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붕괴
협회 소환장으로 향하는 차량 안에서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제대로 구부러지지 않았다. 신경이 끊긴 것처럼 둔했다. 어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니다. 어제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세진이었다.
"지금 어디야?"
"협회다. 소환 통지가 떨어졌어."
침묵. 그다음 박세진의 숨소리만 들렸다.
"계약을 몇 번 했어?"
"세어본 적이 없다."
"이준호."
박세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낯설었다. 마치 죽은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처럼. 이준호는 수화기를 내려놨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협회 본부 32층 조사실은 회색 벽과 회색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문도 없었다. 김태준이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부회장이라는 직책보다는 그의 눈빛이 더 무거웠다.
"이준호 군. 이제부터 당신의 계약 마법에 대해 정식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이 이전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 관절이 뻣뻣했다. 아니면 신경이 마비된 것인가.
"당신은 E등급 헌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B등급 이상의 마나 결정을 채취했고, 동시에 300개 이상의 미등록 게이트를 감지했습니까?"
"계약으로."
"계약이 뭡니까?"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설명할 말이 없었다. 계약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라이라와 뭔가를 나눈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어린 시절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이 게이트 내에서 보인 초인적 능력은 헌터 협회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마나 강화도 아니고, 생명체 수렵도 아니고, 장비 보강도 아닙니다."
김태준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당신은 게이트와 직접 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네."
대답이 저절로 나왔다. 이준호는 자신이 뭘 말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게이트와 대화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기억이 안 나요."
김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폴더를 펼쳤다. 거기엔 이준호의 얼굴 사진들이 있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된 사진들. 이준호의 눈은 매번 다른 색이었다. 황금색, 청색, 검은색. 마지막 사진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마나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이 사진들이 일주일 동안 촬영된 것입니다. 당신의 신체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게이트 적응 증후군으로 분류했지만, 기록상 이런 변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당신도 모른다?"
"계약의 대가가 뭔지... 설명할 수 없어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뭔가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뭔가. 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후 사라지는 기억처럼.
"당신이 개방한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나 신호는 기존 분류 체계를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것은 협회가 규제해야 할 대상입니다."
김태준이 일어섰다.
"헌팅사 '컨트랙트'의 모든 활동을 즉시 중단하시오. 추가 계약은 금지됩니다. 위반 시 헌터 자격을 박탈하겠습니다."
이준호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기 위해 신체에 명령을 내렸지만, 신체가 응하지 않았다. 아니다. 신체가 응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중요했다.
"나가셔도 됩니다."
이준호는 나갔다. 복도를 걸으면서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더 얇아진 것 같았다. 피부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뭔가 빨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박세진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와 유민서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박세진의 얼굴은 창백했다.
"협회에서 뭐라고 했어?"
"계약을 중단하라고."
"그리고?"
"자격 박탈 위협."
박세진이 이준호의 눈을 봤다. 이준호는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 뭔가 다른 것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넌 지금 누가 되고 싶은 거야?"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 대답하고 싶었다. 정말로.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였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뭔가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E등급이라는 낙인을 벗고 싶었다.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신체의 한계가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어."
"뭐?"
"난... 뭐가 되고 싶었는지 기억이 안 나."
이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뺨이 젖었지만 슬픔은 없었다.
박세진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이 거의 뼈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계약을 멈춰. 지금 바로."
"안 돼."
"뭐?"
"멈출 수 없어."
"왜?"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라이라가 뭔가 말했던 것 같은데. 계약이 멈출 수 없다고. 계약은 약함을 받아들인 자만 쓸 수 있다고. 자신은 약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은 약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도. 지금까지도.
유민서가 다가왔다. 그녀의 눈이 이준호의 눈과 마주쳤다.
"넌 이미 다른 사람이 됐어."
"그렇지 않아."
"눈빛이 다르고, 말투가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심장박동이 다르고, 뇌파가 다르고... 넌 이미 다른 사람이야."
유민서의 음성 분석 장비가 울렸다. 이준호의 심장박동이 분당 150을 넘었다. 정상은 60에서 80이었다. 뭔가 자신의 신체가 아닌 것이 그 안에서 뛰고 있었다.
이준호는 거울을 찾았다. 사무실 한쪽에 있던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 속의 얼굴을 봤을 때,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얼굴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신체는 같았다. 이준호의 신체. 하지만 눈빛은 낯설었다. 감정이 없었다. 마치 시체의 눈처럼. 피부도 투명해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마나로 변하고 있었다. 팔뚝의 혈관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귓가에서 속삭임이 들렸다. 목소리가 아니라 감정 같은 것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
—너는 약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계약은 너를 먹어치우고 있다. 계약은 약함을 인정한 자만 쓸 수 있다. 너는 여전히 강함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계약한다. 그래서 더 사라진다.
박세진이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이준호!"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유민서의 휴대폰. 화면에는 협회의 긴급 공지가 떴다.
[긴급 공지: 헌팅사 '컨트랙트'의 게이트 채취권 박탈 및 자산 동결 절차 개시. 법적 이의 제기 기한: 48시간]
박세진의 얼굴이 굳었다. 분노가 아니라 절망이 흘렀다. 유민서의 손이 떨렸다.
"이한기가 움직였어. 메이저 헌팅사들이 모두."
박세진은 즉각 반응했다. 협회의 자산 동결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었다. 컨트랙트가 보유한 모든 게이트의 채취권을 박탈하고,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헌팅사 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치였다. 48시간 안에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면 영구적인 손실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한기와 메이저 헌팅사들이 컨트랙트를 압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었다.
이준호는 여전히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이 입을 열었다. 거울 밖의 자신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우리 게이트를 빼앗으려고 하네."
라이라의 목소리였다. 깊고, 오래되고, 낯선 음성이 이준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우리도 움직여야지. 마지막 계약을 할 시간이야. S등급 게이트를."
박세진이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피부가 물처럼 유동적이 됐다. 박세진의 손이 이준호의 팔을 관통했다.
유민서가 비명을 질렀다.
"준호!"
박세진은 손을 빼려 했지만 멈췄다. 이준호의 팔이 다시 굳어지고 있었다. 마나가 응고되면서 형태를 잡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팔이 아니었다. 표면이 수정처럼 반사되고, 내부에 차원의 흐름이 보였다.
박세진이 다시 이준호의 팔을 잡으려 했다. 이번엔 더 강하게.
"정신을 차려!"
박세진이 소리쳤다. 사무실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이준호 주변의 공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넌 라이라에게 먹히고 있어. 계약을 멈춰. 라이라, 계약을 해제해!"
이준호의 신체가 서서히 변했다. 마나가 응고되면서 차원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손가락이 수정화된 가지처럼 펼쳐졌다. 팔뚝의 혈관이 금색에서 차원의 색으로 변해갔다.
유민서가 이준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장비가 들렸다. 마나 차단 장치였다. 협회에서 개발한 것으로, 헌터의 마나 흐름을 강제로 차단할 수 있는 기계였다. 비상용이었다. 위험한 헌터를 제압할 때만 쓰는 것이었다.
"미안해, 준호."
유민서가 그것을 이준호의 목에 부착하려 했을 때, 이준호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마나의 가시가 이준호의 팔에서 수정처럼 자라나 유민서를 향해 날아왔다.
박세진이 유민서를 밀쳐냈다. 가시가 박세진의 팔을 지나갔다. 피가 흘렀다. 붉은 피와 검은 마나가 섞여서.
"이준호!"
박세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자신의 손이 아닌, 누군가의 손. 차가운 손. 마나로 이루어진 손.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싫어. 싫어."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또 다른 목소리였다. 셋째 목소리였다.
"싫어... 뭐하는 거야... 왜..."
기억이 떠올랐다. 단편적으로. 마치 낡은 필름처럼.
어린 이준호가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게이트가 붕괴되고 있었다. 검은 빛이. 차원이 깨지는 소리가.
"아빠!"
그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때의 목소리였다. 7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기억은 이미 흐릿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그것도 사라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말했는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모든 것이 마치 수증기처럼 증발하고 있었다.
—기억을 버렸어. 이미.
라이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너는 그 기억을 견딜 수 없었어. 약함을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계약했어.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먹었어. 너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이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사무실의 바닥에. 하지만 무릎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바닥이 마나로 부드러워져서, 이준호를 받아주고 있었다.
박세진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조심스럽게. 마치 깨질 것 같은 유리를 다루듯이.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절망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이준호. 나를 봐. 넌 이준호야. 너는..."
박세진이 말을 멈췄다. 왜냐하면 이준호가 눈을 들었을 때, 그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없었다. 기억이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그의 신체가 서서히 투명해졌다. 마나로 변해갔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차원의 색으로 물든 눈이었다.
"컨트랙트를 지켜. 박세진."
라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동시에, 이준호의 목소리이기도 한 이상한 음성이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우리? 넌 뭐야? 넌 누구야?"
박세진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사무실이 흔들렸다. 조명이 깜빡거렸다.
"S등급 게이트를 열 시간이야."
목소리만 남았다.
"넌... 날 놔. 라이라, 제발."
이준호가, 아직 남아있던 이준호가 간청했다. 그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마지막 저항이었다. 자신을 되찾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싫어. 넌 계약을 원했어. 넌 강함을 원했어. 그럼 강해져.
라이라의 음성이 이준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나는..."
헌팅사를 설립한 이유가 떠올랐다. 박세진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 유민서가 자신을 찾아온 날. 그들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 그것들이 왜 중요했는지, 왜 자신이 E등급이라는 낙인을 벗고 싶었는지. 약한 자신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도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이.
남은 것은 절박함뿐이었다. 모든 것을 잃지 않으려는 절박함. 컨트랙트를 지키려는 절박함. 박세진과 유민서를 지키려는 절박함.
박세진은 그 절박함을 읽었다. 이준호가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그 약한 저항이 또 다른 계약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계약이 이준호를 완전히 삼켜버릴 것이라는 것을.
박세진의 손이 주먹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칠 수 없었다. 이미 이준호의 신체는 마나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나는 이준호가 아니었다.
유민서는 여전히 마나 차단 장치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이준호는 반쯤 차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차단 장치는 인간의 마나에만 작동했다.
강남역 지하 400미터. 이준호의 손이 마지막 게이트를 열고 있었다. 그의 신체는 이미 80% 이상 마나로 변해있었다. 남은 것은 의지뿐이었다.
"라이라, 대가를 받아."
이준호가 속삭였다.
라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슬픈 음성이었다.
"받겠지. 넌 이제 아무것도 아닐 거야. 기억도 없고, 감정도 없고, 정체성도 없는. 하지만 강할 거야. 완전히."
라이라는 중얼거렸다. 돌아갈 시간이라고. 마치 오랜 방랑을 끝내는 자의 목소리로. 그 목소리 속에는 향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이준호를 집어삼킨다는 죄책감 같은 것.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라이라의 의도는 불명확했다. 단지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게이트가 열렸다.
S등급을 넘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게이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이었다.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박세진은 여전히 사무실에 서 있었다. 유민서도. 그들은 이준호가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컨트랙트를 지켜."
박세진의 주먹이 책상을 내려쳤다. 나무가 갈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충분할 수 없었다. 이준호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48시간 안에 협회의 자산 동결이 확정되면, 컨트랙트도 사라질 것이었다.
박세진은 결단했다. 이준호가 남긴 마지막 의지를 받아들이기로. 컨트랙트를 지키기로. 그리고 이준호를 되찾기로.
유민서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도 같은 결단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48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해."
박세진이 말했다.
"이한기를 상대해야 하고, 협회를 상대해야 하고, 메이저 헌팅사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준호를 되찾아야 한다."
유민서가 덧붙였다.
박세진은 창문을 통해 서울의 야경을 바라봤다. 강남역 지하 400미터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이준호가 열어놓은 문 너머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누가 웃고 있는 것인지, 박세진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진짜 계약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