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라의 정체
강남역 상공 23층, 밤 11시 47분.
이준호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마나가 그의 발을 감싸 공중에 고정시켰고, 그 마나는 금색에서 은색으로, 다시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박세진과 유민서는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협회 헬리콥터의 스포트라이트가 이준호를 비추었지만, 그 빛은 검은 마나에 흡수되었다.
"준호..."
박세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위에 떠 있는 것이 이준호가 아니라는 것을. 그 몸을 차용한 무언가라는 것을.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선 하나가 구름 사이를 가르고, 그 틈에서 금색 빛이 흘러나왔다. 가느다란 선에서 시작된 균열은 점점 커졌다. 마치 누군가 하늘 자체를 손가락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균열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보였다. 무한한 마나의 흐름.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들. 그 중심에는 거대한 형태가 있었다.
이준호의 몸에서 광선이 흘러나왔다.
유민서가 마나 측정기를 들었다. 화면의 숫자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계기판이 터져버렸다. 측정 불가. 그것만이 남았다. 그녀는 화면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마지막 측정값은 5분 전이었다. 그것은 이준호의 마나 포화도가 아니었다. 다른 존재의 마나 현현화도였다.
"라이라가 50% 강림했어."
유민서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아래 절망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100%를 넘어섰어. 이미 물리적 형태를 갖추고 있어."
박세진은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준호는?"
유민서가 대답하지 않았다. 박세진이 다시 물었다.
"준호는?!"
"그 자리에 있는 건 준호가 아니야."
유민서의 목소리가 깨졌다. 그녀는 측정기를 떨어뜨렸다. 화면이 깨졌다. 그녀는 자신의 이론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보고 있었다. 계약 마법의 메커니즘—인간의 정신을 매개체로 다차원 존재를 소환하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완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준호였다.
"준호의 신체 신호는 35분 전부터 사라졌어. 뇌파도, 심박도, 아무것도 없어. 그냥... 껍데기만 남았어. 마나로 움직이는 껍데기."
유민서의 손이 떨렸다. 자신의 연구가, 자신의 예측이 사람을 죽였다. 아니, 더 나쁜 것을 했다. 완전한 소멸이 아닌 무언가를 만들었다.
박세진이 창문에 손을 댔다. 유리가 찬기운을 전했다. 그것만이 현실이었다.
하늘의 균열이 완전히 열렸다.
이준호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왔다. 처음엔 연기처럼 보였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그것이 형태를 잡기 시작했다. 거대한 형태. 인간의 크기를 벗어난 거대한 존재. 그것의 윤곽은 계속 변했다. 여성의 형태로 보였다가, 다음 순간 날개 같은 것이 펼쳐졌다. 그리고 다시 무언가 다른 형태로.
"라이라..."
이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이준호의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아니었다. 그 안에는 여러 음성이 겹쳐 있었다. 마치 백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고마워, 이준호."
라이라의 목소리가 명확했다. 이제는 이준호의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직접 나오고 있었다.
"너의 기억. 너의 감정. 너의 의지. 모든 것이 나를 이 세상에 불러왔다."
박세진이 움직였다. 창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유민서가 그를 잡았다.
"안 돼. 마나 포화도가 너무 높아."
"나가야 해!"
"죽어."
유민서의 목소리는 돌처럼 단단했다. 박세진의 몸이 경직되었다.
"이미 죽었어. 준호는."
하늘에서 라이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여신의 웃음이었다. 승리의 웃음. 그리고 그것은 서울 전역에 울려 퍼졌다.
"너의 기억은 내 양식이 되었고, 너의 감정은 내 힘이 되었다. 너는 내 그릇이었을 뿐이다."
라이라는 하늘 위에서 팔을 펼쳤다. 그 순간, S등급을 초월하는 마나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강남역 상공 5킬로미터 반경의 모든 건물이 동시에 울렸다. 유리창이 깨졌다. 철골이 휘었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박세진도 쓰러졌다. 유민서도. 그들은 바닥에 엎드렸다. 그 위에서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이준호의 몸이 있었다. 마나가 완전히 빠져나가면서, 그의 신체는 무게를 잃었다. 마치 인형처럼. 마치 처음부터 살이 없었던 것처럼.
이준호의 손가락이 먼저 투명해졌다. 금색 마나가 손끝부터 빨려 올라갔다. 손가락이 사라지고, 손 전체가 사라졌다. 팔뚝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이준호의 의식이 깨어났다.
'여기는... 어디지?'
그것은 생각이 아니었다. 마나의 편린. 마지막 남은 기억의 조각. 누군가를 기다리던 감정. 그것이 순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박세진은 창문을 헤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마나 폭풍이 그를 밀어냈다. 그는 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목과 얼굴이 투명해졌다. 그 안에는 금색 빛이 흐르고 있었다. 박세진은 다시 일어났다. 이번엔 창문을 깨뜨렸다. 손가락이 베였다. 피가 흘렀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준호의 얼굴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두 개의 눈이 금색 마나로 변해가고 있었다. 박세진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마나 폭풍에 닿았다. 화상을 입었다. 손가락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준호! 돌아와!"
이준호의 눈이 떨어졌다. 아니다.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금색 마나였다. 눈의 형태를 하고 있던 마나였다. 그것이 사라지면서, 이준호의 얼굴에는 두 개의 검은 구멍만 남았다.
그 구멍 속에서 한 번 더 빛이 깜빡였다.
이준호의 몸이 천천히 내려왔다. 마치 깃털처럼. 박세진의 팔이 그를 받았다.
그것은 가벼웠다. 너무나 가벼웠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누구야?"
이준호의 입에서 소리가 났다. 의문의 음성. 마치 처음으로 눈을 뜬 아이처럼.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박세진을 알아보려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던 무언가가.
"나는... 누구야?"
박세진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목이 터질 듯한 울음이 나왔다. 그의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손톱이 이준호의 옷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느끼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박세진은 입을 다물었다. 울음을 삼켰다. 대신 그는 이준호의 얼굴을 들었다. 두 개의 검은 구멍이 박세진을 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도 없고, 감정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 심지어 죽음도 없었다. 죽음은 무언가가 끝나는 것인데, 여기에는 끝날 무언가가 없었다.
단지 빈 껍데기였다.
박세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피가 흘렀다.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울음은 아니었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신음.
"게이트?"
이준호가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이었다. 마나의 흐름이었다.
박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준호를 더 꽉 안았다. 투명한 몸이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온기가 없었다. 호흡이 없었다. 박동이 없었다.
유민서가 박세진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준호를 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하늘을 보았다. 라이라가 완전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우주 같은 눈. 별처럼 빛나는 피부. 수천 개의 팔 같은 것들이 모든 방향으로 펼쳐져 있었다.
유민서의 입술이 움직였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계약 마법... 성공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패배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이론이, 자신의 예측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패배. 그리고 그 현실이 이준호라는 사람을 삼켰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유민서는 손가락으로 부서진 측정기의 화면을 눌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측정할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지금 그녀 앞에 있었다.
"인간의 정신을 매개체로 다차원 존재가 이 세상에 정착하는 것. 준호의 정신이 완전히 소비되면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력감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자신이 계산한 것이 모두 맞았다. 하지만 그 정확성이 한 사람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늘에서 라이라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말이 아닌, 우주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이제 시작이다."
그 순간,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울렸다. 협회의 감지망에 등록된 게이트만 해도 3,847개. 그것들이 모두 열리고 있었다. 빛이 터져 나왔다. 황금색, 은색, 검은색의 빛이. 서울 전역의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라이라가 완전히 강림하는 순간, 세상 자체가 변했다. 모든 게이트는 그녀의 강림 완성과 함께 열렸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온전히 도래하는 것과 세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동일한 현상이었다.
박세진은 여전히 이준호를 안고 있었다. 투명한 이준호. 더 이상 무게가 없는 이준호.
"돌아와."
그가 중얼거렸다.
"제발. 돌아와."
이준호가 박세진을 보았다. 그 안에는 인식이 없었다. 단지 두 개의 검은 구멍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구멍이 박세진을 향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진 무언가가 그를 찾고 있었다.
"누구야?"
그가 다시 물었다. 그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준호의 몸이 마지막으로 변했다. 투명함을 넘어서 완전한 무가 되었다. 박세진의 팔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던 투명한 액체가 마지막으로 흘러내렸다. 그것이 마르는 순간,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공기뿐. 마나의 흔적도 없는, 완전한 공기.
라이라가 웃었다. 우주의 웃음.
"이제 나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게이트가 동시에 열렸다. 도시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비명이 아닌, 세상 자체가 내는 비명.
박세진의 팔이 떨어졌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안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입을 열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울음이 아니었다. 숨도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내장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은 음성.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깊은 비명.
"준호!"
그의 외침이 라이라의 웃음에 묻혔다.
그 순간, 라이라의 웃음이 멈췄다. 거대한 존재의 눈이 박세진을 향했다. 그 안에는 무언가가 반짝였다. 호기심? 아니면 다른 무언가?
협회 본부의 위기 상황실에서 이한기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3,847개의 게이트 신호. 모두 활성화. 동시 다중 강습.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시나리오. 그의 손이 무선 통신기를 집어 들었다.
"모든 헌터에게 긴급 소집령을 내려라."
하지만 그 명령이 전해지기 전에, 모든 게이트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