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종이 울렸을 때
왕의 종이 울렸을 때, 이준의 손은 여전히 서연의 손 위에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팔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 무기력함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회랑의 조명이 흔들렸다. 황금빛 촛불이 벽에 드리운 그림자를 일렁이게 했고, 그 그림자 속에서 이준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 그런데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가시겠어요?"
서연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인의 얼굴이 촛불에 반쯤 비쳤다. 눈물로 젖어 있는 뺨, 하지만 입가는 웃음처럼 휘어져 있었다.
"날 기억해야 해요, 이준. 반드시."
이준이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팔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 같았다.
종이 울린 지 세 번. 왕의 소환은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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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심문관실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같았다. 돌계단, 횃불, 그리고 내려갈수록 짙어지는 침묵. 이준은 자신의 발걸음을 세지 않았다. 세지 않으면 거리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왕은 옥좌에 앉아 있었다. 창문 없는 왕실의 깊숙한 방. 촛불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왕의 얼굴은 그림자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심문관."
목소리가 낮았다. 이준은 절을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왕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 궁궐 경내에서 의문의 여인이 목격되었다."
"예."
"누구냐."
이준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그에게 말하지 말라고 강하게 명령하고 있었다. 그것이 왕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 안의 다른 무언가의 명령처럼 느껴졌다.
"알 수 없습니다."
왕이 일어섰다. 옥좌에서 내려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이준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알아내거라. 그것이 네 일이 아닌가."
"예, 폐하."
"그 여인의 신원을 조사하고, 그녀의 기억을 확인하라. 반역의 낌새가 있는지, 혹은 단순한 기생충인지. 그리고..."
왕이 멈췄다. 이준은 왕의 호흡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고르지 않았다.
"그녀가 위험하다면, 제거하라."
이준이 눈을 떴다. 고개를 여전히 숙인 채, 하지만 눈은 떠졌다. 왕의 발은 이제 자신의 눈높이에 있었다.
"알겠습니다."
왕이 돌아섰다. 옥좌로 돌아가는 발걸음. 그리고 다시 그 목소리.
"네 능력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이준. 오늘 심문관실에서 역류가 있었다고 들었다."
이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역류. 그것은 최악의 실패를 의미했다. 자신이 태우려던 기억이 역으로 흘러나온 것. 그리고 그것이 왕의 귀에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제 실수입니다."
"실수는 용서받지 못한다. 궁궐의 비밀이 흘러나왔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준이 절을 했다.
"다시는 없겠습니다."
"그렇길 바란다. 그리고 이준."
"예."
"그 여인의 얼굴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그리고 그 기억을 지워버려라. 완전히."
이준이 심문관실로 내려갔을 때,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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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관실의 벽은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마다 이준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그 빛이 자신을 태우고 있는 것 같은 감각. 하지만 온도는 없었다. 단지 시각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심문을 위한 의자. 수백 명이 앉았던 의자.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태워 없애던 의자. 이준이 그 의자에 앉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손을 펼쳤다.
황금빛이 손가락 끝에서 피어올랐다. 아주 가늘게, 마치 연기처럼. 하지만 그것은 불이었다. 그의 불이었다. 자신이 만드는 불이었다.
'서연.'
이름을 생각하는 순간, 손가락의 황금빛이 흔들렸다. 흔들리다가 급격히 커졌다. 손목까지 타올랐다.
통증이 왔다.
이준이 비명을 질렀다. 손을 흔들어 불을 꺼내려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불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만든 불이었다. 의지로 꺼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꺼나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중얼거리며 손을 물에 담갔다. 심문관실 한구석에 있던 물통. 황금빛이 물 속에서 피로 변했다.
순간, 이준의 눈에 이미지가 떠올랐다.
피가 흐르는 손.
자신의 손이 아닌 누군가의 손.
그 손을 잡으려다가 자신의 손이 물처럼 흐르는 것.
이준이 손을 빼냈다. 황금빛은 꺼져 있었다. 손에 화상은 없었다. 하지만 통증은 남아 있었다. 마치 영혼이 타는 것 같은 통증.
그는 벽에 기대앉았다. 심문관실의 황금빛 벽. 그 빛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처럼. 하지만 비친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젊은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이 자신을 보며 입을 움직였다.
'나를 잊지 말아 줘.'
그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지웠던 목소리. 그런데 왜 이렇게 생생하게 들리는가.
이준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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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동쪽 탑으로 가는 회랑.
이준은 그곳을 지나며 가슴이 아팠다. 매번 지날 때마다 그랬다.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통증은 실재했다. 마치 어딘가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처럼. 누군가 깊은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는 것처럼.
서연을 다시 만난 것은 동쪽 탑의 정원이었다. 왕실의 정원은 항상 비어 있었다. 정원사들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서연은 분수 옆에 서 있었다. 검은 옷은 벗었고, 이제 밝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당신이 왔네요."
"왕의 명령입니다."
"명령? 그것뿐이에요?"
이준이 한 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그 여인의 얼굴이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를 지웠어요."
"모르겠습니다."
"거짓말. 당신의 눈이 말해주고 있어. 당신도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서연이 한 발 다가섰다. 이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수 없었다. 마치 발이 땅에 못 박힌 것처럼.
"15년 전, 당신은 나의 손을 잡고 있었어요. 별을 보며 도망칠 계획을 세웠어. 우리 둘 다."
"그런 기억은 없습니다."
"당신이 지웠으니까."
서연의 손이 이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이준의 눈 앞에 별이 떠올랐다.
밤하늘 가득한 별.
누군가의 손. 따뜻한 손.
"도망쳐, 이준. 제발 도망쳐."
그 목소리. 자신이 지웠던 목소리. 그런데 왜 이렇게 생생하게 들리는가.
이준이 손을 빼냈다.
"당신을 조사해야 합니다."
"조사? 당신이 나를 지웠는데?"
"그렇다면 당신의 신원은 없습니다."
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울음이었다. 그 울음 속에는 계산된 표정이 숨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예상된 일인 것처럼.
"당신은 나를 모르는 척하고 싶어요. 그래야 편하니까. 나도 당신도 모두 편할 테니까."
"맞습니다."
"거짓말."
서연이 한 발 다가섰다. 이준은 그 움직임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15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절망과 광기와 집념.
"나는 당신을 기억해요. 당신의 얼굴,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손. 모두. 당신이 나를 지웠지만, 나는 당신을 지우지 않았어. 15년을 나 혼자 기억했어. 당신이 한 일을. 당신이 내게 한 일을."
이준이 눈을 감았다.
"미안합니다."
"미안? 미안이라고? 당신은 내 인생을 빼앗았어. 내 기억을 빼앗았어. 내 정체성을 빼앗았어. 그리고 미안이라고?"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서연의 손이 이준의 양 어깨를 잡았다. 그 손의 힘이 세었다. 마치 15년의 분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돌려줄 수 없어. 이미 너무 늦었어.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어. 당신이 만든 다른 사람으로."
그 순간, 이준의 뒷목이 차가워졌다. 마치 누군가 등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감각.
이준이 돌아섰다.
정원의 한구석에 민서가 서 있었다. 기억지킴이의 일원. 그녀는 이미 얼마나 오래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심문관. 서두르세요. 궁궐의 시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누군가를 부르셨나요?"
"아니에요. 누군가 당신을 미행하고 있는 거예요. 남궁파의 사람들이."
이준이 서연을 바라봤다. 여인의 얼굴에는 이미 계산된 표정이 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계획된 일인 것처럼.
"우리를 따라와요."
민서가 손을 내밀었다. 이준은 그 손을 보았다. 따뜻해 보이는 손. 하지만 손을 잡는 순간,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손을 놓친 것. 그리고 그것을 영원히 놓친 것.
이준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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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빠져나가는 길에서, 이준은 뒤를 돌아봤다. 동쪽 탑이 보였다. 그 탑의 최상층에서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창문은 어두웠다.
궁궐의 회랑에서 이준은 멈췄다. 민서와 서연은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심문관?"
민서가 뒤를 돌아봤다.
"저는... 왜 이 길을 모르는 거죠?"
이준이 회랑을 바라봤다. 벽에는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역대 왕들의 초상화. 하지만 한 곳이 비어 있었다. 초상화가 있어야 할 벽 한구석이 텅 비어 있었다.
그 빈 자리를 보는 순간, 이준의 눈에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왕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지웠던 얼굴이었다.
"심문관, 빨리요. 왕의 추적대가 움직이고 있어요!"
민서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빈 초상화 자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서 황금빛이 피어올랐다.
작은 불씨처럼, 하지만 점점 커지는 불씨처럼.
"당신은 나를 기억해야 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절대로 나를 잊으면 안 돼."
이준의 손가락 끝에서 황금빛이 타올랐다. 작은 불씨가 아니라 이미 살아 움직이는 불꽃이었다. 피부 위를 흐르는 액체 금처럼, 그것은 손목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갔다.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려 하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이준은 손을 움켜쥐었다. 불을 누르려 했지만, 불은 계속 커져만 갔다.
"심문관!"
민서가 달려왔다. 서연도 뒤따랐다. 둘의 얼굴에는 공포가 아니라 확인하는 듯한 표정이 있었다.
"이건... 처음입니까?"
민서가 물었다.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손에서 타오르는 불이 고통이 아니라 뭔가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피가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기억이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심문관실로 가야 해요."
민서가 이준의 팔을 잡으려 했다. 손이 닿는 순간, 황금빛이 더 강해졌다.
"만지지 마."
이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목소리.
"나는 지금 누구를 지우려는 중입니까?"
손에 피어난 황금빛을 보며 이준이 물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지우려는 능력의 신호였다. 하지만 그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회랑에는 오직 자신, 민서, 서연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우려는 대상은?
이준이 손을 펼쳤다. 황금빛이 손바닥에 모였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는 이준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손에 피어난 황금빛을 보며 이준은 깨달았다. 그것이 누구의 기억을 태우고 있는지. 손가락 끝의 불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그리고 왕이 자신에게 명령한 것이 무엇인지.
"당신을 지우고 있어요."
서연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절망과 광기가 섞여 있었다.
"당신이 당신을 지우고 있어요. 15년 동안."
이준이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황금빛이 꺼졌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통증. 심한 통증.
그 통증 속에서 이준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서연을 지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지웠다는 것을.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기억을 불태웠다는 것을.
"왕이 부른다."
궁궐의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다르게 들렸다. 명령이 아니라 경고처럼. 위험을 알리는 신호처럼.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회랑의 끝에서 왕의 호위대가 나타났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마치 기억이 지워진 것처럼.
"심문관 이준. 왕께서 부르신다."
맨 앞의 병사가 말했다.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신원 미확인 여인의 신원을 조사하라."
"이미 조사 중입니다."
"서두르라. 왕께서 불안해하신다."
불안해한다. 이준은 그 표현을 곱씹었다. 절대 권력자가 불안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권력이 흔들렸다는 뜻인가. 아니면 자신이 지운 것 중 무엇이 돌아왔다는 뜻인가.
호위대가 서연을 바라봤다. 그들의 손이 칼자루에 닿았다.
"여인, 따라오시오."
"아니에요."
민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여인은 왕실의 손님입니다. 왕비께서 직접 주선하신 분이에요."
호위대의 리더가 잠깐 멈췄다. 왕비의 이름이 나오자, 그들의 손이 칼자루에서 떨어졌다.
"왕비께서?"
"맞습니다. 왕비께서 이 여인을 보호하라고 했어요. 만약 왕비의 명령을 거슬린다면, 왕께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거짓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거짓이었다. 호위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왕실의 권력 구조는 복잡했다. 왕의 명령도 있고, 왕비의 명령도 있었다. 그리고 왕비의 명령은 왕의 명령과 상충할 때가 있었다.
호위대의 리더가 한 걸음 물러섰다.
"심문관, 왕께서 기다리신다."
호위대가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회랑의 모서리에 멈춰 서서 이준을 감시했다.
"왕비가 개입했어요?"
이준이 물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왕비. 그 이름이 자신의 기억 어딘가를 건드렸다. 마치 봉인된 무언가가 깨어나려 하는 것처럼.
"몇 시간 전에 나타나셨어요. 서연을 보고 나서 얼굴색이 확 변했어요.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민서가 답했다.
"그리고 나더러 당신을 찾으라고 했어요. 당신이 서연을 만나야 한다고. 당신이 깨어나야 한다고."
깨어나야 한다. 이준은 그 말을 반복했다. 자신이 자고 있었다는 뜻인가. 15년을 깨어나지 못한 채로 살았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왕비는 왜 자신을 깨우려 하는가. 왕은 자신을 계속 자게 두려고 하는데.
"심문관실로 가야 해요."
민서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서연을 조사하는 척해야 해요. 그래야 왕이 안심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이 당신을 되돌려야 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확신이 없었다.
"지워진 기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아와요."
서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계산. 준비. 기다림.
"당신의 기억은 지워진 게 아니라 봉인된 거예요. 그리고 봉인은 풀 수 있어."
서연이 이준에게 다가섰다. 호위대가 움직였다. 하지만 서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 얼굴에는 절망과 광기가 교차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기억해요. 당신의 손을 기억해요. 당신의 심장 박동을 기억해요. 우리가 별을 봤던 그 밤, 당신이 '우리 함께 여기서 나가자'고 했던 그 말도 기억해요."
이준의 눈이 떨렸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준의 몸이 반응했다. 심장이 빨라졌다. 손이 떨렸다. 마치 그 말들이 봉인된 무언가를 깨우고 있는 것처럼.
"당신이 한 것은 나를 지우는 게 아니었어. 당신이 한 것은 당신 자신을 지우는 거였어.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이 당신을 지웠어."
"서연..."
이준이 그 이름을 불렀다. 자신이 그 이름을 아는 것처럼. 아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당신을 되돌려야 해. 왜냐하면..."
서연이 이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이준이 손을 빼지 않았다. 손이 닿는 순간, 이준의 눈앞이 하얘졌다.
별이 떨어지는 밤.
두 사람이 누워 있는 탑의 최상층.
"당신의 이름은 뭐예요?"
"이준."
"이준... 좋은 이름이네."
"당신의 이름은?"
"서연. 우리 함께 도망가요. 이 궁궐에서, 이 왕실에서. 우리 함께."
손을 놓지 말자는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밤.
황금빛이 타올랐다.
이준이 눈을 떴다. 회랑이 보였다. 호위대가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놓지 않는 서연이 보였다.
"왕께서 기다리신다."
호위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이 일어섰다.
"심문관실로 가겠습니다."
"당신 혼자가 아니에요."
민서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당신이 서연을 조사할 때, 나도 함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기억을 찾을 때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요."
이준이 심문관실의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리고 황금빛이 더 강해졌다. 마치 그 빛이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심문관실의 문을 열었다.
황금빛으로 장식된 벽이 반짝였다. 그 벽을 보는 순간, 이준은 깨달았다. 이 벽이 무엇인지. 이 벽이 왜 황금빛인지.
이것은 감옥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감옥의 간수였다. 아니, 감옥 자체였다.
이준이 의자에 앉았다. 심문관의 의자. 그 의자 위에는 수백 명의 기억이 쌓여 있었다. 모두 자신이 태워버린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 아래에는 자신의 기억도 있었다.
손가락을 펼쳤다.
황금빛이 피어올랐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불은 손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그것이 고통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불 속에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밤하늘. 별. 손. 목소리. 약속.
"당신의 신원을 조사하겠습니다."
이준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공중으로 사라졌다. 왜냐하면 정말로 조사해야 할 대상은 서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손에서 피어난 황금빛은 이제 자신을 향해 타올랐다.
비명.
심문관실의 벽이 그 비명을 삼켰다.
마치 이 벽들이 수백 년을 기다려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