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새로운 계약
협회 심문실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이준호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태준 부회장이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E등급으로 돌아가겠다는 건가?" 김태준이 물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투명했던 피부는 다시 불투명해졌고, 손가락의 마비감도 옅어졌다. 의사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회복"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회복이 아니었다. 라이라가 남긴 빈 껍질일 뿐이었다.
"네." 이준호가 말했다.
김태준이 코웃음을 쳤다. "48시간 전까지만 해도 넌 계약 마법으로 S등급 헌터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어. 서울 전역 게이트를 동시에 열 정도의 힘을.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E등급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넌 헌터가 아니다." 김태준이 손가락을 탁탁 테이블에 두드렸다. "계약 마법의 사용자로 분류되는 순간, 협회는 넘을 수 없는 위험 인물로 등재한다. 그 등재를 풀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계약 마법이 더 이상 사용 불가능함을 증명하는 것. 둘째, 협회에 대한 전면적 협력이다."
이준호는 침묵했다.
"넌 둘 다 만족한다. 계약 마법은 사라졌고, 라이라와의 계약도 끝났다. 그리고 넌 이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지?" 김태준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계약 마법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라이라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줄 게 있습니다."
김태준의 눈빛이 변했다.
이준호는 천천히 말했다. "라이라는 단순한 정령이 아니었습니다. 게이트 너머의 존재였고, 제 신체를 통해 현계에 강림하려고 했습니다. 계약은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제 기억과 감정과 의지를 양분으로 삼아서."
"그리고 지금?"
"지금은 라이라가 불완전한 상태로 현계에 있습니다. 인간 신체와의 양립 불가능으로 둘 다 소멸할 뻔했는데, 뭔가가 저를 되돌렸습니다. 라이라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김태준이 기록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 '뭔가'가 뭔지는?"
"모릅니다."
"모른다." 김태준이 중얼거렸다. 펜을 놨다. "흥미롭군. 계약 마법은 약함을 인정하는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 넌 자신의 약함을 인정했나?"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협회는 조건을 제시한다." 김태준이 문서를 내밀었다. "E등급 헌터로 복귀하되, 모든 활동은 협회의 감시 하에 진행된다. 계약 마법 사용 시도 시 즉시 구속. 정기적인 신체 검사와 정신 상담을 받아야 한다. 동의하나?"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김태준이 눈을 좁혔다. "계약 마법은 역사 기록에 없는 금지된 마법이다. 그것을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협회의 기본 원칙에 위배된다. 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
이준호는 그 문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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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로 돈아온 이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그 한가운데, 협회가 봉인한 S등급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마나가 밤하늘을 물들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박세진이 들어왔고, 유민서가 따라왔다.
"협회 심문 끝났어?" 박세진이 물었다.
"응."
"결과는?"
"E등급 헌터 복귀. 협회 감시 하에."
박세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우리 계획이 잠깐 미뤄질 뿐이야."
이준호가 박세진을 바라봤다.
유민서가 침대 옆에 앉았다. "컨트랙트는 협회 명령으로 폐쇄되지만, 우리는 계속할 수 있어. 넌 E등급이지만, 우린 여전히 유효한 헌터거든."
박세진이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가 만들 거야. 다시. 이번엔 계약 마법 없이."
"계약 마법 없이?" 이준호가 물었다.
"응. 넌 E등급 신체야. 강화도 안 되고, 계약도 못 해. 하지만 우린 있어." 박세진이 가슴을 쳤다. "난 A등급 근력이 있고, 유민서는 게이트 분석 능력이 있어. 그리고 우리가 알아낸 게 있어."
"뭔데요?" 이준호가 물었다.
유민서가 대답했다. "게이트는 일방적인 채취 대상이 아니야. 라이라가 증명했잖아. 게이트는 뭔가와 상호작용하는 존재야. 우리가 그 패턴을 분석하면, 협회도 메이저 헌팅사들도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 가능해."
박세진이 덧붙였다. "협회 내부 정보도 확보했어. 메이저 헌팅사들이 움직이고 있거든. 그들도 라이라를 추적하려고 해. 우리가 그 사이에서 움직이면..."
"협회의 감시를 피할 수 있다는 건가요?" 이준호가 물었다.
"정확해." 박세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넌 게이트를 조종하지 못해. 하지만 우린 게이트를 함께 분석할 수 있어. 데이터를 축적하고, 패턴을 찾고, 그 비밀을 푸는 거야."
이준호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박세진의 눈빛, 유민서의 표정. 그들은 정말 진심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난 너희를 잃었는데, 너희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박세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우리가 멍청한 건 아니거든. 넌 우리 팀이야."
유민서도 웃었다. "내일부터 시작하자.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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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갔다. 박세진과 유민서가 나간 후, 이준호는 다시 창밖을 봤다. S등급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마나는 여전했다. 협회의 봉인 장비들이 그것을 억누르려 했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계약은 끝났다.'
라이라였다. 하지만 이번엔 이준호의 신체를 통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람에서, 마나의 흐름에서, 게이트의 금빛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이제 변할 것이다. 게이트는 더 이상 단순한 채취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이고, 대화이고,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다.'
이준호는 손을 들어 창밖을 향해 폈다.
'그리고 넌 그 변화의 한가운데 있을 것이다.'
창밖의 금빛이 한 번 크게 맥동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이준호는 손을 내렸다. 내일은 다시 협회 헌터 등록을 할 것이고, E등급으로 분류될 것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약한 헌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옆에는 박세진과 유민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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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눈을 떴다. 밤 1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문이 열렸다. 김태준이었다.
"밤중에 찾아뵈네요." 이준호가 일어나 앉았다.
김태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S등급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마나가 여전히 맥동하고 있었다.
"계약 마법의 사용자가 깨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왔다." 김태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E등급 헌터 이준호. 넌 게이트와 계약해서 서울 전역 3,847개 게이트를 동시에 열었고, 그로 인해 1,247명이 죽었다. 알겠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넌 죽지 않았다." 김태준이 이준호를 마주봤다. "의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하게. 넌 뇌사 상태에서 48시간 만에 깨어났다."
이준호는 침묵했다.
"라이라가 널 살렸나?" 김태준이 다가왔다. "아니면 계약 마법의 잔재가 남아있나?"
"라이라는 제 신체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뭔가가 일어났지만, 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김태준이 눈을 좁혔다. "계약 마법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다. 넌 혹시 다시 사용할 생각은 없나?"
"없습니다."
"정말?" 김태준이 한 발 더 다가왔다. "계약 마법은 약함을 인정하는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 넌 이미 약함을 인정했다. 그럼 언제든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이준호가 대답했다. "라이라와의 계약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다른 방법?"
"네. 혼자가 아닌 방법입니다."
김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협회 부회장님은 계약 마법이 금지된 고대 마법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이준호가 계속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약함을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약함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게 제 진정한 힘입니다."
김태준은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그 게이트가 완전히 열리면 협회도 통제 불가능해진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때 넌 어디 편인가?"
"필요한 곳에 서겠습니다."
김태준이 돌아서며 문을 열었다. 나가기 직전, 그가 한 마디 더했다.
"그 게이트가 완전히 열리면 협회도 통제 불가능해진다. 그때 넌 어디 편인가?"
"필요한 곳에 서겠습니다."
김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조롱 같기도, 감탄 같기도 했다.
"정말 미쳤네. 너희 셋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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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9시. 이준호는 헌터 협회 등록실에 서 있었다.
창구 직원은 그의 신체 스캔 결과를 확인하며 말했다.
"E등급 확정입니다. 신체 강화도는 0%. 게이트 진입 불가 판정에서 해제되셨으니, 이제 일반 헌터 활동이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헌터 신분증이 출력되었다. E등급. 이준호였다.
박세진과 유민서가 협회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분증을 받은 이준호가 그들에게 다가갔을 때, 박세진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 또 한 명의 E등급이 생겼다." 박세진이 신분증을 봤다. "좋아. 이제 우리 셋 다 밑바닥이네."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게 낫다." 유민서가 말했다. "위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이준호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절망적이지 않았다. 마치 새로운 게임의 시작을 기다리는 선수들처럼.
"컨트랙트는 끝났지만," 박세진이 말했다. "우리는 계속이야.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게이트의 비밀을 푸는 것. 그게 우리의 새로운 목표야." 유민서가 덧붙였다. "라이라가 증명했잖아. 게이트는 일방적인 채취 대상이 아니야. 그것은 뭔가와 상호작용하는 존재야.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면..."
"협회도 메이저 헌팅사들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박세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준호가 신분증을 들었다. E등급. 초라했지만, 그것이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이준호가 물었다.
"내일." 박세진이 대답했다. "오늘은 쉬자. 우리 모두 필요한 휴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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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로 돌아온 이준호는 다시 창밖을 봤다. S등급 게이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협회의 봉인 장비들이 그것을 억누르려 했지만, 금빛 마나는 계속 맥동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이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시작이었다.
새로운 게이트가 기다리고 있었고, 새로운 위협도 기다리고 있었다. 협회는 라이라를 막으려 할 것이고, 메이저 헌팅사들은 여전히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 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준호는 알았다.
약함은 약함이 아니라, 함께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함께함 속에서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밤이 깊어갔다. 병실 밖에서는 협회의 밤샘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S등급 게이트를 봉인하려는 노력. 1,247명의 사망자를 처리하려는 노력. 도시 전역의 3,847개 게이트를 다시 안정화시키려는 노력.
하지만 금빛 마나는 계속 흘러나왔다.
협회도, 메이저 헌팅사들도, 어떤 힘도 그것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시작된 변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한 명의 E등급 헌터와 두 명의 동료가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밑바닥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앞에 놓인 길은 험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