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책감의 그림자
지하실 벽면의 콘크리트가 목을 조르듯 느껴졌다.
이준호는 어두운 공간에 웅크리고 있었다. 위층에서 협회 특수팀의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고, 손전등 불빛이 계단 틈으로 새어 내렸다. 휴대폰은 이미 버렸다. 신호 추적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모율 90%.
숫자로만 존재하던 그것이 이제는 살갗을 파고드는 현실이 되었다. 손가락 끝이 저려 왔다. 마치 깨어난 후 처음 움직이는 팔다리처럼 따끔거렸다. 자신의 손인지 남의 손인지 구분이 잘 안 됐다.
"이준호?"
목소리가 들렸다.
박혜진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S급 헌터의 움직임은 무음에 가까웠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이준호 앞에 앉았다.
"협회 팀이 강남역까지만 진격했어요. 일단 여기는 안전해."
이준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박혜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다르게 들렸다. 낮고, 무겁고,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내 감정을 건드렸어요. 저기 옥상에서."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박혜진의 얼굴을 직시했다. 어두움 속에서도 그녀의 눈에 물기가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피하고 있던 게 있어요. 7년 전 심연 임무. 나랑 함께했던 팀원들... 다섯 명이 들어갔고, 나만 나왔어요."
박혜진의 목소리가 끊겼다.
"내가... 살아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에요."
침묵이 흘렀다. 지하실의 콘크리트 벽이 그들을 짓눌렀다.
이준호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박혜진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 그것이 일어났다.
박혜진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마치 댐이 터지듯이.
이준호는 감정 촉각을 통해 그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나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7년 동안 억눌려 있던 공포.
어둠 속에서 팀원들의 비명소리. 자신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극도의 죄책감. 그 죄책감이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 것 같은 그런 공포.
이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 감정의 무게에 압도당했다. 자신의 감정 촉각이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 때, 자신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내장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목이 먹먹해졌다.
"당신... 당신이 필요해요."
박혜진이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이준호에게 전달되었다.
이준호는 박혜진의 감정과 마주했다.
마주하는 것이 능력이었다. 감정 증폭자의 진정한 능력은 감정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억눌려 있던 감정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이 피해온 그걸 봐요. 당신이 어둠 속에서 혼자였던 기억. 팀원들의 비명. 그리고..."
이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살아났다는 그 죄책감. 그걸 안고 7년을 살아온 거군요."
박혜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억눌려 있던 울음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손가락이 이준호의 손목을 꽉 잡았다. 지하실 벽에 울음이 부딪혀 메아리쳤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이준호가 박혜진을 안아줬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엉켜있었다. 박혜진의 울음이 이준호의 가슴에 닿았다.
시간이 흘렀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알 수 없었다. 박혜진의 울음이 계속되었다. 이준호는 그것을 받아줬다. 자신의 감정 촉각으로 그녀의 공포를 받아주고, 그녀의 죄책감을 받아주고,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그 과정에서 이준호의 마모율이 올라갔다.
92%.
93%.
94%.
이준호의 감각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박혜진의 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마치 물 아래로 가라앉는 것처럼. 자신의 팔이 정말 자신의 팔인지 의심스러워졌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팔이 자신의 가슴 위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손의 온기는 여전히 느껴졌다.
박혜진의 울음이 천천히 멎어갔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졌다가 다시 안정되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천천히 이준호를 밀어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녀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물의 빛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결연함이었다.
"심연이 있어요."
박혜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공식 던전 지도에 없는 곳. 협회도 최고 기밀로 분류한 곳. S급 헌터도 혼자선 절대 정복할 수 없는 곳."
이준호의 귀가 먹먹했다. 박혜진의 목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뭉개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의 의미는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심연의 보스들은... 감정의 화신들이에요. 분노, 공포, 욕망, 죄책감... 그런 감정들이 물리적 형태를 가진 존재들이에요."
박혜진이 이준호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7년 전 우리 팀이 들어간 곳도 심연이었어요. 그리고 내가 피하고 있던 이유는... 거기서 내 감정이 그대로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내 죄책감과 공포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이준호가 박혜진의 눈을 봤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남아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무언가도 있었다. 결심이었다.
"심연을 정복하려면..."
박혜진이 이준호의 눈을 봤다.
"최강의 팀이 필요해요. S급 헌터들이 한 명씩 자신의 감정의 화신과 마주해야 하는데, 혼자선 불가능해요. 서로의 감정을 지탱해줄 누군가가 필요해요."
"그게... 나?"
이준호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당신이에요."
박혜진이 말했다.
위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렸다. 협회 팀이 지하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박혜진이 이준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쪽이야."
그녀가 지하실의 벽을 누르자 철제 문이 스르륵 열렸다. 세이프하우스로 통하는 비밀 통로였다. 이준호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박혜진이 뒤따랐다.
문이 닫혔다.
어둠이 깊어졌다.
이준호는 박혜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손인지 다른 사람의 손인지 알 수 없게 되기 전에.
세이프하우스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며, 이준호는 자신에게 물었다.
남은 5%는 무엇인가?
마모율이 95%에 도달했을 때, 인간에게 남겨지는 마지막 5%는 무엇인가?
그것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괴물로 만드는 것인가?
이준호의 손에서 감각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박혜진의 손의 온기는 여전히 느껴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소문의 씨앗
협회 15층 이태현의 사무실. 모니터 화면이 파란 불빛으로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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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증폭자 이준호, 협회에 정체 공개'
이태현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집어 올렸다. 내려놨다. 다시 집어 올렸다. 반복. 그의 턱이 경직되었다.
"팀장님."
보좌관이 들어섰다. 서류 한 묶음을 들고 있었다.
"기자들이 협회 게이트 앞에 몰려있습니다. 공식 입장 요청이..."
"내가 지금 입장을 낼 상황이냐?"
이태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 남자를 찾아라. 지금 당장. 생사를 불문하고."
"예, 팀장님."
보좌관이 나갔다. 이태현은 모니터를 껐다. 화면이 검게 변했고, 그의 얼굴만 어둠 속에 남았다. 입술을 움직였다.
"20년간 숨겨온 게 하루아침에..."
그의 손이 탁자를 내려쳤다.
―――
강남역 지하 주차장.
협회 추적팀이 CCTV 영상을 검토하고 있었다. 한 요원이 손을 들었다.
"팀장님, 강남역 지하 주차장 CCTV에서 이상 신호가 감지됩니다."
"뭐?"
"영상이 20분간 끊겼어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신호를 차단한 것 같습니다."
이태현의 눈이 빛났다.
"그 구간의 차량 이동 기록은?"
"검색 중입니다. 하지만..."
요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추적이 어렵습니다. 신호 차단 시간이 너무 정교합니다. 협회 기술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 말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태현은 알아들었다.
협회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
서울 외곽의 한 세이프하우스.
이준호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을 바라봤다. 감각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이미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몸인 것처럼.
문이 열렸다.
박혜진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국물이 담긴 그릇이 있었다.
"좀 나으세요?"
그녀가 숟가락을 떴다.
이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먹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먹어야 해요. 당신의 감정이 회복되려면, 신체도 함께 회복되어야 해요."
박혜진의 목소리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어제의 울음이 사라지고, 무언가 결연한 것이 들어와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빛이 있었다.
"서연주가 말했어요. 당신의 마모율이 95%라고. 그럼 5%가 남았다는 거죠?"
"그래."
이준호의 목소리도 변했다. 감정이 빠져나간 자리에 뭔가 다른 것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차갑고 명료한 것.
"그 5%가 뭐라고 생각해요?"
박혜진이 물었다.
이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박혜진의 얼굴을 봤다. 그녀의 눈. 그녀의 입술. 그녀의 어깨.
모든 것이 데이터처럼 보였다.
"모르겠어. 아직."
"우리가 알아낼 거예요. 함께."
박혜진이 국물을 떴다. 이준호의 입에 가져다 놨다.
이준호는 먹었다.
맛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
지하철 폐역.
이준호 일행이 이동 중이었다. 박혜진이 지도를 펼쳤다.
"여기서 심연으로 가는 입구가 있어요. 공식 기록에는 없지만, 협회만 알고 있는 곳이에요."
서연주가 이준호를 봤다.
"당신이 정말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준호의 마모율은 95%.
그는 대답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해봐야지."
박혜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가 있어요."
이준호의 5%가 남은 감정이 움직였다.
아주 미묘하게.
마치 누군가 그 5%를 건드리려는 것처럼.
―――
협회 추적팀이 이동 중인 이준호 일행을 포착했다. 특수팀이 출동했다. 골목과 지하도를 통해 좁혀오는 협회 요원들. 이준호 일행은 계속 도주했다.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고, 건설 현장을 통과하고, 낡은 건물의 벽을 뚫고 나갔다. 박혜진이 빙벽을 만들어 추적팀을 지연시켰다. 서연주가 얼음 벽을 높이 쌓아올렸다. 유진석의 바위 갑옷이 총알을 튕겨냈다.
"이쪽이야!"
박혜진이 외쳤다.
지하철 폐역의 입구가 보였다. 이준호 일행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협회 요원들이 뒤따랐다. 총성이 울렸다. 콘크리트 벽이 부서졌다.
"내려가!"
박혜진이 손을 올렸다.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협회 요원들의 진격이 멈췄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내려오고 있었다.
이준호 일행은 폐역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어둠이 짙어졌다. 손전등 불빛만이 길을 비추었다.
"여기야. 심연의 입구."
박혜진이 가리켰다.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그 위에는 낡은 협회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위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협회 요원들이 계속 내려오고 있었다.
"열어야 해요."
서연주가 말했다.
"하지만 이 문을 열면, 당신은..."
"알아. 내 감정이 깨어날 거야."
이준호가 말했다.
그는 손을 올렸다. 마모된 손가락이 철문에 닿았다.
감정 촉각이 발동했다.
철문이 떨렸다.
―――
같은 시간, 협회 15층.
이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심연의 입구가 열렸다고?"
"네, 팀장님. 폐역의 깊은 곳에서 신호가 감지됩니다."
이태현의 손이 떨렸다.
"저 문을 닫아. 지금 당장."
"팀장님?"
"저 문이 열리면 안 된다고!"
이태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0년 전 그 사건을 또 겪을 수는 없어. 저 남자가 감정 초월증에 각성되면..."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
심연의 입구.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
극도의 어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벽에서 튀어나오는 형상들. 이준호의 마모된 감각이 감지하는 이상한 온기. 공기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이준호의 시야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어둠 속의 형상들이 색을 띠기 시작했다. 붉은색. 검은색. 회색. 흰색.
그것들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었다.
분노가 붉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준호의 피부를 지지듯 다가왔다.
공포가 검은 연기처럼 몸을 감쌌다. 가슴이 압박되고 호흡이 얕아졌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욕망이 회색의 그림자로 흔들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입이 벌어졌다.
죄책감이 흰빛으로 번쩍였다. 그것은 마치 거울처럼 이준호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이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마모된 감각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려 하자,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내부에서.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박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은 더 이상 감정적 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현실이었다.
이준호는 한 발을 내디뎠다.
박혜진이 손을 놓지 않았다.
서연주, 김준영, 유진석이 뒤따랐다.
그 순간, 철문 위에서 손이 나타났다.
협회 요원이 철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손을 잡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협회 배지를 차고 있는 남자.
그는 협회 요원을 밀어냈다.
"가세요."
그가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이준호 일행이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협회 배지를 벗고 내려놨다.
"나는 이제 당신들의 편이 아니에요."
협회 요원들이 남자를 포위했다.
"체포해."
철문이 닫혔다.
완전히.
―――
심연의 어둠 속에서, 이준호의 마지막 감정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괴물로 만드는 것인지.
그 답은 오직 심연 안에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