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천장이 부서졌다.
아니다. 깜박였다. 눈을 떴다.
이준호는 천장을 바라봤다. 병원의 그것이었다. 형광등 불빛이 망막을 지났고, 눈이 타는 것 같았다. 팔을 들려고 했다. 움직였다. 신기했다. 몸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준호."
목소리였다. 이준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뇌가 모래사막 같았다. 어디를 파도 모래만 나왔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알았다.
박세진이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처참했다. 눈 아래가 검게 내려앉았고, 수염이 자라 있었다. 어떤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이준호는 계산할 수 없었다.
"넌... 깼어."
박세진이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감각이 있었다. 신체가 있었다. 신체가 있다는 것은,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라이라는?"
이준호가 물었다. 목이 아팠다. 마치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다가 놓은 것 같았다.
박세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죽었어."
그 단어를 뒤에서 유민서가 이었다. 그녀는 병실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화면에는 뇌파 그래프가 떠 있었다. 녹색 선이 느리고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라이라가 현계에 완전히 강림하려면 그릇이 필요했어. 그 그릇이 너였어. 하지만 정령의 의지와 인간의 신체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거든. 신경계가 먼저 녹기 시작했고, 심장이 멈췄어. 뇌파가 사라졌을 때, 라이라도 함께 소멸했어."
유민서가 차분히 설명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넌 48시간 동안 뇌사 상태였어. 심장 박동이 없었어. 근데 3일째 되는 날, 갑자기 다시 뛰기 시작했어.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회복이야."
이준호가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있었다. 투명하지 않았다. 피부색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손가락 끝이 미묘하게 차가웠다.
"신체는 E등급이야. 강화가 안 된 상태로 돌아왔어."
박세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분노가 있었다.
이준호는 일어나려고 했다. 몸이 떨렸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박세진이 손을 받쳐줬다.
"왜 자꾸 자신을 증명하려고 했어?"
유민서가 물었다. 그녀의 질문은 차갑지 않았다. 진정으로 궁금한 것처럼.
"모르겠어."
이준호가 대답했다. 정직한 대답이었다. 그는 정말로 몰랐다. 왜 자신이 그렇게 집착했는지. 기억이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얼굴. 헌팅사 설립 전의 꿈. 계약을 할 때마다 느꼈던 그 감각들. 모두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것들을 먹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이준호는 박세진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유민서의 얼굴을 봤다. 이 두 사람의 얼굴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 기억들만 지우지 않으려고 해준 것처럼.
"E등급이라는 낙인을..."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흐릿하게 떠올랐다. E등급이라는 것이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약함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내가 원했던 건 힘이 아니라..."
말이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았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인정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E등급이라는 낙인 너머에 있는 자신을 봐달라고. 약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달라고. 그리고 지금, 이 두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박세진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유민서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래. 넌 약해. 신체는 여전히 E등급이야. 힘도 없어. 계약 마법도 사라졌어. 다시 처음이야."
박세진이 말했다. 그 말은 잔인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이준호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근데 넌 여기 있어. 죽지 않고."
박세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넌 라이라를 이겼어. 또는 라이라가 너를 포기했거나. 어쨌든 넌 여기 있어."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박세진의 손과 맞닿아 있는 자신의 손. 그것은 약해 보였다. E등급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따뜻함이 전해졌다. 박세진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을 누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병실의 문이 열렸다.
이혜진이 들어섰다. 이준호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수일을 잠들지 않은 것처럼. 그녀는 이준호를 봤다. 그리고 멈췄다.
"준호."
그 한 단어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안도. 두려움. 분노. 모성.
박세진과 유민서는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여전히 이준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혜진은 침대 옆에 앉았다.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박세진과는 다른 손이었다. 더 부드러웠다. 더 따뜻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넌 우리 가문의 자산이 아니야."
이혜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넌 그냥...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 그것만으로 나는 행복했어."
이준호는 어머니의 얼굴을 봤다. 그것은 낯선 얼굴이었다. 기억 속에 있던 어머니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맞는 얼굴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얼굴처럼.
"미안해."
이준호가 말했다.
이혜진은 이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이제 집에 와. 제발."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간청이었다. 간절한 간청이었다.
이준호는 그 간청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힘이 아니었다. 인정도 아니었다.
집이었다.
돌아갈 곳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사라진 것이었다. 계약의 대가로. 자신이 선택한 길의 대가로.
이혜진의 손이 떨렸다. 이준호는 그 떨림을 느꼈다. 어머니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을 누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마치 자신이 정말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이.
"엄마는..."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목이 건조했다.
"엄마는 내가 뭘 했는지 알아?"
이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뉴스를 봤어. 모두가 본 거야. 강남역 상공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침묵이 흘렀다. 병실의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규칙적인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생명을 증명하는 신호음이었다.
"그건... 내가 아니었어."
이준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처럼 들렸다. 자신에게도.
"내 안에 있던 누군가가... 라이라가..."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이준호는 자신의 팔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봤다. 마나였다. 아주 약한 마나였지만, 분명 그것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박세진이 즉시 움직였다. 그는 침대 옆에 놓인 마나 차단 팔찌를 집어 들었다. 유민서가 이미 준비해 둔 것이었다. 박세진이 그것을 이준호의 손목에 채우려 하자, 이혜진이 손을 올렸다.
"안 돼."
그녀가 말했다.
"내 아들을 감금하지는 마."
박세진은 멈췄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그는 팔찌를 내려놨다.
"위험합니다. 마나 포화도가 아직 높고—"
유민서가 말을 시작했지만, 이혜진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준호의 팔을 잡고 그 희미한 빛을 봤다.
"이게... 뭔데?"
"계약의 흔적이야."
이준호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라이라가 내 안에 있었어. 내 기억을 먹고, 내 감정을 빨아먹고, 내 의지를 양식 삼아서 강해졌어.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몸을 완전히 차지했어."
이준호는 천장을 봤다.
"나는 죽었어. 심장이 멈췄을 때부터. 뇌파도 사라졌어.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끊겼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누군가는 내 신체를 움직이고 있었지."
"그런데 넌 여기 있어."
이혜진이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자 확인이었다.
"넌 살아 있어. 내가 느낄 수 있어. 네 손이 따뜻해."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팔의 빛이 더 강해졌다. 아직 약했지만, 분명히 증가하고 있었다.
박세진의 손이 이준호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마나 차단을 위한 신체 접촉이었다.
병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협회의 김태준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뒤에는 두 명의 조사관이 따라왔다. 그들의 손에는 감시 장비가 들려 있었다.
"이준호."
김태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공식적이었다.
"계약 마법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병실 안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박세진과 유민서는 한 발 물러섰지만, 그들의 눈은 여전히 이준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계약 마법은 단순한 강화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계와 게이트 너머 차원 사이의 균형을 깨뜨리는 금지된 것이었다. 고대에 어떤 인물이 그 마법을 사용했을 때, 대재난이 발생했다. 그 이후로 모든 기록이 삭제되었고, 계약 마법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김태준이 이준호의 눈을 마주쳤다.
"너는 그 균형을 깨뜨렸다. 그 결과 라이라는 현계에 강림하려 했고, 서울 전역의 3,847개 게이트가 동시에 열렸다. 그 과정에서 1,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팔의 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넌 죽지 않았다. 라이라가 소멸할 때, 너는 살아남았다. 이것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김태준이 일어섰다.
"넌 이제 협회의 영구 감시 대상이다. 계약 마법의 흔적이라도 감지되면, 우리는 즉시 격리 조치를 취할 것이다."
김태준은 조사관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병실 문 양쪽에 배치됐다. 감시 태세였다.
"48시간 내에 신체 검사를 진행한다. 마나 포화도 측정과 뇌 스캔을 포함해서다. 이의 제기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로서 넌 헌팅사 활동이 전면 금지된다. 협회 허가 없이 게이트 진입, 마나 사용, 헌터 활동 전부다."
김태준이 이준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봤다.
"48시간 후 검사 결과에 따라 추가 조치를 결정하겠다. 그때까지는 이 병실에 머물러야 한다."
그는 떠났다. 조사관들은 그대로 남았다. 병실 밖에 서서, 창문을 통해 안을 지켜봤다. 그들의 손에는 마나 감지기가 들려 있었다.
병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직 모니터의 비프음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이제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유민서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컨트랙트는 폐쇄됐어. 협회는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 메이저 헌팅사들은 우릴 제거 대상으로 보고 있을 거야."
유민서가 창문을 통해 서울을 봤다. 도시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게이트 붕괴로 인한 여파가 계속되고 있었다. 헬리콥터가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군대가 출동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
박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준호를 봤다. 그리고 이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팔에서 나오는 빛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우린 계속 간다."
박세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여전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결정된 무언가였다.
"어떻게?"
유민서가 물었다.
"모르겠지. 하지만 넌 약해. 넌 E등급이야. 그리고 우린 계약도 없고, 숨겨진 게이트도 없고, 협회의 지원도 없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박세진이 이준호의 눈을 봤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이게 진짜 시작이야."
이혜진이 아들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전에 넌 쉬어야 해. 제대로 회복해야 해."
"엄마."
이준호가 말했다.
"나는..."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뭐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팔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넌 내 아들이야."
이혜진이 말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해."
이준호는 어머니의 눈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세진은 여전히 이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유민서는 노트북의 화면을 내려닫았다.
"48시간이야."
유민서가 중얼거렸다.
"48시간 안에 뭘 해야 할까?"
박세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짧고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모르겠지. 하지만 우린 선택할 수 있어."
"뭘?"
유민서가 물었다.
"항복할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고. 계속 싸울 수도 있어."
박세진이 이준호를 봤다.
"그리고 넌?"
이준호는 천천히 어머니의 손을 놓고, 박세진의 눈을 봤다. 그 눈 속에는 결정이 있었다. 이미 정해진 무언가.
"계속 간다."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약했지만 분명했다.
"어떤 형태로든."
박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맞아."
병실 밖에서 조사관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감시를 강화하는 소리였다. 모니터 화면이 깜빡였다. 뇌파 그래프가 더 선명하게 떴다. 초록색 선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이준호는 천장을 봤다. 그 하얀 천장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협회의 감시. 메이저 헌팅사들의 위협. 그리고 자신이 저질러 놓은 죽음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머니의 손. 박세진의 결연함. 유민서의 침착함.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다는 것.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게 숨을 쉬었다. 가슴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48시간.
그 시간 안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았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이 무엇이든,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