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심연의 복도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앞을 막는 것은 돌이나 괴물이 아니었다.

"지원가 이준호. 당신은 현재 협회 자격 정지 상태입니다."

이태현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차갑고, 명확했다.

"S급 헌터 서연주, 김준영, 박혜진. 당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협회 명령을 거부한 죄로 자격이 박탈됩니다."

심연의 어둠 속에서 이준호의 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박혜진이 그를 바라봤다. 몇 초 전까지 자신의 손을 잡았던 손이 이제 차가웠다. 온기가 사라져 있었다.

"심연 입구에 봉쇄선을 설치했습니다. 진입하는 순간 모두 체포됩니다. 감정 증폭자는 생포. 나머지는 협회 재판정입니다."

서연주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당신은 어때요?"

서연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의 감정은 어디 있어요?"

이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연주를 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감정?"

한 글자씩 끊어서 내뱉었다.

"그것이 뭔지... 이제 모르겠습니다."

박혜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준호. 이준호!"

반응이 없었다.

유진석이 측정 장비의 화면을 들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감정 마모율... 65%."

목소리가 갈라졌다.

"말기 단계입니다."

측정 화면의 숫자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뭐냐고!" 서연주가 울음을 터뜨렸다. "말해! 뭐가 되는 거야?"

유진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 통각상실증이 불가역적이 됩니다. 돌아올 수 없어요."

"당신은 왜 계속 남을 돕고만 싶어요?" 서연주가 이준호의 옷깃을 잡았다. "당신은 어때요? 당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나한테! 박혜진한테! 김준영이한테! 우리 모두한테!"

이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이 없으면... 우리는..."

서연주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통신기에서 새로운 음성이 들렸다. 젊은 남자의 음성. 김태훈이었다.

"이준호, 들어?"

"나처럼 되지 마."

김태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20년 전, 나도 감정 증폭자였어. 나도 남을 도웠어. 계속 도웠어. 그리고 어느 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나는 돌아올 수 없었어. 0%, 완전한 무. 20년을 그 상태로 살았어."

침묵이 흘렀다. 심연의 어둠 속에서 오직 김태훈의 호흡음만 들렸다.

"하지만 너는... 아직 기회가 있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팀원들이 있어. 그들이 너를 붙잡을 수 있어. 나처럼 혼자가 아니야."

이준호의 눈이 박혜진을 향했다. 그리고 서연주를. 그리고 김준영을. 마지막으로 유진석을.

그들은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절망한 표정으로.

"협회 비밀 작전팀이 심연 입구에서 대기 중입니다. 현재 위치에서 항복하십시오. 저항하면 전원 사살합니다."

심연의 복도가 끝나고 있었다. 앞쪽에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그 너머로 검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감정의 화신들이 서식하는 곳.

감정 증폭자의 능력이 다시 울려 퍼질 곳.

심연의 입구.

그 입구 앞에는 협회의 차벽이 서 있었다.

수십 명의 협회 특수부대원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이태현이 서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냉정한 표정으로.

이태현의 눈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아래 뭔가 흔들리는 것이 있었다. 감정 증폭자를 생포해야 한다는 협회의 명령. 그것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자신이 받을 처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의 턱을 경직시켰다.

"생포하라. 감정 증폭자는 생포."

이태현이 손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명령조였지만,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팀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준호가 한 발을 내디뎠다. 그 다음 발도. 박혜진이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들어가요."

서연주와 김준영이 앞으로 나섰다.

유진석이 측정 장비의 끝을 들었다. 측정 화면의 숫자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감정 마모율이 계속 상승합니다. 심연 진입 시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는 장비를 내려다봤다. 수치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이준호를 봤다. 그의 동료를. 그리고 팀원들을.

"하지만 우리는 함께니까."

유진석이 낮게 중얼거렸다. 측정 장비를 들었던 손이 주먹으로 바뀌었다.

이태현이 다시 말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항복하십시오."

심연의 철문 앞에서 팀과 협회가 대치했다.

그 사이, 이준호의 눈이 처음으로 뭔가를 보는 듯했다.

박혜진의 손.

그 손을 놓지 않기로 결심하는 표정.

"들어가자."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우리 함께."

협회의 총구가 들렸다.

그리고 팀이 움직였다.

심연의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협회 특수부대의 총성이 울렸다.

첫 번째 탄환이 서연주의 옆을 스쳤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공기가 얼었다. 얼음 장벽이 팀 앞에 솟아올랐다.

"뛰어!"

서연주가 외쳤다.

김준영이 손을 펴며 폭발을 일으켰다. 협회 부대원들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화염의 벽. 박혜진이 이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고 달렸다.

"더 빨리!"

유진석이 뒤에서 무언가를 던졌다. 협회 정보국에서 빼낸 EMP 장치. 전자 장비들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순간, 총성이 멈췄다.

심연의 철문이 반 정도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검은 빛이 더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이태현이 소리쳤다.

"사격 재개! 생포 명령 해제! 전원 사살!"

이태현의 얼굴이 왜곡되었다. 감정 증폭자를 놓칠 수 없다는 집착이 그의 눈에 타올랐다. 협회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자신도 끝이라는 절박함이 그를 몰아붙였다. 그것이 분노로 변했다.

이준호가 철문 앞에 도달했다. 박혜진, 서연주, 김준영, 유진석이 모두 그의 뒤에 있었다. 협회 부대원들이 다시 총을 들었다. 이번엔 빗발치는 탄환이 날아왔다.

서연주의 얼음 장벽이 탄환을 막아냈다. 하지만 연속 사격 앞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준호! 지금이야!"

박혜진이 외쳤다.

이준호가 철문에 손을 댔다.

그 순간, 뭔가 변했다.

심연의 어둠이 반응했다. 철문이 갑자기 열렸다. 아니, 열린 것이 아니라 흡수되었다. 마치 심연이 스스로 입을 벌린 것처럼.

검은 빛이 폭발적으로 방출되었다.

협회 부대원들이 뒤로 밀려났다. 이태현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팀이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

심연의 내부는 다른 세계였다.

공간이 굽어 있었다. 위아래의 개념이 불분명했다. 벽에서 나오는 빛은 검은색이었다. 어둠이 빛나고 있었다.

팀원들은 한 발을 디디며 주변을 살폈다. 폐쇄된 공간. 뒤로 돌아갈 길은 없었다.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었다.

이준호가 첫 발을 디디자마자 몸이 떨렸다.

감정들이 들렸다.

절망. 분노. 공포. 욕망. 죄책감. 모든 감정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마치 세상의 모든 억눌린 감정이 이 공간에 갇혀 있다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감정들이 이준호에게로 몰려왔다.

"아, 아..."

이준호의 목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박혜진이 팔을 잡았다. "저기 봐! 저기!"

심연의 중앙에 무언가가 있었다. 거대한 형태.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것.

감정의 화신.

그것은 이준호를 봤다. 아니, 그것도 감정이었기에 이준호를 느꼈다.

"너다. 감정 증폭자."

화신의 목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들었다. 심연의 모든 벽이 울면서 그 음성을 전달했다.

"너는 우리를 깨웠다. 억눌린 감정들을 깨웠다."

유진석이 측정 장비를 들었다. 화면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모율이 급상승합니다! 70%... 75%..."

서연주가 얼음 창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은 화신을 지나갔다. 화신은 물리적 공격으로 상처 입을 수 없었다.

"이건 감정이야. 물리적 공격은 의미 없어."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감정 증폭자는 감정을 다루는 자. 그럼 나는..."

이준호의 손이 들렸다.

손가락을 펼쳤다. 마치 심연의 모든 감정을 손에 담으려는 듯.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심연의 벽이 울음을 터뜨렸다. 화신의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의 분노, 공포, 절망이 모두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이준호의 손이 그것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준호의 감정 마모율이 계속 올라갔다.

80%. 85%. 90%.

박혜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당신, 혼자가 아니야."

그녀가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손과 손이 만나는 순간, 박혜진의 기억이 흘러들었다. 5년 전 실패한 임무. 팀원을 잃었던 그날. 그녀가 막지 못했던 동료의 죽음. 그 순간의 공포, 자책, 그리고 그것을 혼자 견디며 쌓아올린 모든 슬픔.

이준호가 그것을 받았다.

박혜진의 손이 더 세게 이준호를 잡았다. "그때 내가 더 강했으면... 내가 더 빨랐으면..."

"당신 때문이 아니야."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충분히 했어."

서연주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도 이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무너지는 거, 난 못 봐."

그녀가 손을 펼쳤다. 얼음이 아니라 감정이 흘러나왔다. 20년을 혼자 견디며 쌓아올린 모든 슬픔과 분노가.

"20년을 혼자 견뎠어. 아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어. 그런데 넌... 계속 모두를 안아주려고 해. 나도 안아줘. 우리도 안아줘. 제발."

그녀의 감정이 이준호로 흘러갔다.

김준영이 주먹을 쥐었다. 눈물이 흘렀다.

"너 같은 놈이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우리가 있잖아."

그의 기억도 함께했다. 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동료를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 그리고 그것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던 무게.

"우리도 무거워. 같이 나눠 가져."

그의 감정도 이준호에게로 흘러갔다.

유진석이 측정 장비를 내려놨다. 손가락이 화면을 터치했다.

"나도."

그의 목소리가 작았다.

"측정만 하고 있었어. 숫자로만 봤어. 하지만 넌 우리 팀이야. 우리 동료야."

그도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의 감정도 함께했다. 팀의 일원이 되고 싶었던 간절함. 그것을 숨기고 있었던 외로움.

네 개의 감정이 한 점으로 모였다.

이준호를 중심으로.

"뭐야... 이건..."

유진석이 측정 장비를 들었다. 화면을 봤다.

마모율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내려가고 있었다.

90%에서 85%로. 85%에서 80%로.

"감정 마모율이 안정화됩니다. 아니, 회복 중입니다!"

심연의 벽이 울음을 터뜨렸다.

화신이 형태를 잃기 시작했다. 그것의 감정이 소산되고 있었다. 아니, 이준호와 팀원들이 그것을 받아내고 있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이것이... 감정 증폭자의 진정한 능력인가?"

화신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감정은 혼자 견딜 수 없는 것. 그것을 함께 나누는 것..."

이준호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갔다. 그의 신체가 반응했다. 심장이 뛰었다. 감정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이 증폭자의 진정한 능력이구나."

심연이 울렸다. 진동했다. 벽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손과 손을 맞잡은 채로 진동을 견뎠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더 깊은 심연.

더 거대한 감정의 화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

심연의 입구가 닫혔다. 협회는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었다.

이태현은 닫힌 철문 앞에서 멈춰 섰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감정 증폭자를 놓쳤다는 분노가 그의 얼굴을 붉혔다. 협회에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눈을 흔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작전 실패. 대상 탈출. 팀 전멸.

이태현은 통신기를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본부, 이태현입니다. 작전 실패. 대상이 심연 내부로 진입했습니다. 입구 폐쇄 확인. 재진입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통신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알았다. 이 침묵의 의미를. 협회가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지시를 기다리겠습니다."

이태현의 목소리가 낮았다.

---

이준호의 마모율은 안정화되었다.

팀원들의 손이 모두 그를 잡고 있었다.

"우리 함께 들어가자."

이준호가 말했다. 이번엔 목소리에 생기가 있었다. 감정이 담겨 있었다.

"진짜 심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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