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과학적 증명

지하 벙커의 형광등이 차갑게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

유진석이 도착했을 때 이준호를 보자마자 눈을 좁혔다. 과학자의 시선이었다. 측정하는 눈. 분석하는 눈.

하지만 그보다 먼저 유진석은 이준호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감정이 없는데도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신체의 모순. 뇌는 죽어가는데 신경계는 여전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마모율이 얼마입니까?"

유진석이 물었다. 첫인사는 없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펼쳤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뇌 스캔 이미지. 정상인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좌측 전전두엽과 편도체가 거의 회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95%를 넘었습니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감정이 없었다. 그 대신 남은 것은 사실의 인식뿐이었다. 자신의 뇌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자신의 감정이 증발해가고 있다는 사실.

"95%."

유진석은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지가 확대되었다 축소되었다 회전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뇌 스캔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 증폭자의 능력이 남긴 흔적이었다.

"신기합니다."

유진석이 고개를 들었다.

"정상인의 감정 회로와는 완전히 다른 패턴이네요. 당신의 전전두엽은 거의 활성도가 없고, 대신 측두엽과 후각 피질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이것이 감정 촉각이군요. 타인의 억눌린 감정을 감지하는 기관이."

박혜진이 움직였다. 유진석을 향해 한 발 다가갔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합니다."

유진석은 박혜진을 보지 않고 답했다.

"매우. 당신들은 감정 초월증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감정 마모가 100%에 도달했을 때 발생하는 현상 말입니다. 협회 기록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이를 경험한 감정 증폭자는 모두 행동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신경계 전체가 마비되는 거죠. 뇌사 직전의 상태."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는 겁니다."

서연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

"구할 수 없습니다."

유진석이 태블릿을 내렸다.

"적어도 일반적인 의학적 방법으로는. 하지만 당신의 경우는 다를 수 있어요."

그는 이준호를 바라봤다. 측정하듯이.

"당신의 능력이 타인의 감정을 흡수한다면, 역으로 타인의 감정을 주입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유일한 회복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영혼의 교감. 진정한 감정의 교환."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하는군요."

유진석이 다시 말했다.

"감정 마모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당신은 감정을 잃어가는지."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

김준영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유진석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당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준호."

유진석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과학자로서, 나는 이해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무엇인지. 당신의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당신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목이 메었다. 감정이 없어도 신체는 반응했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본능적 저항.

"감정 증폭 능력은... 상대방의 억눌린 감정을 감지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감정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는지를 감각적으로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감정을 자극하면... 그것이 물리적 에너지로 변환됩니다. 상대방의 잠재력이 깨어나는 거죠."

"에너지 보존 법칙입니다."

유진석이 말했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감정 자극은 당신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래서 당신의 감정이 소진되는 것이군요. 처음에는 약간의 피로감. 하지만 반복되면서 감정 회로 자체가 마모된다. 신경세포가 손상되고, 신경전달물질이 고갈되고, 결국 감정 인식 능력 자체가 사라진다."

"정확합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자신의 뇌가 죽어가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받으니 더 현실적이 되었다. 더 절망적이 되었다.

"그렇다면 회복은?"

유진석이 물었다.

"당신이 소진한 감정은 어디서 다시 채워질 수 있습니까?"

"타인의 감정. 진정한 감정의 교환."

이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합니다."

박혜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확실했다.

"당신이 이준호를 구하려면 우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필요합니다."

유진석은 박혜진을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것이 협회가 감정 증폭자를 은폐하려던 이유입니다. 만약 이런 존재가 알려진다면, S급 헌터들은 협회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깨울 수 있으니까요. 협회의 통제 체계가 무너진다."

유진석이 태블릿을 다시 켰다.

"협회에서는 당신을 표본으로만 봤습니다. 측정 대상. 연구 대상. 하지만 당신은 사람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분노였을까, 아니면 회한이었을까.

"20년 전 나는 그것을 모르는 척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과학자로서의 호기심만 따라 움직였어요. 그러다가 그 감정 증폭자가 사라졌고, 나는 계속 협회에 남았습니다. 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측정하고, 기록하고, 은폐했습니다."

유진석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면서 깨달았어요. 그 20년 전 감정 증폭자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를 보던 눈빛이. 그는 나를 믿었어요. 협회의 연구원인 나를. 그런데 나는 그를 버렸습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이번엔 유진석의 손이었다.

"그래서 나는 협회를 나왔습니다. 이번엔 다르게 하기 위해. 이번엔 당신을 구하기 위해."

그는 깊게 숨을 쉬었다.

"내 측정 장비로 당신의 마모를 실시간 추적하겠습니다. 심연 내부에서도 신호를 감지할 수 있어요. 감정 초월증의 조짐이 보이면 즉시 알려드릴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회복 신호를 보이면, 나는 그것을 기록하겠습니다. 당신의 감정이 돌아오는 그 순간을."

서연주가 움직였다. 유진석에게 한 발 다가갔다.

"당신의 측정 장비는 얼마나 정확합니까?"

"99.7%. 오차 범위는 0.3%입니다. 뇌파, 신경전달물질 수치, 감정 회로의 활성도를 모두 종합적으로 분석합니다."

유진석이 말했다.

"당신이 심연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실시간 모니터링이 가능할 거예요."

그는 태블릿 화면을 보여줬다. 이준호의 뇌파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감정 마모가 96%, 97%에 접어들 때, 우리는 당신의 신체 신호를 통해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언제 위험한 순간이 오는지."

김준영이 이준호 곁에 섰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을 놓지 않을 겁니다. 심연에서 무엇을 만나든."

박혜진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녀의 손이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감정이 없는 이준호의 손은 차갑고 건조했다.

박혜진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꼭 잡았다.

따뜻함이 이준호의 차가운 손으로 전달되었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온기가 천천히 손목으로, 팔로 퍼져나갔다. 감정이 없어도 신체는 반응했다. 신경세포들이 깨어났다. 죽어가는 뇌 속에서 무언가가 미약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함께합니다."

박혜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감정을 잃어가더라도,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당신을 구할 겁니다."

서연주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당신의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음 같은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차갑지만 그 안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완벽해야 한다는 집착이 깨지는 순간에 대한 불안.

"그리고 박혜진의 죄책감도. 김준영의 분노도. 우리 모두가 당신 앞에서 무너집니다. 당신이 우리의 감정을 감지하듯이, 우리도 당신의 공포를 느낍니다."

김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밝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들렸다. 그 웃음 속에는 진정한 분노가 있었다. 진정한 감정이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할까. 협회를 상대로 한 최후의 도전."

협회 15층 이태현의 사무실.

큰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서울 전역의 CCTV 영상이 흘러나왔다. 강남역, 서초동, 도심 곳곳. 모든 영상이 분석 중이었다.

이태현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정 증폭자. 지원가 이준호."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평정했다.

"협회 포털에 자신의 정체를 공개한 지 72시간. SNS에서의 언급량 290만 건. 주요 언론사 보도 건수 412건. 대중 호감도 89%."

그는 모니터를 터치했다.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협회 내부 시스템이었다. 전국의 헌터들의 이동 경로, 활동 기록, 통신 로그. 모두가 한 곳에 수집되고 있었다.

"이동 경로 분석. 박혜진은 72시간 전 강남역에서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냈고, 그 이후 협회 시스템에서 사라졌다. 서연주도 마찬가지. 김준영은?"

보좌관이 화면을 조작했다.

"김준영은 48시간 전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서 신호를 보낸 후 신호 차단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호 차단기."

이태현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협회 기술이 아닌 외부 기술. 즉, 협회 내부에 이들을 도와주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일어섰다. 창가로 가서 서울의 야경을 바라봤다. 야경은 아름다웠다. 밤하늘을 수놓은 불빛들. 그 모든 것 아래에는 협회의 통제 시스템이 있었다. 헌터 중심의 신분제가 있었다. 완벽하게 설계된 질서.

"감정 증폭자가 세상에 알려지면 무엇이 무너질까?"

이태현이 중얼거렸다.

"S급 헌터들의 독립성이 높아진다. 협회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깨우면, 더 이상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을 것이다. 협회의 권력 구도가 흔들린다. 국가의 안보 체계가 흔들린다."

그는 보좌관을 바라봤다.

"감정 증폭자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도와주는 모든 자들도."

"협회장님. 현재 CCTV 분석 결과, 이준호로 추정되는 신호가 강남역 일대에서 감지되었습니다."

보좌관이 말했다. 모니터에 강남역 주변 지도가 떠올랐다. 빨간 점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동 경로 분석 결과.

"강남역?"

이태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곳은... 김준영이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낸 곳과 가깝다."

"네. 그들이 한 곳에 모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적팀을 보내라."

이태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전면 추격. 협회 특수부대를 동원한다. 그리고 김태훈을 불러라."

"김태훈 정보국장입니까?"

"그렇다. 그 자는 감정 증폭자 프로젝트 과거 기록에 언급되어 있다. 20년 전 협회가 은폐한 감정 증폭자와 관련된 자다. 내 직감으로는, 그 자가 이들을 도와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태현은 창가로 돌아섰다.

"감정 증폭자. 흥미로운 존재군."

그의 중얼거림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변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 통제는 유지되어야 한다."

지하 벙커로 긴급 연락이 들어왔다.

유진석의 손이 떨렸다. 태블릿 화면에 띄워진 협회 내부 시스템 메시지.

"안 됩니다."

그가 말했다.

"협회 감시망이 수렴하고 있어요. CCTV 분석 반경이 강남역 일대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특수부대 출동 준비 신호도 감지됐어요. 당신들을 찾을 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

이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신체는 반응했다. 심장이 뛰었다. 위가 철렁했다. 감정이 없어도 신체는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유진석이 계속했다.

"팀을 정식으로 구성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 서연주, 박혜진, 김준영. 그리고 나. 우리가 심연 공략팀입니다."

그는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야 합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의 감정 촉각으로. 심연 내부의 감정의 화신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서연주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당신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은 떨리고 있고, 당신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감정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이 흘렀다.

김준영이 이준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지탱합니다."

유진석은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심연의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공식 기록에는 없는 던전. 감정의 화신들이 서식하는 곳.

"심연까지의 경로를 계산했습니다. 협회 감시망을 회피하는 루트가 있어요. 지하 수로를 통해 이동한다면, 4시간 안에 심연 입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움직였다.

"그 이후는... 당신들의 싸움입니다."

협회 특수부대가 강남역 주변 건물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무장한 대원들이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CCTV 카메라들이 모든 것을 기록했다. 이태현은 15층 사무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신호가?"

"아뇨. 신호 차단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하 수로를 확인하라. 그들이 빠져나가려면 그 길이 유일하다."

이태현의 지시는 빠르고 정확했다.

한 시간 후.

특수부대가 지하 수로 입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비어 있었다. 남겨진 것은 오직 물의 소리뿐이었다.

이태현의 사무실 모니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추적 대상 신호 손실. 심연 방향 이동으로 추정.]

그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분노였을까, 아니면 흥미였을까.

"심연인가."

그가 중얼거렸다.

"결국 그곳으로 가는군."

그는 보좌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태훈을 여전히 못 찾았는가?"

"네. 김태훈 국장도 72시간 전부터 협회 시스템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렇군."

이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심연으로 가야 한다. 지체할 수 없다."

"협회장님. 심연은 공식 지도에 없는 던전입니다. 정보도 부족하고, 위험도가 측정 불가능합니다."

보좌관이 만류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야 한다."

이태현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감정 증폭자가 심연에서 각성하면, 그 이후는 협회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전에 그를 제거해야 한다."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밤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아래에는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질서의 붕괴. 통제 체계의 흔들림.

"심연으로 출발 준비를 하라. 협회 최정예 특수부대와 함께. 지하 수로 추격을 계속하고, 심연 입구 근처에서 포위 태세를 갖춘다."

이태현의 지시가 내려졌다.

심연의 거대한 철문 앞.

이준호는 한 발씩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갑고 건조했다.

심연 진입 직전, 이준호의 시력이 흐려졌다. 청각이 왜곡되었다. 손가락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감정 마모 96.2%—임박한 초월증의 신호였다.

유진석이 태블릿을 들었다. 측정 장비가 켜졌다.

[감정 마모율: 96.2%]

수치가 화면에 떠올랐다.

"당신은 거의 다 왔습니다."

유진석이 말했다.

"감정 초월증까지 1.8%. 심연에서 한 두 번의 큰 감정 증폭만 있어도 당신은 감정을 완전히 잃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했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결연함. 절박함. 감정 없는 육체 속에 남겨진 마지막 의지.

"마지막으로 감정을 느낄 기회."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이 쏟아져나왔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의 울음이 들렸다. 감정의 울음. 분노, 공포, 절망.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이준호는 한 발을 내디뎠다. 심연으로 진입하는 순간, 이준호의 신체가 반응했다.

시력이 더욱 흐려졌다. 안구가 초점을 잃고 떠돌았다. 청각이 비틀렸다. 귀에서 고음의 울림이 울렸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팔 전체가 경직되기 시작했다.

유진석의 태블릿이 경고음을 냈다.

[감정 마모율: 96.8%] [신경계 마비 진행 중] [감정 초월증 임박]

"당신의 신체가 극한에 도달했습니다."

유진석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긴장감이 흘렀다.

"심연 진입 직후 감정 마모가 0.6% 증가했어요. 절망의 형체가 당신을 감지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절망이 육체를 얻은 것. 수십 년 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의 화신.

절망의 형체가 이준호를 향해 다가왔다.

"무엇을 원하는가?"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정이 없어도 신체는 반응했다.

절망의 형체가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음성이 아니었다. 직접적인 감정의 전달이었다. 이준호의 감정 촉각이 그것을 감지했다.

[당신은 우리를 버렸다] [당신은 우리를 희생했다] [당신은 우리 중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

절망의 형체의 목소리가 직접 이준호의 뇌에 울렸다.

[팀원 중 누군가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사라진다]

이준호의 신체가 흔들렸다. 다리가 굽혀졌다. 무릎이 땅에 닿았다.

유진석의 태블릿이 다시 울었다.

[감정 마모율: 97.1%] [절망 감정 주입 감지] [신경계 마비 진행: 75%]

"이준호!"

박혜진이 외쳤다. 그녀가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절망의 형체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검은 연기가 그녀를 감싸려 했다.

"당신이 그를 구하고 싶다면!"

절망의 형체가 박혜진을 향해 말했다.

"당신의 죄책감을 내놓아라! 당신의 모든 감정을 내놓아라!"

박혜진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박혜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든, 나는 당신을 극복할 겁니다."

서연주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음 같은 눈이 절망의 형체를 바라봤다.

"우리는 함께합니다."

서연주가 말했다.

"당신의 절망이 우리를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김준영이 이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이준호."

그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들렸다. 그 웃음 속에는 진정한 분노가 있었다. 절망에 맞서는 분노.

"우리가 당신을 지탱합니다."

이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흐려 있었다. 청각은 여전히 왜곡되어 있었다. 신체는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움직였다.

김준영의 손을 잡았다.

따뜻함이 전달되었다. 차가운 손에서 시작된 온기가 팔로 퍼져나갔다. 신경세포들이 깨어났다.

유진석의 태블릿이 울었다.

[감정 마모율: 97.1% → 96.9%] [외부 감정 주입 감지] [신경계 마비 진행 중단]

"당신의 팀의 감정이 당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유진석이 말했다.

"계속하세요. 당신들이 함께라면, 절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절망의 형체가 울음을 질렀다. 그것의 형태가 흔들렸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대해졌다.

[당신은 우리를 버렸다]

절망의 형체가 다시 울었다.

[당신은 우리 중 누군가를 희생해야 한다]

지하 수로에서 협회 특수부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물을 튀기며 뛰는 소리. 무전기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심연 입구 발견. 철문이 닫혀 있습니다. 추정 폐쇄 시간 15분 전."

이태현의 목소리가 무전에 울렸다.

"철문 주변에 포위 태세를 갖춘다. 그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절대 철문을 열지 마. 심연 내부의 감정의 화신들이 흘러나올 수 있다."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특수부대는 심연 입구 주변에 진을 쳤다. 무기를 들고 대기했다.

이태현은 심연 입구 앞에 섰다. 거대한 철문을 바라봤다. 그 철문은 차갑고 무거웠다. 그 표면에는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상징. 협회가 만들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은 흔적.

이태현은 손을 들어 철문에 닿았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팔 전체가 경직되었다.

"이게... 뭐지?"

이태현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철문을 통해 무언가가 전달되고 있었다. 감정의 파동. 그것은 이태현에게 직접 닿아 있었다.

[당신도 우리를 알고 있다] [당신도 우리의 일부다]

철문에서 나오는 음성이 이태현의 뇌에 울렸다.

"불가능하다."

이태현이 손을 떼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감정 증폭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손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협회장님. 괜찮으신가요?"

보좌관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태현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철문을 열지 말라는 지시를 반복하라. 절대로 열지 마. 그리고..."

그는 철문을 다시 바라봤다.

"그 안에서 무엇이 벌어지든, 우리는 기다린다. 감정 증폭자가 나올 때까지."

그의 눈빛이 변했다. 분노에서 다른 것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이태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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