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래프트 1순위
11월 22일 밤 7시. 올림픽 체조경기장. 무대 위의 조명이 무섭도록 밝았다.
박준호는 관중석 좌측 가운데, 이수진 옆에 앉아 있었다. 손에 땀이 흘렀다. 10년 동안 경기장에서 수백 번 손을 씻었지만, 이렇게 손에 물이 나본 건 처음이었다.
"숨 쉬세요."
이수진이 팔뚝을 들었다. 박준호는 숨을 들이마셨다. 나가지 않았다.
무대 위에 진행자가 섰다. 남자 신인 투수 부문. 1순위 픽. 진행자의 입이 열렸다. 박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한강 베이스볼 아카데미, 이준영!"
경기장이 폭발했다. 환호. 박수. 휘파람. 박준호는 일어서지 못했다. 무릎이 떨렸다.
이수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검은 양복의 소년이 보였다. 얼굴이 창백했다.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마이크 앞에 섰을 때 목소리가 떨렸다.
"감사합니다."
그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 순간, 이준영의 눈이 관중석을 찾았다. 조명 아래서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1초. 2초. 박준호를 찾았다.
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영의 입가가 떨렸다. 웃음이었는지 눈물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무대를 바라봤다. 투수 글러브를 받아 들었다.
박준호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놓아주는 눈물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자신이 붙잡던 어떤 것을 내려놓는 눈물. 10년 동안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준영이 이뤘다. 그것이 기쁜 것도 있고,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슬픈 것도 있었다.
박준호는 왼쪽 어깨를 만졌다. 여전히 통증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공을 던질 때, 제자들의 투구폼을 교정할 때. 10년 동안 그 통증은 자신의 실패의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 그 통증이 다르게 느껴졌다.
무대 위의 이준영은 여전히 창백했다. 떨린 목소리, 경직된 어깨. 박준호는 그것을 본다. 제자가 짊어진 부담감. 1순위라는 무게가 그 어린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박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축하해야 할 순간인데, 무언가 소중한 것이 영영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박준호는 숨을 고르려 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풀었다. 다시 쥐었다. 풀었다. 반복되는 이 동작이 마치 자신의 욕망을 짜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수진이 박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드래프트가 계속됐다. 2순위, 3순위, 4순위. 박준호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무대 위의 이준영만 봤다. 투수 글러브를 들고, 모자를 쓰고, 구단 관계자들 옆에 서 있는 소년. 어제와는 다른 세상에 선 이준영.
그 순간, 누군가가 박준호의 어깨를 터치했다.
박민준이었다. 정장을 입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정말 대단하네. 원석을 다이아몬드로 깎는 감각이 있으신 것 같다."
박준호는 그를 바라봤다. 박민준의 눈은 아직도 예리했다. 시기. 경쟁. 하지만 그 아래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도 있었다. 호기심. 인정. 박준호는 한태오를 떠올렸다. 박민준의 팀에서 고생했을 그 아이. 그리고 자신은 그 아이를 외면했다.
"아니다."
박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난 그저 한 명을 택했을 뿐이다. 나머지 24명을 버렸다."
박민준의 미소가 굳었다. 그것은 박민준이 예상한 대사가 아니었다. 박준호가 자랑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준호는 그렇지 않았다.
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이수진이 박준호의 손을 다시 잡았다.
드래프트가 끝났다. 밤 9시 47분. 경기장의 조명이 꺼졌다. 관중들이 빠져나갔다. 박준호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일어섰다.
이수진과 함께 경기장을 나갔다. 밖은 서울의 야경이었다. 한강을 지나 외곽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이수진은 음악을 틀지 않았다. 박준호의 숨소리만 들렸다.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한강 아카데미로 갈까요?"
"응."
차는 한 시간을 달렸다.
밤 11시. 한강 베이스볼 아카데미. 경기장의 불이 켜져 있었다. 라커룸의 문이 열려 있었다.
박준호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24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한태오가 가장 앞에 있었다. 박민준의 팀에서 돌아온 아이. 어깨가 여전히 굽어 있었다. 하지만 눈은 살아 있었다.
한태오가 한 걸음 나아왔다.
"코치님, 저도 다시 하고 싶어요."
그 목소리에는 간청이 담겨 있었다. 박민준의 팀에서 겪었던 모든 것—말 한마디로 꺾이는 자존감, 매일 밤 혼자만 남겨진 느낌, 자신이 버려졌다는 확신. 그것들이 이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박준호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한태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이 떨렸다. 10년 동안 제자들을 다루며 떨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떨렸다.
"응. 다시 하자."
한태오가 박준호의 손에 고개를 묻었다. 어깨가 계속 떨렸다.
"코치님이 저를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목이 메어 있었다.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버린 것 맞았다. 아니, 버린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이었다. 한 명의 이준영을 위해 24명을 외면했다. 그것의 무게를 지금에야 느끼고 있었다.
박준호는 한태오를 안았다. 처음으로 제자를 안는 손이 떨렸다.
"미안해."
라커룸의 다른 아이들도 천천히 다가왔다.
2학년 투수 김동욱이 먼저 나섰다. 이준영보다 구속은 빨랐지만 제구가 불안정해서 선발 기회를 얻지 못했던 아이였다.
"코치님, 저도 프로에 가고 싶어요. 이준영이 할 수 있으면 저도 할 수 있어요."
3학년 좌완 박재호가 뒤따랐다. 어깨 부상으로 재활 중이던 아이. 눈물이 그대로 흘렀다.
"저는 이미 한 번 떨어졌어요. 다시 일어날 기회 주세요."
1학년 투수 이동준이 조용히 다가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저녁에 알바를 하고 새벽에 훈련하던 아이였다.
"코치님, 저도 해보고 싶어요. 제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다는 걸."
그들의 목소리가 겹쳤다. 각각 다른 사연, 다른 절망감이 담겨 있었다. 박준호는 라커룸의 벽을 봤다. 그곳에 붙은 사진들. 넌 우리만 봤다. 우리만 택했다.
박준호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모두 프로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의 눈이 흔들렸다. 솔직한 대답은 '아니요'였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드래프트는 선택이자 배제였다. 25명 중 1순위는 이준영 하나. 나머지는?
박준호가 다시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라커룸을 한 바퀴 돌며 각 아이의 눈을 봤다.
"너희 중 누가 다음 이준영이 될지는 모르지만, 누가 포기할지는 내가 정할 거다. 절대 아니다. 너희 각자가 정할 거다."
한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에요?"
"응. 나는 너희를 버렸다. 그 죄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박준호는 말을 멈췄다. 라커룸의 벽에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를 바라봤다.
"너희를 함께 보기 시작해보겠다. 모두를."
한태오의 눈이 커졌다. 확신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박준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작할 수는 있었다.
이수진이 라커룸 문에서 박준호를 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10년을 함께하며 처음으로 보는 박준호의 모습이었다.
박준호는 이수진과 눈을 맞췄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코치님, 저는요?"
막내 1학년 투수 한상민이가 손을 들었다. 작고 여린 아이. 어깨가 좁아서 다른 코치들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던 아이였다.
박준호가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한상민이의 어깨를 만졌다. 작았다. 하지만 그 안에 뭔가 있었다. 미세한 근육의 탄력. 투구 폼의 안정성.
"넌 어깨는 작지만, 팔의 길이가 길다. 그리고 회전력이 있다. 6개월이면 145킬로미터까지 나올 수 있어."
한상민이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에요?"
"응. 하지만 넌 이준영과는 다른 방식으로 훈련할 거다. 너의 몸에 맞는 방식으로."
박준호는 라커룸의 모든 아이를 한 명씩 봤다. 그들 각각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이준영처럼 명확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밤 11시 30분. 라커룸의 불이 꺼졌다. 아이들이 나가고, 박준호와 이수진만 남았다.
"이제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요?"
이수진의 질문에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어깨를 다시 만졌다. 여전히 통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절망이 아니었다. 여전히 무언가가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르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하지만 이준영을 보면서 깨달았다. 꿈은 대물림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수진이 박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 말이 뭐예요?"
"이준영의 드래프트 1순위는 내 성공이 아니라, 그 아이의 성공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 아이도, 그 다음 아이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저 길을 보여줄 뿐이다. 걷는 건 그들이다."
박준호는 경기장으로 나갔다. 밤 11시 45분. 한강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물빛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아버지'였다.
박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끝까지 기다렸다. 아버지의 음성 메시지가 울렸다.
"이준영이 1순위가 됐다고 들었다. 잘했다. 이제 다음이 중요하다. 내년에 또 한 명을 1순위로 보내라. 그래야 네가 정말 대단한 코치라고 인정받는다."
박준호는 음성 메시지를 듣는 동안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풀었다. 다시 쥐었다. 아버지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욕망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신이 이미 다른 곳에 서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박준호는 휴대폰을 끄지 않았다.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아버지의 욕망은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그것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었다.
박준호는 마운드로 올라갔다. 밤 11시 50분. 누구도 없는 그라운드. 박준호는 그곳에 서서 한강의 야경을 바라봤다. 포수 자세를 취하려다 멈췄다. 손을 내밀었다가 내렸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포즈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누군가 투구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누군가의 성공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것도.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박준호는 일어섰다. 그리고 돌아섰다.
경기장을 나가며 한 번 뒤를 돌아봤다. 라커룸의 불이 다시 켜져 있었다. 이수진이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25년을 함께한 여자. 10년을 함께한 코치. 그리고 지금, 함께 시작할 새로운 시간.
박준호는 차로 향했다. 밤 11시 55분.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메시지였다. 발신자는 '이준영 엄마'였다.
"코치님, 준영이가 프로에 가기 전에 한 번 만나고 싶대요.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박준호는 메시지를 읽었다. 감사. 그것이 전부였다. 메시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만나기로 하자.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24명의 제자들을 봐야 했다.
차는 한강을 지나 서울로 향했다.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준호는 창밖을 봤다. 한강의 물이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10년 동안 그는 물의 흐름을 거슬렀다. 자신의 부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자들을 욕망의 도구로 만들고,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물과 함께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흐름 속에서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25명의 제자들. 각자의 꿈. 각자의 가능성. 그리고 자신의 역할—그들의 길을 밝히는 불빛.
박준호의 어깨 통증이 다시 왔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