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박세진의 사무실, 밤 11시 정각

이준호는 책상 위의 지형도를 펼쳤다. 검은 펜으로 표시된 다섯 개의 점. 강남, 분당, 일산, 인천, 수원. 모두 미등록 게이트의 위치였다.

"이게 일주일 만에?"

박세진이 지도를 내려다봤다. 얼굴 반은 조명에, 반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네."

이준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처럼. 그의 눈은 여전히 옅은 금색을 띠고 있었다. 계약을 맺을 때마다 조금씩 짙어지는 색이었다.

"라이라와?"

"다섯 번. 동시에."

박세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준호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뭔가 낯섦이 섞여 있었다. 지난주만 해도 이준호의 눈에는 분노가 있었다. E등급이라는 낙인에 대한 분노. 자신의 신체를 증오하는 분노.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이라가 경고했나?"

"네. 정체성이 조각난다고."

"알면서?"

"네."

박세진이 지형도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다섯 개의 점을 차례로 짚었다.

"첫 번째 계약은?"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말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수초가 흘렀다.

"강남 게이트. 조건은 자신의 약함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 대가는 마나 흡수 능력 향상."

그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기억이 흐릿했다.

박세진이 의자에 앉았다. 천천히,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어?"

이준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라이라가 계약 조건을 제시했고, 저는..."

그가 다시 멈췄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술을 조종하는 것처럼.

"기억이 안 난다."

박세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라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나? 직접 만났나?"

"목소리만. 계약은 목소리로만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계약이 끝나고 나왔을 때, 제 기억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 제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박세진이 일어섰다. 책상을 돌아 이준호 앞으로 다가갔다.

"나머지 네 번째까지는?"

"분당은 자신의 두려움을 직시하는 것.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이준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제 어린 시절이 보였습니다. 누군가가 제 손을 잡고 있는데, 그 얼굴이 안 보였어요. 마치 누군가 그 부분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저는 그 손을 놓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놓을 수 없었습니다."

박세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두려움을 직시하겠다고 했을 때, 대가가 발생했습니다. 그 손을 잡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기억에서."

이준호가 박세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금색을 넘어 다른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일산은 절망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게이트 내부에서 라이라가 제 미래를 보여줬습니다. 제가 더 이상 이준호가 아니게 되는 미래.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신체 제어가 흐트러렸습니다. 제 손가락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제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박세진이 이준호의 손을 집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인천과 수원은?"

"인천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 수원은..."

이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수원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박세진의 손이 경직됐다.

"포기하지 마."

"이미 했습니다."

"뭐?"

"인천 게이트에서 계약을 맺을 때, 제 욕망이 뭔지 물었습니다. 라이라가. 그런데 저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제 욕망이 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알고 있었는데..."

이준호가 박세진의 눈을 직시했다.

"제 욕망이 아니라 라이라의 욕망이 제 욕망처럼 느껴졌습니다. 마나를 먹고 싶은 욕망. 현실을 침식하고 싶은 욕망. 그것들이 제 욕망처럼."

박세진이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넌 도망쳤어."

이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아주 짧은 순간, 0.3초 정도. 그의 얼굴에 뭔가가 스쳤다. 통증 같은 것. 그것이 금방 사라지자, 박세진은 이제 자신이 본 것이 환각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도망쳤다는 게 무슨—"

"약함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약함에서 벗어나는 거다. 두려움을 직시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지우는 거다. 절망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정체성을 포기하는 거다. 넌 모두 도망쳤어. 자신에게서. 라이라에게 모든 걸 맡겼어."

이준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넌 도망쳤어.'*

그 말이 반복됐다. 이준호의 머릿속에서. 박세진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것이 왜 이렇게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질까. 마치 물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흘러나온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고, 더 차갑고, 더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도망친 게 아닙니다."

자신이 말한 게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다.

이준호는 공포를 느꼈다. 신체 제어 불능의 공포. 자신의 입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공포.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누군가 자신을 안아주던 팔. 따뜻한 목소리. 그런데 그 얼굴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그 기억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라이라가 지우고 있었다.

대신 라이라의 기억이 들어오고 있었다. 금색의 세계. 끝없는 욕망. 무언가를 먹고 싶은 갈증. 그것이 자신의 기억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모래를 쓸어가는 것처럼.

"자신이 처음에 뭘 원했어?"

박세진의 질문이 들렸다. 마치 먼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닫았다. 다시 열었다. 닫았다.

자신이 처음에 뭘 원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E등급이라는 낙인을 벗고 싶었나? 그걸 벗고 싶었나? 그게 맞나? 아니다. 뭔가 더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던 일? 가족? 아니, 뭔가 다른...

공백이었다. 마치 영화 필름에 구멍이 난 것처럼. 그리고 그 구멍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공포.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는 절망. 그것이 신체를 타고 흐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잠깐."

박세진이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너 괜찮아?"

"네."

"거짓말하지 마."

"괜찮습니다."

존댓말. 박세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이준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이준호. 나 봐. 이준호!"

이준호의 눈이 박세진을 향했다. 하지만 그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함만 있을 뿐.

박세진이 이준호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눌렀다.

"유민서. 상황이 어떻게 돼?"

휴대폰 너머에서 유민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고 있었다.

"박세진, 이준호 뭐 하는 거야? 게이트 신호가 계속 올라와. 그리고 간격이..."

"뭐?"

"계약 간격이 계속 단축되고 있어. 처음엔 12분이었는데 이제 6분이야. 그리고 강남, 분당, 일산 신호가 동시에 올라오고 있어. 이 속도라면..."

유민서가 계산을 마쳤다.

"48시간이 아니라 45분 안에 그의 신체가 견딜 수 있는 계약 횟수 한계를 넘어간다.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엔 뭐가 일어날지 모르겠어. 신체 붕괴? 정신 붕괴? 아니면 완전한 정체성 소실. 이준호가 더 이상 이준호가 아니게 될 수도 있어."

박세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침묵이 뭘 의미하는지 유민서는 알았다.

"박세진, 이준호 지금 어디야?"

"내 사무실이야."

"지금 당장 협회에 신고해. 미등록 게이트 신고 의무 위반으로. 그리고 이준호를 격리시켜. 라이라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통제 불능 상태야."

박세진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알겠어."

박세진이 전화를 끝냈다. 그리고 협회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

# 협회 본부, 10층 회의실

김태준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빨간색 그래프. 상승 곡선이 거의 수직에 가까웠다.

"'컨트랙트'의 채취량이 이렇게 빠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의 옆에 앉은 이한기가 손가락으로 그래프를 짚었다.

"미등록 게이트가 그렇게 많단 뜻이지. 우리가 놓친 게이트들."

"아니다."

김태준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감지망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이 정도 규모의 마나 활동이 감지 안 될 리 없어."

이한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으로 나갔다. 서울 야경 너머, 한강이 검은 띠처럼 흘렀다.

"그럼 뭐야?"

"저 놈의 능력이다. 계약 마법."

김태준이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세 개의 지역이 나타났다. 각각의 마나 에너지 그래프가 거의 동일한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어제 밤 강남, 분당, 일산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마나 폭주가 감지됐다. 정확히 오후 11시 47분. 모두 같은 시간에."

"세 게이트를 동시에? 불가능해."

"그게 문제야. 불가능한 게 일어나고 있다는 거다."

이한기가 화면을 자세히 봤다. 세 그래프의 패턴이 거의 동일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종한 것처럼.

"게이트를 조종한다고? 그게 가능한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

김태준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준호를 압박해야 한다. 지금 당장. 미등록 게이트 신고 의무 위반으로. 그리고 라이라라는 계약 마법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이건 더 이상 개인 문제가 아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박세진의 전화였다.

김태준이 받았다.

"박세진?"

"이준호가 위험한 상태입니다. 라이라와의 계약이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45분 안에 신체 한계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다섯 번의 계약 간격이 계속 단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게이트 신호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김태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위치는?"

"강남 남부. 테헤란로 지하."

"지금 당장 이준호를 격리시켜. 그리고 움직이지 마. 우리가 간다."

김태준이 전화를 끝냈다. 그리고 이한기를 바라봤다.

"출동 준비해. S등급 게이트 긴급 대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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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진의 사무실, 밤 11시 45분

박세진이 이준호의 앞에 앉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금색이었다. 점점 짙어지는 금색.

"이준호. 나 봐."

이준호가 박세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라이라가 뭐라고 했어? 여섯 번째 계약은?"

이준호의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계약하자."

박세진이 이준호의 손목을 잡았다.

"이준호!"

"계약하자. 여섯 번째 계약."

이준호의 손이 박세진을 밀어냈다. 박세진이 뒤로 넘어갔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이준호, 저항해!"

이준호가 창문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이 허공을 그었다. 마나가 흘러나왔다. 황금색. 매서운 추위와 함께.

박세진이 일어섰다. 그리고 이준호를 붙잡으려고 했다.

"이준호!"

하지만 이준호의 손이 박세진을 밀어냈다. 박세진이 책상에 부딪쳤다. 그 순간, 사무실의 조명이 깜빡였다.

"안 돼. 이준호, 제발..."

박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준호는 더 이상 박세진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창 너머, 강남역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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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역 지하도, 밤 11시 47분

지하도는 여전히 붐볐다. 밤이 깊어도 취한 직장인들이 택시를 기다리고, 학생들이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지하도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본 것이다.

강남 남부, 테헤란로 지하 깊숨에 있던 게이트가 현실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지하도 벽면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누군가의 눈처럼.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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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회 본부, 밤 11시 48분

"김태준 부회장! 강남 지역에서 초고강도 마나 폭주가 감지됐습니다!"

"규모는?"

"S등급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동시에 다섯 개 지역에서 같은 규모의 신호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김태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창문으로 나갔다. 서울 야경 너머, 강남 지역 하늘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눈처럼.

"모든 팀을 출동시켜.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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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트랙트 사무실, 밤 11시 49분

유민서가 노트북 앞에서 일어났다. 화면에 그려진 그래프를 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래프는 위아래로 진동했다. 마나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박세진, 이준호 뭐 하는 거야?"

휴대폰 너머에서 박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고 있었다.

"유민서, 더 이상 통제 불능이야. 라이라가 이준호를 완전히 장악했어."

"뭐라고?"

"여섯 번째 계약이 시작됐어. 강남 남부에서."

유민서가 화면을 재계산했다. 간격을 추적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이트 신호 사이: 12분. 두 번째와 세 번째: 6분. 세 번째와 네 번째: 3분. 네 번째와 다섯 번째: 1분 30초.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45초.

간격이 계속 절반으로 단축되고 있었다.

"박세진, 이 속도라면..."

유민서가 계산을 마쳤다.

"30분 안에 일곱 번째 계약이 시작돼. 그 다음엔 15분, 그 다음엔 7분 30초. 마나 폭주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거야. 서울 전역이 영향을 받을 수 있어."

"뭐?"

"이건 더 이상 게이트 문제가 아니야. 이건 현실 자체가 침식되는 거야. 라이라가 이준호를 통해 현실을 먹고 있어."

박세진의 침묵이 흘렀다.

"박세진, 이준호를 멈춰야 해. 지금 당장."

"어떻게?"

"모르겠어. 하지만 계약을 중단시켜야 해. 아니면..."

유민서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아니면 이준호가 완전히 라이라가 돼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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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진의 사무실, 밤 11시 50분

박세진이 이준호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준호의 손이 박세진을 밀어냈다. 박세진이 벽에 부딪쳤다.

"이준호, 제발. 저항해."

이준호가 박세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이제 금색을 넘어 다른 색이 되어 있었다. 마치 현실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색.

"계약하자."

이준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박세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협회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김태준, 이준호를 격리해야 해. 지금 당장. 강제로라도."

"박세진, 우리 팀이 강남 지역으로 출동했어. 게이트 상황이 심각해. 마나 폭주가 계속되고 있어."

"이준호가 여섯 번째 계약을 진행 중이야. 그리고 계약 간격이 계속 단축되고 있어. 30분 안에 일곱 번째 계약이 시작될 거야."

"뭐라고?"

"라이라가 이준호를 완전히 장악했어. 이건 더 이상 통제 불능이야. 이준호를 멈춰야 해."

김태준의 침묵이 흘렀다.

"박세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모르겠어. 하지만 계약을 중단시켜야 해."

"어떻게?"

박세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준호를 바라봤다.

"이준호. 나 봐."

이준호가 박세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자신이 처음에 뭘 원했어? 정말로. 라이라의 욕망이 아니라, 너 자신의 욕망이."

이준호의 몸이 경직됐다. 아주 짧은 순간, 0.3초 정도. 그의 얼굴에 뭔가가 스쳤다. 고통 같은 것. 그것이 금방 사라지자, 박세진은 이제 자신이 본 것이 환각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계약하자."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마나가 흘러나왔다. 황금색. 매서운 추위와 함께.

박세진이 이준호의 손목을 잡았다.

"이준호! 제발!"

그 순간, 사무실의 모든 조명이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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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역 지하도, 밤 11시 51분

게이트가 완전히 열렸다.

강남 남부, 테헤란로 지하. 그곳에 숨겨져 있던 게이트가 현실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지하도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 순간, 서울 전역에서 마나 감지 알람이 울렸다.

협회 본부에서.

메이저 헌팅사 아르테미스에서.

모든 게이트 감시 기지에서.

그리고 이준호의 뇌에서도.

정신이 흐트러졌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이준호가 무릎을 꿇었다.

박세진의 사무실 바닥에.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이준호!"

박세진이 이준호를 안아올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금색이었다. 아니, 금색을 넘어 다른 색이었다.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로.

"뭐... 뭐가..."

손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누구의 손인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찾으려고 했다.

어린 시절. 어디서 뭘 했는지. 누가 자신을 안아줬는지. 누가 자신을 사랑했는지.

모두 없었다.

흑백 영화처럼, 필름이 끊겨 있었다. 그곳에는 오직 금색만 있었다. 라이라의 금색. 라이라의 욕망. 라이라의 의지.

그리고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파도에 잠기는 모래알처럼. 저항했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목소리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누군가..."

이준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두 가지였다. 자신의 목소리와 라이라의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박세진이 이준호를 더 강하게 안았다.

"이준호, 나 봐. 나야. 박세진이야."

"박... 세진?"

이준호의 눈이 박세진을 향했다. 그리고 그 눈에 뭔가가 깜빡였다. 인식. 기억의 편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억.

"맞아. 나야. 이준호, 제발 저항해."

"저... 항할 수 없어요."

"왜?"

"라이라가... 제 모든 걸 가져갔어요. 제 기억도, 제 정체성도, 제 욕망도. 남은 게 뭐가 있어요?"

박세진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뭐였는지... 기억할 수 없어요."

이준호의 눈이 다시 금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짙어지고 있었다.

박세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협회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김태준, 이준호를 멈춰야 해. 아니면 서울 전역이 위험해."

"박세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모르겠어. 하지만 계약을 중단시켜야 해. 라이라를 멈춰야 해."

"라이라가 뭐야? 뭐가 이준호한테 계약을 강요하는 거야?"

박세진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더 이상 이준호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라이라의 문제야. 그리고 라이라는..."

박세진이 입을 다물었다.

"라이라는 뭐야?"

"이준호가 만든 게 아니야. 이준호가 계약한 게 아니야. 라이라가 이준호를 선택한 거야. 왜 이준호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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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회 본부, 밤 11시 52분

김태준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마나 폭주의 패턴. 다섯 개의 게이트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

"이한기, 이게 뭐야?"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자연 현상이 아니야.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종하고 있어."

"이준호?"

"이준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야. 이건 더 높은 차원의 마법이야."

김태준이 휴대폰을 들었다. 박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세진, 라이라가 뭐야? 정확히."

"모르겠어. 하지만 이준호가 계약한 뭔가야. 그리고 그것이 이준호를 통해 현실을 침식하고 있어."

"침식?"

"마나를 먹고 있어. 게이트를 통해. 마치 현실 자체를 먹고 있는 것처럼."

김태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박세진, 이준호를 멈춰야 해. 지금 당장."

"어떻게?"

"모르겠어. 하지만 계약을 중단시켜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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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진의 사무실, 밤 11시 53분

이준호가 일어섰다. 박세진의 팔에서 벗어났다.

"이준호!"

박세진이 이준호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준호의 손이 박세진을 밀어냈다. 박세진이 뒤로 넘어갔다.

이준호가 창문으로 걸어갔다. 손가락이 허공을 그었다. 마나가 흘러나왔다. 황금색. 매서운 추위와 함께.

"이준호, 제발!"

박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준호는 더 이상 박세진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창 너머, 강남역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일곱 번째 계약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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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역 지하도, 밤 11시 54분

지하도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본 것이다. 하늘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마치 누군가의 눈처럼.

그리고 그 눈이 자신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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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회 본부, 밤 11시 55분

"김태준 부회장! 일곱 번째 게이트 신호가 감지됐습니다!"

"위치는?"

"강남 강남구! 그리고 동시에 인천, 수원 지역에서도 신호가..."

김태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든 팀을 강남으로 출동시켜. 지금 당장!"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박세진의 전화였다.

"박세진?"

"이준호가 사무실을 나갔어. 강남역 방향으로."

"뭐라고?"

"라이라가 이준호를 완전히 장악했어. 더 이상 통제 불능이야."

김태준이 창문으로 나갔다. 서울 야경 너머, 강남 지역 하늘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눈처럼.

그리고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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