가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 하지만 분명했다.

"서연." 왕이 말했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저주처럼 들렸다. "15년이 지났네."

"폐하." 서연이 말했다. 무릎을 꿇지 않았다. "나를 죽이러 오셨습니까."

"죽이러?"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웃음이 아니라, 광기 섞인 웃음이었다. "이미 죽었는데. 15년 전에."

"거짓이군요." 서연이 말했다.

"거짓?" 왕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심문관 이준이 거짓을 만들었지. 그 여자가 죽었다고."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왕을 봤다. 그 순간,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왕이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 "그 여자의 기억을 모두 지워. 모두. 그리고 그 여자도 지워. 역사에서."

하지만 이준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손가락에서 나온 황금빛은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다. 기억만 태웠다.

"이제 끝이야." 왕이 호위대장에게 말했다. "둘 다 지워. 기억도, 생명도."

호위대장이 검을 뽑았다. 세 명의 검사들도 따라 했다.

이준이 일어섰다.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타올랐다. 하지만 다르다. 왕을 향하는 황금빛이었다. 처음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지배당하던 왕을 향하는 황금빛.

"심문관." 왕이 말했다. "그 손가락을 내려. 명령이야."

이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명령에 저항하는 신체. 15년간 조건 지어진 신체. 하지만 그것도 떨렸다.

"안 돼." 이준이 말했다. 처음으로. 왕에게 거역하는 말.

그 순간, 서연이 움직였다. 손에서 검은 불이 피어올랐다. 이준과 다른 불. 자신의 분노로 타오르는 불. 기억 저항 체질인 그녀에게 기억지킴이가 부여한 능력. 기억을 지키는 검은 불.

민서가 외쳤다. "통로!"

손짓했다. 벽의 한 지점에. 숨겨진 문이 열렸다. 기억지킴이들이 만들어놓은 탈출로.

호위대가 움직였다. 검을 휘둘렀다.

이준이 서연의 손을 잡았다. 검은 불이 이준의 손을 태웠다. 고통이었다. 하지만 다른 고통이었다. 자신을 지우는 고통이 아니라, 자신을 깨우는 고통.

셋이 통로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호위대의 발소리가 들렸다. 왕의 목소리도. "잡아! 반드시!"

통로는 좁았다.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유일한 길이었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어?" 이준이 물었다.

민서가 대답했다. "기억의 도서관으로. 지하 깊숙이. 거기서 우리가 보호할 수 있어."

"보호?" 서연이 웃었다. 목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왕이 추적해올 거야. 기억지킴이 조직도 왕의 호위대를 오래 막지 못할 거야."

"그럼 싸워야 해." 민서가 말했다.

이준이 서연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검은 불이 계속 타올랐다. 자신을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놓지 않았다.

기억이 또 떠올랐다. 지금이었다.

이 순간이 새로운 기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왕을 거역한 순간이 기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서연을 선택한 순간이 기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기억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뒤에서 횃불의 빛이 통로를 밝혔다. 왕이 따라오고 있었다. 10초. 그것이 이준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이준의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다시 타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자신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왕과 호위대의 기억을 영구적으로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서연을 추적하지 못하도록. 그 대가로 자신도 함께 사라지더라도.

황금빛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왕의 외침이 들렸다. 호위대장의 비명이 들렸다. 기억이 태워지고 있었다. 누였는지, 왜 여기 있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그리고 이준도 함께 태워지고 있었다. 눈에서 피가 흘렀다. 손가락에서 황금빛이 폭발했다. 자신의 정체성까지 지워가며.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전의 능력 사용과 달리, 이것은 완전한 소멸이었다. 자신이 누였는지, 무엇을 했는지, 모든 것을 영구적으로 태우는 것. 돌아올 수 없는 소멸.

서연이 그를 끌었다. "가!"

이준은 자신의 이름을 잃고 있었다. 누였는지 잊고 있었다. 왕의 심문관이었다는 사실도, 몇 명을 해쳤는지도 잊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남았다.

서연의 손. 그 손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통로의 끝이 보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기억의 도서관으로.

이준과 서연이 뛰어내렸다. 민서가 뒤따랐다.

뒤에서 황금빛이 통로를 삼켰다. 왕의 목소리가 끊겼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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