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의 정체
협회 테스트 센터의 복도는 고요했다. 이준호는 벽에 붙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공식 포털에 자신의 정체를 올렸다. 감정 증폭자. 그 단어가 SNS를 타고 흘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핸드폰이 울렸다.
"이준호. 이태현이야. 너는 방금 뭘 한 거야?"
협회 엘리트 전략팀 팀장 이태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이준호는 말을 삼켰다.
"너 때문에 20년간 숨겨온 게 다 터진다. 감정 증폭자. 그 단어 하나로 S급 헌터들이 독립심을 가지고, 협회의 통제는 무너진다. 너는 뭘 생각한 거야?"
"제가..."
"너로 인해 연결된 모든 사람들이 죽을 거야. 서연주, 김준영, 박혜진, 유진석. 협회가 조용히 처리할 거고, 너는 감정 없이 살면서 그 모든 죽음을 기억할 거다. 그게 대가야."
선을 끊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서연주는 10분 안에 여기 도착하기로 했다. 하지만 협회가 추적 중이라면...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협회가 먼저 올 수도 있다.
신발 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몸을 날렸다. 복도 반대편 계단으로. 하지만 계단 위에서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협회원들. 이준호는 다시 돌아섰다.
"지원가 이준호. 협회를 배반한 혐의로 연행한다."
그 순간 창문이 부서졌다.
박혜진이 몸을 날려 이준호 앞에 착지했다. 얼음 결정체가 협회원들의 발을 얼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빠르고 정교했다. 방어가 아닌 공격. 이전과는 다른 박혜진이었다.
"이쪽이야."
복도 끝의 비상구로 함께 뛰어갔다. 이준호는 박혜진에게 물었다.
"왜...?"
"서연주가 협회에 추적당했어. 그래서 나를 보냈다. 우리는 예전부터 협력 약속이 있었어.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
옥상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서울의 야경이 저 아래 펼쳐져 있었다. 박혜진이 핸드폰을 꺼냈다.
"김준영. 지금 어디?"
통화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같은 날 오후에 강남역 카페에서 만난 S급 헌터 김준영이었다.
---
그것은 몇 시간 전이었다.
이준호는 강남역 카페에 앉아 있었다.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다. 김준영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어제였다. 서연주의 변화를 본 그가 직접 이준호를 찾아낸 것이다. 그는 협회 내부망을 통해 지원가의 이동 기록을 추적했다.
"너다. 이준호."
김준영이 앉았다. 그의 얼굴은 밝았다. 항상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느꼈다. 그 웃음 뒤에 있는 것들을.
분노. 깊은 분노.
"서연주의 실력이 갑자기 늘었어. 협회 기록으로도 이상할 정도로. 그리고 그 시점이 정확히 지원가 너가 그녀를 담당하던 때와 일치한다."
김준영의 눈이 이준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웃음은 그대로였지만,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넌 뭘 했어? 서연주한테 뭘 해준 거야?"
이준호의 심장이 요동쳤다. 감정 촉각이 작동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 분노 아래에는 자존감 상실이 있었다.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 있었다.
"난 S급 헌터야. 서연주만큼 강해. 아니, 더 강할 수도 있어. 근데 왜 최강 팀에는 나를 안 뽑는 거야? 왜 서연주는 되고 난 안 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나도 도와줄 수 있어? 내가 더 강해지게?"
이준호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김준영의 얼굴이 변했다. 웃음이 사라졌다. 진짜 감정이 드러났다. 절망, 희망, 분노, 갈망.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럼 해줘. 지금."
이준호는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김준영의 팔에 닿았다.
감정 증폭이 시작됐다.
그것은 불처럼 일어났다. 김준영의 분노가 물리적 형태로 변환되었다. 카페의 공기가 흔들렸다. 조명이 떨어지고, 천장이 갈라졌다. 손님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분노의 층을 벗겨내면서 그 아래의 진짜 감정을 건드렸다.
인정받고 싶은 갈망.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는 공포. 혼자라는 절망감.
그 모든 것이 김준영의 몸에서 폭발했다.
마나가 폭발했다. 폭발 계열의 능력이 제어 없이 터져 나왔다. 테이블들이 날아갔다. 벽에 금이 갔다. 하지만 그 폭발의 중심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준영이 울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강한 S급 헌터의 눈에서.
"인정받고 싶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난 충분히 강한데... 왜 아무도 날 봐주지 않았어요? 왜..."
이준호가 손을 놨다. 김준영이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순간이 있었다. 순수한 순간. 강한 헌터가 자신의 약점을 마주하는 순간.
그 순간 이준호는 뿌듯했다.
자신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 무시당해온 지원가로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이 밀려왔다.
그러나 동시에.
뭔가 빠져나갔다.
이준호의 가슴에서. 감정이.
마모율 71%에서 시작했던 감정 상태. 서연주의 감정을 증폭시킨 후 74%였다. 이제는 다르다. 이준호는 자신의 상태를 감지했다.
마모율 52%.
손가락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가슴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 뿌듯함이 얼어붙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에서 뭔가를 빨아내고 있는 것처럼.
"고마워요."
김준영이 얼굴을 들었다. 눈물이 말렸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다른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변한 불. 자신을 마주한 뒤의 불.
"당신이 없었으면 난 평생 이 분노 안에 갇혀 있었을 거야. 당신이 건드려 줄 때까지 난 몰랐어. 내가 이렇게까지 원하고 있었다는 걸."
이준호는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입 모양만 웃음이었다. 감정이 없었다.
"다행이에요."
거짓이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거짓을 잘했다. 평생 해온 거였다.
"근데 너 괜찮아? 얼굴이..."
"괜찮습니다."
또 거짓이었다.
카페 밖의 골목으로 나갔다. 협회원들의 사이렌이 들렸다. 누군가 신고했을 것이다. 이준호는 뛰기 시작했다.
"잠깐!"
김준영이 따라왔다.
"너 지금 어디 가?"
"모릅니다."
"서연주 있는 곳으로 가는 거지?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위험합니다."
"이미 위험해. 협회가 우릴 다 찾고 있어. 그래서 더더욱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이준호는 멈추지 않았다. 뒷골목을 빠져나갔다. 버려진 창고 뒤로. 핸드폰에 연락이 왔다. 박혜진이었다.
"서연주가 협회에 추적당했어. 그래서 나를 보냈다."
그리고 이제 옥상에 있었다.
---
옥상에서 차가 나타났다. 검은 승용차. 박혜진이 문을 열었다.
"탈 거?"
이준호는 타주저했다. 하지만 뒤에서 협회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준호가 차에 탔다.
박혜진이 가속했다. 차가 옥상을 빠져나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경사로를 타고.
뒷좌석에 사람이 있었다.
"드디어 만나네. 직접으로는 처음이야."
유진석이었다. 협회 산하 연구소의 비밀 연구원. 그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감정 증폭자. 실제로 보니까 흥미롭네. 신체의 일부가 반투명해지고 있어. 마모 진행 상태가 시각적으로 드러나는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당신한테는 아니겠지만, 과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해. 감정 증폭 능력의 메커니즘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뜻이거든. 이전 증폭자들은..."
"유진석."
박혜진이 차를 급회전시켰다.
"지금은 정보 전달할 시간이 없어. 협회가 우릴 쫓고 있어."
뒤에서 사이렌이 들렸다. 검은 차들이 추격하고 있었다.
박혜진의 운전이 정교했다. 서울의 골목을 누비며 추격자들을 따돌렸다. 하지만 협회의 차들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이준호의 위치는 협회 시스템에 표시되어 있었다. 추적 프로토콜이 발동했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 넓은 도로로 나섰다. 신호등이 빨강으로 바뀌었다. 박혜진은 감속하지 않고 교차로로 진입했다. 옆 차선의 차가 급제동했다. 경적이 울렸다. 하지만 그들의 차는 계속 나아갔다.
"여기!"
김준영이 나타났다. 골목의 한쪽에서. 그의 손에서 마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박혜진이 차를 멈췄다. 이준호가 내렸다.
"어디로?"
"지하 주차장. 협회 신호를 방해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
김준영이 이끌었다. 건물 안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깊고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 끝이 더 투명해져 있었다. 마치 증발하는 물처럼. 감정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마모율 74%.
카페에서의 폭발 이후 증가했다. 김준영의 감정 증폭으로 인한 소비. 그리고 도주 중 느낀 긴장과 두려움이 자신의 마모를 더 가속했다. 이준호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했다. 하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을 때, 문이 닫혔다.
"이곳이 안전한가요?"
"당분간은. 서연주가 신호를 끊었어. 협회는 우리 위치를 못 찾을 거야."
어둠 속에서 네 명이 서 있었다.
김준영이 이준호를 봤다.
"다른 S급 헌터들도 알고 있어. 당신의 존재를. 협회가 너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곧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거야.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그래서... 넌 혼자가 아니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준호의 몸이 더 희미해졌다.
마모율이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감정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감각이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감각.
그것이 마지막 남은 감정이었다.
어둠 속에서 이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지하실의 콘크리트 벽에 희미한 빛이 비쳤다. 자신의 손이 반투명해지는 것이 보였다. 피부 아래로 무언가가 새어나가는 듯했다.
"마모율이 얼마나 됐어?"
유진석이 손에 들고 있던 기계에 숫자들을 입력했다. 작은 태블릿 같은 장치였다. 협회에서 몰래 빼온 감정 측정 장비였다.
"82%."
"2시간 만에 10% 상승했군. 두 명의 감정을 증폭시켰으니까 자연스러운 결과네. 그리고 도주 중의 스트레스도 영향을 미쳤을 거야."
유진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실험실의 쥐를 보는 눈빛으로.
이준호는 벽에 기댔다. 숨을 깊게 들었다 뱉었다. 평온을 유지해야 했다. 감정이 남아 있을 동안은.
"나머지 S급 헌터들은?"
박혜진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스며 있었다. 이마에 얇은 땀이 맺혀 있었다.
"서연주가 협회의 추적을 의도적으로 끌고 있어. 우리를 떼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김준영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너한테 필요한 게 뭔지 알아?"
"모릅니다."
"정직함. 지금 넌 거짓을 그만 말해야 돼."
이준호의 목이 움직였다. 타액을 삼키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렸다.
"거짓을 그만둔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습니다."
"달라져. 서연주가 바뀌었잖아. 난 바뀌었고. 우리가 바뀐 건 너 때문이야. 그래서 다른 애들도 너를 찾고 있어. 너한테 필요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족쇄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족쇄."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서연주의 완벽함에 대한 집착. 김준영의 분노. 박혜진의 피할 수 없는 공포. 그리고 유진석의 강박적인 이해의 욕망. 모두가 무언가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이준호 자신도.
"넌 왜 자기 감정을 숨기지?"
김준영이 다시 물었다. 이번엔 화나지 않은 톤이었다. 순수한 호기심처럼 들렸다.
"모릅니다."
"거짓이지. 그게 너의 족쇄야."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손목 아래로 피부가 더 희미해지고 있었다. 혈관이 보였다. 그 혈관 속에 흐르는 건 피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 감정의 본질. 그것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하실 문 쪽에 누군가 왔다."
박혜진이 갑자기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손가락이 창문 쪽으로 움직였다. 얼음 마나가 그녀의 손끝에서 소용돌이쳤다.
"협회 특수팀이 아니야."
유진석이 태블릿을 들었다. 건물의 보안 카메라 피드를 연결한 모양이었다.
"검은 차. 세 대. 그 안에 탄 사람들은..."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섰다. 협회 특수팀이 아니었다. 그들 뒤에 선 인물이 눈에 띄었다. 흰 머리를 가진 중년 여성.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감정 증폭자."
그녀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나는 박미영. S급 헌터.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어."
이준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또 다른 S급 헌터였다. 또 다른 족쇄. 또 다른 감정.
"시간이 없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기계음에 가까웠다.
"알아. 협회가 너를 추적 중이고, 넌 감정을 잃어가고 있고, 우린 모두 목표가 있어. 하지만..."
박미영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너 없이는 심연을 갈 수 없어. 서연주도 알고 있을 거야. 심연은 감정의 던전이거든. 감정의 화신들이 지키는 곳이야. 넌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심연?"
김준영이 놀라 물었다.
"서연주가 안 말했어? 아, 시간이 없었겠지."
박미영이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희망의 웃음처럼 들렸다. 아니면 절망의 웃음이었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모두 가야 할 곳. 우리가 모두 죽을 수도 있는 곳. 그런데 넌 거기서 우릴 살릴 수 있어."
이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지하실의 벽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었다. 자신의 감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모율 85%."
유진석이 중얼거렸다.
"도주 중의 스트레스와 긴장이 추가로 작용했어. 이대로면 한 시간 안에 90%에 도달할 거야. 그럼 감정 둔화 심화 단계에 진입해. 그 이후론..."
박미영이 완성했다.
"대인관계 단절이 심해져. 우릴 도울 수 없게 돼."
이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박미영의 눈을 직시했다. 그녀의 눈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간절함. 그것은 감정이었다. 강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이준호를 끌어당겼다.
"제 능력을 쓸 때마다..."
이준호가 말했다.
"더 많은 감정이 빠져나갑니다."
"알아. 그래서 우린..."
박미영이 손을 내밀었다.
"너에게 우리의 감정을 줄 수 있는 팀을 만들려고 해.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이준호는 손을 보았다. 반투명해진 자신의 손. 그것을 박미영의 손과 맞추지 않았다. 대신 그 손을 내렸다.
"다른 S급 헌터들은?"
"오고 있어. 서연주가 연락했어. 협회의 추적을 피해서. 곧 모일 거야. 여기서."
"여기?"
김준영이 지하실을 둘러봤다.
"안전한가요?"
"당분간은. 협회의 신호 차단 장비가 설치돼 있거든. 너희 모두가 협회의 시스템에서 지워져 있을 거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박미영이 태블릿을 들었다. 그 화면에는 여러 얼굴이 떴다. 사진들. S급 헌터들의 사진. 그들 모두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게 뭐야?"
박혜진이 물었다.
"심연 공략팀. 공식 명단은 아니고, 비공식 협력 네트워크야. 우리는 협회에 알리지 않고 심연으로 향할 거야. 그리고 넌..."
박미영이 다시 이준호를 바라봤다.
"우릴 인도할 거야. 넌 감정의 언어를 알거든. 심연의 언어를."
"제가 그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해할 필요 없어. 넌 그냥 따라오면 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그것이 넌 이미 알고 있거든."
박미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필요. 그 단어가.
자신을 움직이는 모든 것이 그것이었다. 필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감정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족쇄였다.
지하실의 벽에서 빛이 일어났다. 이번엔 협회의 추적 빛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이었다. 감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 하지만 그것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마모율 90%."
유진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정 둔화 극심 단계. 이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박미영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이준호가 그것을 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이준호는 손을 들었다.
반투명한 손.
박미영의 손과 만날 순간—
"기다려!"
서연주의 목소리가 지하실 전체에 울렸다.
그녀가 나타났다. 얼굴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옷은 찢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맑았다.
"너희 몇 명이야? 심연을 가려면?"
"지금 현재로는 여섯 명."
박미영이 대답했다.
"부족해. 심연의 각 층마다 감정의 화신이 있어. 그리고 그들은..."
서연주가 이준호를 봤다.
"넌 아직도 자기가 뭔지 모르는 거 같아."
"뭐라는 겁니까?"
"감정 증폭자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감정을 깨우는 게 아니야. 넌 그들의 감정을 흡수해. 그리고 그것을 너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어.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럼 언제 깨달을까요?"
이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
"마모율이 100%에 도달할 때. 그때 넌 모든 감정을 잃고..."
서연주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동시에 모든 감정을 얻게 될 거야. 감정 통각상실증이 아니라, 감정 초월증. 그게 감정 증폭자의 진정한 능력이야."
지하실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준호의 손이 계속 떨렸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