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 촉각
협회 소속 지원가 이준호는 평생을 무시당해왔다.
헌터들이 던전에서 돌아올 때 응급 치료를 담당하는 것, 장비를 정리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 그들이 던지는 한마디 지시에 즉각 움직이는 것.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준호도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오늘따라 협회 본부는 유독 분주했다.
"S급 헌터 서연주의 즉시 지원팀 구성. 1급 던전 공략 준비," 과장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지원가는 이준호로.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준호는 준비실에서 응급 키트를 챙기며 그 말을 씹고 또 씹었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거의 드물었기에, 뭔가 다른 지원가를 지명할 때의 절차 차이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움직였다.
서연주를 처음 본 건 집결 지점의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하얀 전투복을 입은 여인이 창을 통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한 자세. 완벽한 복장. 완벽한 표정. 마치 조각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이준호가 그녀에게 가까워지는 순간, 뭔가 이상했다.
공기가 팽팽했다.
그것이 유일한 표현이었다. 마치 풍선을 계속 부풀려가는 중인 것처럼, 그녀 주변의 공기가 어떤 거대한 압박감으로 팽창해 있었다. 이준호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고르려 했다.
"지원가 이준호입니다. 이번 임무 지원을 맡겠습니다."
"네."
서연주의 대답은 짧았다. 그녀는 여전히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준호는 그 뒷모습이 흔들리지 않는 기둥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그 기둥 안에 갇혀 있는 무언가를 감지했다.
무언가.
이준호는 그 감각을 밀어냈다. 자신의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던전 입구는 검은 빛으로 일렁였다. 1급 던전 특유의 오염된 마나가 공기를 삼켰다. 이준호는 서연주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걸음은 정확했다. 호흡은 규칙적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계산한 보행 경로였다.
던전 내부는 기괴했다. 얼어붙은 동굴처럼 보였지만, 바닥은 피처럼 붉었다. 모순된 풍경. 서연주는 그 속을 헤쳐나갔다.
"괴물 접근. 좌측 상단 30미터."
그녀의 음성은 차가웠다. 마치 기계처럼. 이준호는 그 언어의 뒤에 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 여인이 매순간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 마치 자신의 호흡마저 정해진 리듬에 맞춰야 한다는 강박.
괴물이 나타났을 때, 서연주의 손가락이 일제히 펼쳐졌다.
청백색의 얼음 창이 공중에서 형성되었다. 정교했다. 수십 개의 창이 모두 동일한 크기와 각도를 유지했다. 서연주는 그것들을 한 점의 오차 없이 괴물에게 날렸다. 괴물은 비명도 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서연주의 발이 빙판 위에서 미끄러졌다.
아주 작은 미끄러짐이었다. 1밀리미터 정도. 하지만 그 여인의 몸이 0.3도 정도 기울어졌다. 완벽함이 깨지는 순간. 이준호는 그 찰나에 뭔가 거대한 것을 감지했다.
공포.
극도의 공포.
마치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자신의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그런 공포가 그 여인의 내부에서 폭발하는 것을 이준호는 느꼈다. 그것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녀의 것이 맞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준호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감정이 전염되고 있었다.
마치 그 감정이 공기 중에 있는 미세한 진동처럼, 이준호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불완전함에 대한 혐오. 실수에 대한 자책. 약함에 대한 분노.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준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이준호는 무언가를 했다.
의식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마치 본능처럼, 그의 손가락이 서연주의 방향으로 뻗어졌다. 정확히는 그 여인 주변의 공간을 향해. 그 팽팽한 공기를 건드리듯.
그 손가락 끝에서.
청백색의 빛이 터져나왔다.
이준호 자신도 놀랐다. 그 빛은 자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통해 흘러나온 것은 확실했다. 마치 자신이 어떤 채널이 되어, 그 너머의 에너지가 현현하는 순간처럼.
서연주의 몸이 반응했다.
그녀의 얼음 속성 마나가 폭발했다. 통상적인 폭발이 아니었다. 마치 화산이 터지는 듯한, 무제한적인 방출. 청백색의 얼음이 던전 전체를 휩쓸었다. 괴물들이 나타나자마자 소멸했다. 던전의 벽면이 결빙되었다. 공기 자체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순간, 서연주는 완벽한 자세로 선 채 호흡을 정리했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일처럼.
이준호의 손은 차가워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부터 손등으로, 팔목으로 퍼져나가는 차가움. 신체의 감각이 아니었다. 감정의 층위에서의 차가움이었다. 마치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당신... 뭔가 다르네요."
서연주가 이준호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이 이전과 달랐다. 호기심이 있었다. 아니, 경계가 있었다. 마치 이준호가 어떤 미지의 대상이 된 것처럼. 그 시선이 이준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네?"
"당신이 뭔가 했어요. 지금 방금."
이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뭘 했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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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 본부로 돌아온 것은 2시간 후였다.
임무 보고서는 표준 절차대로 진행되었다. 서연주는 자신의 능력이 예상을 초과했다고만 기록했다. 과장은 그것을 '개인의 컨디션 향상'으로 분류했다. 이준호는 아무도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분 뒤, 협회 중간 간부 김태훈이 이준호를 회의실로 불렀다.
"지원가 이준호. 들어와."
회의실은 어두웠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었고, 형광등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김태훈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다른 두 명의 간부가 서 있었다. 이준호는 그들의 얼굴을 명확히 보지 못했다.
"오늘 S급 헌터 서연주의 지원을 맡았다고 들었다."
"네, 과장의 지시에 따라."
"그 임무 중에 특이한 점이 있었나?"
이준호의 심장이 빨라졌다. 그들이 뭔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요. 표준 절차대로 진행했습니다."
"헌터의 능력이 평상시보다 30% 이상 증폭되었다. 이유가 뭔가?"
"제 역할은 응급 처치와 기록입니다. 헌터의 능력 변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김태훈이 책상에 손을 얹었다. 그 손가락이 천천히 두드렸다.
"이준호. 너는 협회에 몇 년 근무했나?"
"8년입니다."
"그 동안 뭔가 이상한 것을 본 적이 없나?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것?"
이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김태훈의 질문이 함정처럼 느껴졌다.
"없습니다."
"정말?"
침묵이 흘렀다. 회의실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그 옆의 간부 중 한 명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준호는 그 말을 명확히 듣지 못했지만, 그 음성에 담긴 의도는 느껴졌다. 위협. 압박.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의 마지막 경고.
"만약 너가 뭔가 숨기고 있다면, 협회는 그것을 알아낼 것이다," 김태훈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지원가의 신경계를 추적할 수 있다. 마나 수치, 호르몬 변동, 뇌파까지. 만약 너가 비정상적인 능력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기록에 남는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그 순간, 김태훈의 옆 간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번엔 더 또렷했다.
"감정 증폭자가 맞습니다."
김태훈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의 신경계 신호는 이미 우리 시스템에 기록되어 있다," 김태훈이 천천히 말했다. "감정 증폭자는 타인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순간, 자신의 신경 활동이 역추적 가능한 상태가 된다. 당신이 서연주의 감정을 건드린 그 순간, 우리는 당신을 포착했다. 이해하나?"
이준호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당신은 통제 불가능한 변수다. 협회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옆의 간부가 덧붙였다. "제거 대상입니다."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협회에 귀속되지 않는 한, 우리는 당신의 신경계를 완전히 차단할 것이다. 감정 증폭자는 타인의 감정에 의존하는 능력이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면, 당신은 영구적인 감정 박탈 상태에 빠진다. 살아있지만 느끼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당신의 미래다."
침묵.
이준호는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이해했다. 자신의 능력이 뭔지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협회는 자신을 처리할 방법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는 않겠다," 김태훈이 말했다. "지금 당장 결정해라. 협회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사라질 것인가."
이준호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그 순간, 회의실의 불이 깜빡였다.
"뭐 하는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비상벨이 울렸다.
김태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된 일이야?"
"정전입니다. 건물 전체—"
그 말이 끝나기 전에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이준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창문 쪽으로. 그의 손이 닿은 순간, 창문이 부서졌다. 누군가의 손이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이쪽이야!"
서연주의 목소리였다.
이준호는 그녀의 손을 따라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래는 비상 계단이었다. 그들은 함께 내려갔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뒤에서 협회 보안 요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남았어?"
서연주가 물었다.
"3층입니다!"
이준호의 팔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부터 색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협회의 신경 추적이 시작된 것이었다.
"버텨. 조금만 더."
서연주가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따뜻함이 손가락 끝에서 시작되었다. 손가락 끝의 따뜻함이 혈관을 따라 팔뚝으로 흐르고, 팔꿈치를 지나 어깨에 닿았다. 그리고 심장에 도달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연함.
동지애.
그리고 약한 희망.
색이 돌아왔다. 손가락부터 팔뚝까지. 이준호는 다시 자신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가!"
서연주가 소리쳤다.
그들은 지하 1층 주차장으로 달렸다. 검은색 벤츠가 대기 중이었다. 뒷문이 열렸다. 이준호는 안으로 뛰어들었고, 서연주가 뒤따랐다.
기사는 말없이 액셀을 밟았다.
차는 협회 건물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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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주택가의 낡은 건물 안에서 이준호는 자신의 팔을 들어 들었다. 손가락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협회의 신경 추적이 계속되고 있었다.
"감정 증폭자가 뭐예요?"
이준호가 물었다.
서연주가 옆에 앉았다. "타인의 억눌린 감정을 감지하고, 그것을 깨워서 물리적 힘으로 변환시키는 사람. 던전에서 내가 평소보다 강해진 이유가 당신이 나의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이야. 나는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왔고, 그 감정이 너무 억눌려 있었어. 당신은 그것을 깨웠어."
"그럼 제 감정은?"
"당신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대가로 치르고 있어. 감정 촉각으로 타인의 감정을 감지하고, 그것을 증폭시켜 현현하는 순간, 당신 자신의 감정은 희미해진다. 협회 기록에도 없어. 지금까지 나타난 감정 증폭자는 다들 그렇게 사라져 버렸거든."
가슴팍까지 희미해져 있었다. 목도 옅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되돌려요?"
"혼자선 못 해. 하지만 우리가 있어."
서연주의 동료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이준호의 다른 손을 잡았다.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당신이 우리를 깨웠으니까, 이제 우리가 당신을 깨울 차례지."
그들의 눈빛은 결연했다.
색이 가슴팍으로 퍼져나갔다. 그 다음은 목, 얼굴, 머리. 이준호의 몸 전체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공포였다.
하지만 이번의 공포는 달랐다. 혼자가 아닌 것에서 오는 공포. 책임감에서 오는 공포. 그리고 그것을 함께 견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공포.
그 공포 속에서 이준호는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협회의 추적은 계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