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낡은 건물의 어둠 속에서 이준호의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빛이 완전히 꺼졌다.

한 박자.

심장이 건너뛴다.

그 다음이 없다. 다시 뛸 줄 알았던 심장이 침묵한다. 2초. 3초. 그 사이 가슴팍이 구멍 난 풍선처럼 쭈그러든다.

"숨을 쉬어."

서연주의 목소리가 멀다. 수중에서 들리는 말처럼 왜곡된다.

이준호는 숨을 들이마신다. 공기가 폐로 들어온다. 산소가 혈관을 타고 흐른다. 그렇게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박동은 전과 다르다. 기계음처럼 규칙적이다.

감정이 없다.

두려움도 없다. 안도감도 없다.

'뭔가 빠졌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어본다. 손가락이 여전히 희미하게 보인다. 물론 만져지지는 않는다. 투명한 손이 투명한 공기를 헤친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투명함이 이제 손목까지 번져 있다.

"이게... 뭐죠?"

"감정 증폭자의 대가야."

서연주가 이준호를 낡은 건물 깊숙이로 끌고 간다. 그녀의 동료들—이준호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S급 헌터들—은 후방을 경계한다. 계단을 내려간다. 한 층, 두 층. 지하 구조다.

"협회 비공식 구역이야. 공식 던전 지도에 없는 곳들에 대한 자료가 있다. 그리고..."

서연주가 멈춘다. 지하 깊은 곳. 벽면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붙어 있다. 사진 속 인물들. 모두 헌터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죽어 있다.

"감정 증폭자들이야. 역사상 확인된 3명. 모두 협회에 의해..."

"죽었나요?"

"소거됐어. 공식 기록에서.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준호의 손이 떨린다. 투명한 손이 떨린다. 만져지지 않는 떨림이다.

"당신은 넷째가 될 수도 있어. 아니면..."

서연주가 돌아선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 결연한 것이 있다.

"우리가 막아."

"우리?"

"저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혼자였어.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누구도 함께하지 않았다. 그래서 협회는 그들을 제거했어. 하지만 당신은 다르다."

서연주가 한 발 더 가까워진다. 그 순간, 이준호의 감정 촉각이 울린다.

그녀 안에서 뭔가가 부서지고 있다.

완벽함 뒤에 숨겨진 공포. 작은 균열. 그 균열을 통해 보이는 것은—

어린 서연주다.

던전 입구. 부모의 손. 그 손이 놓인다. 검은 빛. 괴물의 울음. 비명. 그 다음은 침묵.

완벽해야 한다.

완벽하지 않으면 또 누군가를 잃는다.

완벽하지 않으면 나도 죽는다.

이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왜 계속 그 완벽함 뒤에 숨어 있어요?"

서연주가 움직인다.

"당신은 정말 강한 건가요? 아니면 그냥... 약한 걸 감추고 있는 건가요?"

침묵.

지하의 벽은 응답하지 않는다. 서연주의 동료들도 숨을 죽인다. 이준호가 말을 잇는다.

"완벽함 뒤에 숨은 사람이 정말 강할까요? 진짜 강한 사람은 불완전함을 마주할 수 있는 사람 아닐까요?"

서연주의 눈에 물이 맺힌다.

그리고 그 순간—

청백색 빛이 폭발한다.

그녀의 몸에서. 그녀의 마나에서. 얼음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 감정이 물리적 에너지로 변환되는 순간. 눈물과 함께 터져나오는 광휘.

지하 벽면의 사진들이 하얀 서리로 덮인다.

이준호의 가슴팍이 다시 한 번 비워진다.

이번엔 더 크게. 더 깊게.

손가락의 투명함이 팔뚝까지 번진다. 목까지 번진다. 감정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준호!"

누군가가 소리친다. 서연주인가? 아니다. 이미 그의 귀는 반응하지 않는다. 음성이 점점 멀어진다. 마치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이미 그의 심장은 느끼지 않는다.

다만 관성으로 움직일 뿐이다.

"의료팀을 부르자."

"협회가 감지할 거야."

"상관없어. 이 상태론 죽는다."

누군가가 이준호를 들어올린다. 투명한 팔이 그의 몸을 감싼다. 서연주의 팔이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이 없으니까. 촉각마저 희미해지고 있으니까.

협회 중앙 사령부.

엘리트 전략팀 회의실.

이태현이 태블릿을 내려놓는다. 화면에는 서연주의 마나 수치가 표시되어 있다.

상승. 계속 상승. 한계를 넘어서는 상승.

"S급 최고 수준에서 또 상승했어요."

보좌관이 보고한다.

"3개월 전부터 시작된 이 변화. 원인을 찾았나?"

"아직 특정하진 못했습니다만, 특정 인물과의 접촉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는 중입니다."

이태현의 눈이 차갑게 빛난다.

"감정 증폭자의 신호를 감지했다는 보고가 있었지. 몇 달 전."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추적 중에 협회 감시망을 벗어났습니다."

이태현이 일어선다. 창밖으로는 밤의 서울이 보인다. 도시의 빛들. 그 아래 협회는 움직인다.

"감정 증폭자가 세상에 알려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중얼거림이 아니다. 이태현의 음성은 차갑고 명확하다.

"S급 헌터들이 협회 통제에서 벗어난다. 그들의 진정한 힘을 깨닫기 시작한다. 우리의 신분제는 무너진다. 일반 헌터들이 반발한다. 지원가들이 눈을 뜬다."

그는 보좌관을 바라본다.

"감정 증폭자 추적 명령을 내려. 최우선 제거 대상으로 지정해."

"확인했습니다."

보좌관이 손을 움직인다. 태블릿의 버튼이 눌린다.

그 신호는 협회의 모든 추적 시스템에 전달된다.

감정 증폭자. 대상: 미상. 위협도: 최상. 제거 우선순위: 1순위.

낡은 건물의 지하실.

이준호의 눈이 떠진다.

천장이 보인다. 낡은 콘크리트. 그 위에 물이 맺혀 있다.

"의식 회복."

누군가가 말한다.

"감정 마모 수치는?"

"70% 이상. 더 이상 능력을 사용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준호는 고개를 돌린다. 천장에서 눈을 거두고 옆을 본다.

서연주가 있다. 그 옆에 다른 S급 헌터들이 있다. 이준호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이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뭔가가 있다.

걱정. 그것을 이준호는 느낄 수 없지만, 인식할 수는 있다.

"당신은 왜 계속 남을 돕고만 싶어요?"

서연주가 다시 묻는다.

"당신 자신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말고, 다른 것은 없어요?"

이준호의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대답이 없다.

감정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 질문은 남는다.

그 질문은 남았다.

그의 투명한 가슴팍에.

"의료 처치는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감정 마모는 일반적인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거든."

서연주가 지하실 벽에 기대어 섰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이준호가 그녀의 감정을 건드린 후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두려움이 있었다.

"회복 방법은?"

"타인의 진정한 감정 공유."

키 큰 남자가 말했다. 하얀 코트를 입은 그는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이준호의 신체 데이터가 떠 있었다. 마나 수치. 감정 파장도. 그리고 '감정 소진율 71.3%'라는 숫자.

"감정 증폭자는 타인의 감정을 흡수해서 사용해.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이 소진돼. 논리적으로는 그 과정을 역으로 돌려야 해. 즉, 타인이 자신의 감정을 나눠줘야 한다는 거지."

그가 태블릿을 내렸다.

"하지만 협회 기록에 따르면 지금까지 회복한 감정 증폭자는 없어. 역사상."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하실의 조명이 희미하게 떨렸다. 누군가 위층을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 낡은 건물은 여전히 누군가의 것이었다. 그들이 점유한 공간이 아니라.

"당신은 왜 당신 자신을 지키지 않아요?"

키 큰 남자—유진석이라고 나중에 알게 될 이름—가 갑자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이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감정 마모의 진짜 원인을 아세요? 단순히 능력을 써서가 아니라, 당신이 타인의 감정을 흡수할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버리기 때문이에요. 타인을 돕기 위해. 타인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유진석이 무릎을 꿇고 이준호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그게 강함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필요한 거라고?"

이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감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떨림 자체가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유진석이 자신의 손을 이준호의 손에 얹었다.

"나는 당신을 본다. 당신의 불완전함을 본다. 그리고 그것이 약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옆에 서 있던 다른 헌터들도 움직였다. 한 명이 이준호의 다른 손을 잡았다. 또 다른 한 명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손길이 말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이준호는 그들의 감정을 감지했다. 자신의 감정 촉각이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들 안에 있는 것—결연함,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밀어내려는 의지.

그 감정들이 이준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아주 천천히.

아주 작게.

하지만 확실하게.

위층에서 폭발음이 났다.

청백색의 빛이 지하실 천장을 비추고 지나갔다.

서연주가 싸우고 있었다.

유진석이 태블릿을 들었다.

"협회 신호가 변했어. 추적 명령에서... 제거 명령으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을 제거하라는 거야. 감정 증폭자를. 우리가 당신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어."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천장의 물을 받았다. 한 방울. 두 방울.

그것은 빗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눈물이었다.

서연주의?

아니다.

자신의 눈물이었다.

이준호는 뺨을 만져봤다. 투명한 손가락이 젖어 있었다.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남아 있었다.

아주 작은 뭔가가.

그것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네요."

유진석이 말했다.

"감정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는데. 뭔가가 남아 있다는 거야. 아주 깊은 곳에서."

이준호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을 바라봤다. 투명한 손가락 위에 떨어지는 그것. 그 눈물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고 싶다는 감정.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감정.

살고 싶다는 감정.

팀원들의 손길이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그것을 일깨웠다.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깨달음이 그 작은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그 순간, 위층에서 또 다른 폭발음이 났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소리였다.

무너지는 소리였다.

서연주가 밀려나고 있었다.

협회 특수팀의 화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유진석이 벌떡 일어났다.

"나가야 해. 지금."

"이준호는?"

위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협회 특수팀의.

"감정 증폭자를 포착했습니다. 지하실에 있습니다."

유진석이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일어나."

이준호는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투명해진 신체가 바닥에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촉각이 사라지면서 중력마저 다르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움직일 수 없어. 내 몸이..."

"그럼 여기서 끝인가?"

유진석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쉽게 끝이란 말인가? 감정 증폭자의 진정한 의미는... 정말 이 정도인가?"

그 순간, 지하실의 문이 폭발했다.

협회 특수팀이 진입했다.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의 앞에는 이태현이 있었다.

엘리트 전략팀의 팀장.

그의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차갑고, 명확하고, 끝내 주려는 의도가 가득 찬 눈.

"감정 증폭자.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이름으로 당신을 제거한다."

이태현이 손을 들었다.

협회 특수팀이 마나를 모았다. 검은색의 마나가 공간을 압박했다. 지하실의 공기가 진동했다. 벽면의 사진들이 흔들렸다.

그 순간—

지하실 위의 천장이 무너졌다.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청백색의 빛을 뒤집어쓴 채.

서연주였다.

"감정 증폭자는... 내가 지킨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완벽함이 없었다.

불완전함만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더 강했다.

서연주의 몸에서 청백색 에너지가 폭발했다. 그것은 얼음이 아니었다. 감정이 물리적 형태로 변환된 것이었다. 눈물 섞인 외침이 마나로 변한 것이었다.

협회 특수팀의 화력이 그것을 밀어냈다.

검은색 마나가 청백색을 짓눌렀다.

서연주가 날아갔다.

지하실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이태현의 시선이 다시 이준호에게로 돌아왔다.

"끝이다."

이태현이 말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나가 모였다.

죽음이 내려왔다.

그 순간, 이준호의 가슴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다.

투명한 빛이 아니라.

흰색의 빛이.

자신을 지키고 싶다는 마지막 감정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팀원들의 손길이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지하실 전체를 가득 채웠다.

"안 돼."

이준호의 목소리였다.

마지막 감정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였다.

"나는... 끝이 아니야."

투명한 손가락에서 흰색 빛이 피어올랐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