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모의 증거
경기장에 내리는 봄날의 햇빛이 유난히 거슬렸다. 박준호는 벤치에 앉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 정각. 한강 베이스볼 아카데미 대 박민준의 엘리트 아카데미 리그전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스탠드에는 100명 남짓 관중이 들어차 있었다. 대부분 선수들의 부모였지만, 박민준의 측 스카우터들도 몇 명 보였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경기장을 훑어보는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이미 승리를 확정하고 온 것처럼.
박민준 감독은 박준호를 발견하자 손을 들어 인사했다. 웃음이 묻어났다. 그 웃음은 "또 졌네"라는 무언의 말이었다.
박준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마운드에 눈을 고정했다.
이준영이 워밍업을 시작했다.
3개월 전 새벽 훈련장에서 박준호가 처음 본 그 아이는 구속 128km, 제구는 엉망, 자세는 흐릿한 아이였다. 타이밍이 조금씩 밀리고, 어깨 회전이 불완전했고, 눈빛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마운드에 올라온 이준영은 달랐다.
워밍업 첫 번째 구.
142km.
박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단순한 구속 상승이 아니었다. 어깨 회전의 각도가 정확해졌다. 발 딛음의 타이밍이 일관성을 얻었다. 투구 후 몸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모든 게 다시 조립되었다.
워밍업 네 번째 구.
144km.
관중석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박민준 감독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아이가 뭐하는 거야?"
박민준이 옆에 앉은 코치에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묻어났다.
경기가 시작됐다.
1회 1사. 이준영이 첫 투구를 날렸다. 147km의 직구. 상대 타자는 스윙하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박준호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이 이준영의 어깨를 따라다녔다. 회전축이 완벽했다. 손가락 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의 스냅이 정확했다. 3개월간의 훈련이 이 한 점에 모아져 있었다.
두 번째 투구. 직구 146km. 상대 타자가 스윙했다. 그라운드 볼. 1루수가 잡았다. 1아웃.
세 번째 투구. 직구 148km. 상대 타자가 허공을 그렸다. 볼이 미트에 박혔을 때의 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울렸다.
1회 3사. 무사 상황. 상대 팀의 4번 타자가 들어섰다. 엘리트 아카데미의 주전 타자였다. 키 크고 어깨가 발달한 아이였다. 타율 .380.
이준영이 심호흡을 했다. 마운드에서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자신감이 묻어났다. 박준호가 본 그 눈빛이었다. 3개월 전 새벽 훈련에서 이준영이 처음으로 보인 눈빛.
"이 아이는 정말로 프로가 될 수 있다."
박준호가 중얼거렸다.
첫 투구. 직구 148km. 상대 타자는 스윙했지만 공은 이미 미트에 들어가 있었다. 두 번째 투구. 직구 147km. 상대 타자가 헛스윙했다. 세 번째 투구. 직구 149km. 상대 타자는 배트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3진 아웃.
벤치에서 한강 아카데미 선수들이 환호했다. 이준영이 마운드에서 내려오면서 박준호와 눈이 마주쳤다. 박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는 계속됐다.
2회 초. 이준영의 구속은 148km에서 150km를 오갔다. 첫 타자에게 직구 149km를 던졌다. 타자는 헛스윙했다. 두 번째 타자는 직구 150km를 맞고 뜬공. 유격수가 잡았다. 세 번째 타자는 직구 148km에 헛스윙. 삼진.
3회 초. 이준영은 계속 던졌다. 상대 팀의 타자들은 무기력해졌다. 첫 타자에게 직구 149km, 헛스윙. 두 번째 타자에게 직구 147km, 헛스윙. 세 번째 타자에게 직구 150km, 삼진.
4회 초. 이준영의 구속은 여전히 안정적이었다. 첫 타자에게 직구 148km를 던졌다. 타자가 스윙했다. 타구가 뜨더니 좌익수가 잡았다. 두 번째 타자는 직구 149km에 헛스윙. 세 번째 타자는 직구 150km에 헛스윙. 삼진.
한강 아카데미는 선제골을 내줬지만, 2회에 이준영의 2루타와 5번 선수의 타점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5회 말. 박민준의 엘리트 아카데미가 1점을 더 올렸다. 2-1. 한강 아카데미 뒤.
6회 초. 한강 아카데미가 역전 스코어를 만들었다. 3-2. 한강 아카데미 앞.
박준호는 벤치에서 일어나 박민준을 바라봤다. 박민준은 더 이상 팔짱을 끼고 있지 않았다. 양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선명했다.
9회 말. 이준영이 마지막 투구를 날렸다. 150km의 직구. 상대 타자는 스윙하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경기 종료. 한강 베이스볼 아카데미 3-2 박민준의 엘리트 아카데미.
로커룸이 떠나갈 듯 환호했다. 선수들이 이준영을 둘러싸고 안아대기 시작했다. 한강 아카데미의 다른 투수들도 손을 들어 환영했다. 선수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희망이 가득했다.
하나를 제외하고.
한태오는 로커룸 한쪽에 앉아 있었다. 양팔은 가슴팍에 감겨 있었고, 눈빛은 어두웠다. 다른 선수들이 이준영을 축하할 때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박준호가 한태오를 봤다. 그 아이의 얼굴은 3개월 전과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던 얼굴이었다. 이제는 불안감과 질투가 뒤섞여 있었다. 로커룸의 다른 투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한태오 옆에 앉은 김민석이는 고개를 떨어뜨렸고, 벽에 기대선 이재호는 침묵 속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준영의 승리가 그들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로커룸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박준호가 로커룸을 나갔다.
경기장 입구에서 박민준이 박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단호했지만, 눈빛에는 의외의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질문이었다.
"어떻게 저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나?"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박민준의 눈을 봤다.
박민준의 입이 일자로 굳어졌다. 그가 한 발 물러섰다.
"3개월 전에만 해도 저 아이는 평범했잖아. 구속도 낮고, 제구도 엉망이었고... 어떻게?"
박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뭐라고?"
"그 아이 안에 있는 것을 본 거다."
박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몇 초 동안 박준호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분명히 불안감이 있었다. 자신의 엘리트 시스템이 놓친 무언가가 있다는 자각. 그것이 박민준을 흔들었다.
박민준이 돌아섰다.
"다음 리그전에서 만나자. 그때는 결과가 다를 거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자신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박준호는 그 자신감 아래의 불안감을 느꼈다.
박준호가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라운드의 그림자가 길어져 있었다. 박준호는 벤치에 앉았다.
이준영의 성공. 그것은 확실했다. 6개월 뒤 드래프트에서 1순위 픽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눈도 이미 그 아이에게 쏠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한강 아카데미의 다른 24명은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한태오도. 다른 유망한 아이들도. 모두.
박준호의 손가락이 자신의 왼쪽 어깨를 만졌다. 여전히 통증이 있었다. 10년 전의 부상이 만든 만성통증. 그 통증이 이준영을 읽는 감각이 되었다. 손상된 신체로부터 나온 직관.
하지만 그 직관의 대가는 무엇인가?
로커룸에서 소리가 났다. 무언가가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소리.
박준호가 로커룸으로 들어갔다.
한태오가 글러브를 던지고 있었다. 글러브가 라커 끝에 부딪혔다. 쿵. 다시 집어 들었다가 또 던졌다.
"뭐 하는 거야?"
박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한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주먹이 꼭 쥐어져 있었다.
"다음엔 내가 이긴다. 다음엔 내가 1순위 픽이 될 거다."
그 말은 다짐이 아니었다. 절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박준호에 대한 불신.
박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순간 박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김 국장이었다.
"박 코치, 이준영의 영상을 메이저리그 팀에 보냈습니다. 반응이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이 아이 정말로 1순위로 갈 수 있겠는데요. 축하합니다."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커룸에는 여전히 한태오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박준호의 성공이 자신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깨달음이 가득했다.
박준호가 느꼈다. 자신의 한 명만 보낼 수 있다는 제약이. 제자들을 경쟁시키고 있음을. 한 명의 영광이 다른 23명의 절망이 되고 있음을.
로커룸의 형광등 불빛이 한태오의 젖은 눈가를 반사했다. 박준호는 휴대폰을 귀에서 내렸다.
"잠깐만요."
김 국장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박준호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한태오에게 다가갔다.
"한태오."
"뭐요?"
목소리가 떨렸다. 고등학교 2학년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너지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글러브 들어."
"..."
"들어."
한태오가 천천히 글러브를 집어 들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박준호는 한태오의 눈을 봤다. 그 안에 있는 것을 읽으려 했다. 재능? 아니다. 이미 그건 알고 있었다. 한태오는 타고난 신체 능력이 있는 아이였다. 구속도 빨랐고, 제구도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박준호는 말했다.
"넌 내가 버린 게 아니야."
"그럼 뭐예요? 계속 벤치 돌리면서요?"
한태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른 선수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준영이 특별한 게 아니야. 그 아이가 한 것을 넌 못 하는 게 아니라—아직 안 한 거야."
"..."
"이준영은 어깨 회전 각도를 0.3초 앞당겼고, 발 딛음 타이밍을 조정했다. 그걸 내가 봤을 뿐이야. 넌 할 수 있다. 다르게 해야 할 뿐."
한태오가 박준호를 바라봤다. 눈빛이 흔들렸다. 희망인지 의심인지 섞여 있었다.
"내일부터 훈련을 다시 짠다. 넌 이준영과 다른 방식으로 간다. 이준영은 회전축 중심이면, 넌 스텝 중심으로. 네 신체에 맞춘 방식이 따로 있어. 내가 찾을 거고, 넌 따라와."
한태오의 눈이 흔들렸다. 첫 희망이 피어올랐다.
박준호가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김 국장, 들으셨나요?"
"네, 근데..."
"이준영도 좋지만, 다른 선수들도 봐주세요. 저희 팀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통화 상대편에서 침묵이 흘렀다.
"음... 일단 이준영이 우선인 것 같은데..."
"그렇겠죠. 근데 한 명만 본다면, 한강 아카데미의 장점이 없어집니다."
박준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뭔가 단호한 게 들어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로커룸의 다른 투수들이 박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민석이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이재호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고개를 드는 기미가 보였다.
박준호가 로커룸을 나왔다. 경기장의 해는 거의 지고 있었다. 그라운드에는 한강 아카데미의 로고가 그려진 깃발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낡은 깃발이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수진이 박준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경기 영상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준호. 좀 이상한데."
"뭐가?"
"이준영이 3개월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나? 구속이 14도 올랐고, 제구도 정확해졌고... 정상적인 성장 곡선이 아니야."
박준호가 멈췄다. 이수진의 눈이 그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녀는 박준호의 감정적 변화를 가장 잘 감지하는 사람이었다.
"네가 그 아이에게만 집중하고 있지. 다른 아이들은?"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태오는 왜 저러는 거? 다른 날과 다르게 보였는데."
박준호가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수진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넌 자신의 꿈을 포기했어. 그걸 알고 있어. 근데 이준영을 통해서 다시 시작하려고 하고 있는 거 아니야?"
"..."
이수진은 박준호의 훈련 영상을 보여줬다. 지난 3개월간의 기록. 이준영과의 훈련 장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태오의 훈련 영상은 한두 개에 불과했다. 박준호의 시선이 어디에 쏠려 있었는지 명백했다.
"한태오 같은 아이들은? 그 아이들도 너한테 왔어. 왜냐하면 넌 '최후의 기회의 땅'이라고 했으니까.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고 했으니까."
박준호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내일 아침부터 훈련 일정을 다시 짠다."
"그게 해결이 되나?"
"아니다. 하지만 시작이다."
이수진이 박준호를 오래 바라봤다.
"넌 한 번도 다른 선택을 해본 적이 없어. 항상 극단적이야. 다 아니면 무라는 식으로. 그게 너의 강점이면서도 약점이야."
"뭘 하라는 거야?"
"이준영과 한태오를 동시에 봐줘. 그 아이들의 신체는 다르고, 필요한 것도 다르니까. 이준영은 회전축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한태오는 스텝 타이밍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둘 다 프로에 갈 수 있어.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박준호가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해는 거의 지고 있었다. 하늘은 보라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경기장의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자동으로 켜지는 저녁 조명.
그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아버지였다.
박준호는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이준영이는 정말로 1순위 픽이 될 것 같구나."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있었다. 자부심도 있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하지 않고 뭐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이미 눈을 뒀다고 들었다. 그 아이가 성공하면, 한강 아카데미도 유명해지고, 너도..."
아버지가 말을 멈췄다.
"너도 자신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거다. 그렇지?"
박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니?"
"충분한가요?"
"뭐?"
"제자 하나의 성공이 아버지의 한계를 극복하는 건가요?"
통화 상대편에서 침묵이 흘렀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군요."
박준호가 전화를 끊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경기장의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혔다. 화면이 깜빡였다.
박준호는 그것을 집어 들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수진이 박준호의 손을 잡았다.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거짓말이지."
박준호가 이수진을 봤다. 그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뭔가 깨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내가 뭘 하든, 누군가는 상처를 받는 거구나."
"..."
"한태오도. 다른 투수들도. 그리고 내 아버지도. 그리고... 이준영도."
이수진이 박준호를 가까이 당겼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신중해야 해.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모두를 어떻게 안고 갈 거인지 생각해야 해. 넌 이미 한태오에게 구체적인 훈련 방식을 제시했어. 그 아이는 이제 희망을 가지고 있어. 그게 시작이야."
박준호가 이수진의 어깨에 기대었다. 해가 완전히 졌다. 경기장의 불빛만 남아 있었다.
로커룸에서 한태오가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글러브가 들려 있었다. 박준호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이준영은 회전축 중심이면, 넌 스텝 중심으로. 네 신체에 맞춘 방식이 따로 있어.'
한태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이미 자신의 위치는 정해진 게 아닐까? 이준영이 1순위 픽이 되면, 자신은 어디로 가게 될까?
하지만 박준호의 목소리에는 뭔가 달랐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방향이었다. 회전축. 스텝 타이밍. 신체에 맞춘 방식.
한태오는 천천히 글러브를 집어 들었다. 손의 떨림이 조금 줄어들었다.
밤 열 시를 넘기고 있었다. 한강 아카데미의 경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직 조명만 켜져 있었다.
박준호는 경기장 한 모서리의 벽에 붙어 있는 사진들을 봤다. 한강 아카데미를 거쳐 프로에 간 아이들의 사진. 그들의 첫 안타, 첫 홈런, 첫 선발 등장 기사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직 프로에 가지 못한 아이들의 사진도 있었다. 작은 글씨로 '수련 중'이라고 쓰여 있었다.
박준호가 손가락을 그 사진들 위에 천천히 움직였다. 한 명, 한 명.
각각의 얼굴이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의 선택에 의해 버려지거나 살아나는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준호의 왼쪽 어깨가 다시 아파 왔다. 10년 전의 부상. 그것이 이제는 이 아이들의 미래를 읽는 감각이 되었다. 손상된 신체로부터 나온 직관.
그리고 그 감각의 대가는 여전히 수집되고 있었다.
그 순간 박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김 국장이었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박 코치, 죄송한데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어서요."
"네?"
"이준영 외에 다른 선수도 정말로 프로 레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한태오 말이에요. 제가 봤을 때는..."
박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사진 위에서.
"한태오는 다른 방식이 필요합니다."
"다른 방식이라는 게?"
"내일 훈련을 보시면 알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김 국장이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 뭔가요?"
"이준영에게만 집중하면 더 빠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한 명을 완벽하게 만드는 게..."
박준호가 전화를 끊었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사진들 위에서.
한태오의 사진. 고등학교 2학년, 구속 145km, 제구 안정적. 아직 쓰여 있지 않은 미래.
박준호는 그 사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머지 사진들도. 한 장, 한 장.
그는 벽에 붙은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펜을 들었다. 한태오의 사진 옆에 새로운 훈련 계획을 적기 시작했다.
스텝 타이밍 개선. 신체 각도 조정. 개인 맞춤형 프로그램.
다음은 김민석이의 사진이었다. 그 옆에도 메모를 적었다.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경기장의 불빛 아래서 박준호는 한 명씩, 한 명씩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