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퇴고본

새벽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이준호는 압구정동 원룸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협회 긴급 공지문이 손에서 떨어졌다 다시 들렸다를 반복했다.

「미등록 생명체 감지. 관련 인물 조사 중. 신고 요청.」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 떨림이 아니었다. 무감각이었다. 신경이 끊긴 것처럼 손이 움직였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것이 정말 자신의 손일까?

계약 후 사라진 것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얼굴이 흐릿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름을 불렀던 친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 느꼈던 공포가 희미했다. 절망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것은 차갑고 명확한 것들뿐이었다.

라이라.

정령의 이름만 또렷했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눈 뒤에 파란 빛이 깜박였다.

침대 밑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협회 게이트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한 파일이 열렸다. 차트, 좌표, 마나 농도 수치들이 화면을 덮었다. 공식으로 신고된 게이트는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이준호의 눈이 그 사이의 공백을 찾아다녔다.

공백. 협회 감지망에 잡히지 않은 곳.

라이라와의 계약은 단순한 힘의 전달이 아니었다. 이준호는 그 정령의 감각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세상에 드리워진 게이트의 위치를 감지하는 것. 협회가 놓친 것들을 찾아내는 것.

손가락이 지도 위를 미끄러졌다. 강남구 외곽. 분당 경계. 산림 지역.

거기다.

깊은 숨을 들었다. 가슴 안쪽에서 파란 빛이 맥박처럼 고동쳤다.

---

오후 2시 정각. 팬콕 강남점 지하 주차장.

박세진은 검은색 승합차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벌 가문의 서자라는 소문이 있던 E등급 헌터. 박세진은 그를 만난 지 이제 사흘밖에 안 됐는데, 이미 자신의 팀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민서가 계단을 내려왔다. 노트북 가방을 메고 있었고, 얼굴에는 흥분이 소복이 떠 있었다.

"데이터 분석 끝났어요. 제가 감지한 비정상 마나 파동의 근원지가 세 곳이에요. 그 중 두 곳은 협회에 신고된 게이트와 일치하는데..."

"나머지 하나?"

"협회 기록에 없어요."

박세진이 담배를 끼워 물었다. "그곳이 준호가 말한 곳일까?"

차 문이 열렸다. 이준호가 나타났다. 어제와 달라 보였다. 눈빛이 날카로웠고, 움직임이 명확했다.

"분당 외곽이야. 산림 지역이라 협회 정기 순찰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

유민서가 지도를 펼쳤다. GPS 좌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가 맞아요. 제 데이터와 일치합니다."

박세진이 지도를 내려다봤다. 15년 경험이 말해주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게이트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마나 농도가 낮고, 지질이 불안정했다. 협회가 무시할 만한 곳이었다. 그런데 세 사람의 데이터가 일치했다.

"몇 시에 들어갈 거야?"

"해가 질 무렵. 4시간 정도면 충분할 거야."

박세진이 담배를 던졌다. "그럼 장비 점검하자."

---

오후 6시 47분. 분당 외곽 산림 지역.

세 사람은 숲 속 절벽 앞에 서 있었다. 초록색 이끼가 돌을 덮고 있었고, 공기에는 흙 냄새와 습기가 가득했다.

"여기야?"

유민서가 마나 감지기를 들었다. 기계가 울음을 냈다. 울음은 점점 커졌다.

절벽 표면에 금이 생겼다. 아주 미묘한 균열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보였다. 이준호에게는 그것이 명확히 보였다. 라이라의 시선으로.

이준호가 손을 올렸다.

파란 빛이 손가락 끝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차원의 틈을 건드리는 손길이었다.

금이 벌어졌다.

차원의 문이 열렸다.

게이트 내부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천장에서 파란 이끼가 빛났다. 마나 결정의 원석이었다. 바닥에는 크리스탈이 자라나듯 박혀 있었고, 그 사이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었다.

"B등급 게이트."

박세진의 목소리가 낮았다. 현장 경험이 그를 가르쳤다. 이것은 협회 공식 채취지 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게이트 깊숙한 곳에서 울음이 들렸다. 낮고 긴 울음. 생명체의 울음.

그것이 나타났다.

길이 3미터는 족히 넘는 파충류였다. 동굴 박쥐 같은 날개가 있었고, 등 위에는 마나 결정이 자라 있었다. C등급 헌터 정도면 절대 대항할 수 없는 존재. 아니, B등급 헌터도 위험했다.

박세진이 창을 들었다.

"물러서."

이준호가 앞으로 한 발 나갔다.

파란 빛이 손에서 터져 나왔다. 라이라의 힘이 세상에 쏟아져 나왔다. 손가락 끝에서 차원이 갈라졌다. 공기가 굽어졌다. 생명체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자체를 차원 너머로 밀어내는 듯한 힘이었다.

생명체가 멈췄다.

움직일 수 없었다. 라이라의 계약이 그렇게 명령했으니까.

이준호가 손을 모았다. 파란 빛이 생명체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나의 흐름이었다. 생명체 자체가 가지고 있던 차원의 힘이.

마나 결정이 생성됐다.

손가락 크기에서 시작해서 점점 커졌다.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 주먹만 한 크기. 성인 주먹 1.5배.

이준호가 손을 펼쳤다. 빛나는 결정이 손 위에 놓였다. 그것의 품질은 협회 최상급 게이트에서 채취된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더 순수했고, 더 강했다.

박세진의 호흡이 들렸다.

생명체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라이라의 계약이 풀렸다. 생명체는 이제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어 보였다. 에너지가 소진되어 있었다.

"이게 가능해?"

유민서가 중얼거렸다. "품질이... 제 감지기로도 측정이 안 돼요. 상한선을 벗어났어요."

박세진이 천천히 다가왔다. 결정을 들었다. 손에 들린 순간 그의 얼굴이 굳었다.

"이걸로 헌팅사를 시작할 수 있다."

말이 끝난 후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세 사람이 바라본 것은 같았다. 게이트 깊숙한 곳에 반짝이는 크리스탈들. 그곳이 그들의 미래였다.

유민서가 카메라를 꺼냈다. 결정을 찍었다. 각도를 바꿔가며 여러 번 찍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 데이터가 협회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박세진이 유민서를 바라봤다. "등록하지 않은 게이트에서의 무단 채취. 협회법 위반."

"우리는?"

"협회에 신고당한다. 그리고 이 게이트는 협회 소유가 된다."

침묵.

유민서가 다시 말했다. "그럼 우리가 정식으로 헌팅사를 등록하면 어떻게 될까요? 투자자가 있고, 신뢰할 수 있는 헌터 팀이 있으면."

박세진이 이준호를 봤다.

이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재벌 가문이 가진 자산. 이준호는 그것을 쓸 수 있었다. 가족이 반대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손 위의 결정이었다. 그것이 증명하는 것이었다.

E등급은 약하지 않다.

약한 것은 신체일 뿐이다.

"내가 투자한다. 내 가문의 자산으로."

박세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유민서가 노트북에 무언가를 타이핑했다. "헌팅사 이름을 정해야 해요."

"컨트랙트."

이준호가 말했다. 계약. 그것이 이 모든 시작이었다.

---

게이트를 나온 것은 오후 8시 23분이었다.

세 사람은 산림 지역의 임도에 서 있었다. 승합차까지는 아직 500미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이준호는 걸으면서 자신의 머리 안쪽을 더듬었다. 무언가 빠진 것 같았다. 감각이 아니라 기억. 어제 이맘때 자신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누가 전화를 걸어왔는지.

어머니.

그렇다.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희미했다. 말한 내용도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느낌만 남아 있었다. 차갑고 단호한 느낌.

박세진이 옆에서 이준호를 봤다.

"괜찮아?"

"응."

"거짓말 하지 마. 너 표정이..."

"표정이 뭔데?"

박세진이 입을 다물었다. 표현하기 어려웠다. 낯설었다. 어제 본 이준호의 표정과 다른 뭔가가 있었다.

유민서가 뒤에서 따라왔다. "협회에 신고하면 우리가 입을 수 있는 벌칙이 뭘까요?"

"헌터 면허 취소. 불법 채취죄로 벌금과 징역."

"그럼..."

"그럼 정식으로 등록하는 거야. 내일 이 결정을 협회에 제출하고, 헌팅사 설립을 신청한다. 투자자 증명과 대표자 신분증만 있으면 된다."

이준호가 손가락을 탁탁 쳤다. 산림의 어둠이 그 소리를 삼켰다.

"협회가 모르고 있다면, 다른 헌팅사들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겠네."

"정확합니다."

유민서가 노트북을 확인했다. "투자 규모는?"

"50억."

박세진이 멈춰 섰다. "뭐라고?"

"가문의 자산 50억을 헌팅사에 투자한다. 그러면 협회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을 거야."

"네 가족이 동의할 리 없지."

"동의할 필요 없어. 나는 가장 아래가 아니라 가장 아래에서 스스로 일어선 자니까."

밤이 깊어갔다. 산림 지역의 어둠은 가파르고 깊었다. 세 사람의 발소리만 들렸다.

유민서가 마나 감지기를 들었다. 기계가 울었다. 산림 지역 전체가 마나로 진동하고 있었다. 아까의 게이트뿐만 아니라.

"어?"

"뭐야?"

"감지기가... 이 지역 전체에서 마나를 감지하고 있어요. 게이트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유민서가 기계를 돌렸다. 신호음이 여러 방향에서 울렸다.

"더 있어요. 많이."

박세진과 이준호가 서로를 봤다.

이준호의 눈에서 파란 빛이 깜박였다. 라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이 아니라 느낌으로. 차원을 통한 메시지로.

그렇다. 더 많다.

세상 곳곳에 숨어 있다.

협회가 놓친 게이트들이.

이준호의 가슴이 고동쳤다. 그것은 흥분이 아니었다. 무언가 더 깊은 것이었다. 자신이 누가 되려고 했는지를 잊어가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게이트를 장악하는 것. 협회의 독점을 깨뜨리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되찾는 것.

차가운 밤 공기 속에서, 세 사람은 산림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겨진 것은 게이트의 미묘한 파란 빛뿐이었다.

---

헌팅사 '컨트랙트' 설립 신청서는 오후 2시 정각에 협회 민원실에 제출되었다.

이준호는 본인 확인을 마친 후 서류 한 장을 받아 들었다. 접수 번호 2024-00847. 심사 소요 기간 5일.

"심사 중에 혹시 문제가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민원 담당자는 그렇게만 말했다. 특별한 인상은 없었다. 다만 이준호의 이름을 읽을 때,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준호 재벌 가문의 막내, E등급 헌터.

그것이 충분히 독특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이준호는 박세진과 유민서를 만났다. 세 사람은 강남역 지하 카페로 향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대화가 섞여 들릴 가능성이 높았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박세진이 말했다.

"협회 반응이 빠를 거야. 50억이라는 숫자를 본 순간, 이미 어딘가에 보고가 올라갔을 거고."

"메이저 헌팅사들도?"

"당연하지. 이 정도 규모면 협회 내부 누군가가 벌써 연락했을 거다. 너한테 관심이 생겼다는 뜻이야."

유민서가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는 숫자들이 가득했다.

"마나 결정 채취량 분석 완료했습니다. 우리가 어제 가져온 결정들의 총 시장가는 약 12억입니다. 협회 공식 채취물과 비교하면 품질에서 30% 이상 우수합니다."

"30%?"

"네. 같은 무게의 마나 결정이라도, 에너지 응축도가 훨씬 높아요. 이걸 분석하면 기존의 게이트 강화 이론을 완전히 재구성해야 합니다."

박세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인데?"

"협회가 알고 있는 게이트들은 모두 저급 게이트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발견한 게이트처럼 보존 상태가 좋은 고등급 게이트에서는 완전히 다른 마나가 나온다는 겁니다."

이준호가 손가락을 탁탁 쳤다. 카페의 배경음이 그 소리를 삼켰다.

"협회가 모르고 있다면, 다른 헌팅사들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겠네."

"정확합니다."

유민서가 노트북을 돌렸다. 화면에는 지도가 나타났다. 붉은 점들이 여러 개 표시되어 있었다.

"감지기 데이터를 토대로 마나 분포를 매핑했어요. 어제 우리가 발견한 게이트 주변으로 최소 8개 이상의 미등록 게이트가 있습니다."

박세진과 이준호가 화면을 자세히 봤다.

"전국 규모로 보면 추정 300개 이상의 게이트가 협회 감시망 밖에 있습니다."

박세진이 숨을 쉬었다. 길게.

"그 모든 게이트에서 12억 규모의 마나를 채취할 수 있다면?"

"3,600억대의 자산가치."

유민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숫자 앞에서 누구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준호는 창밖을 봤다. 강남역 광장이 보였다. 사람들이 개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 순간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협회의 권력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메이저 헌팅사의 독점이 끝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E등급 헌터 이준호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박세진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해졌어. 5일 안에 협회 심사를 통과하고, 그 사이에 다음 게이트를 정찰한다. 심사 통과 후 첫 정식 채취는 우리가 이미 발견한 게이트들 중 하나를 택한다. 협회의 공식 기록에 남기는 거야. 그러면 이미 우리의 채취 기록이 있으니까, 메이저 헌팅사들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

"그리고?"

"그리고 우리는 빠르게 성장한다. 6개월 안에 중급 헌팅사 규모로. 1년 안에 상급. 2년 안에 메이저."

박세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욕심이 아니었다. 계획이었다.

"이 정도면 협회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어. 그러면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네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헌터가 되는 것도, 협회의 비리를 드러내는 것도, 헌터 계급제를 무너뜨리는 것도."

이준호가 박세진을 봤다.

"좋은 계획인가?"

"아주."

박세진이 손을 내밀었다. 이준호가 그 손을 잡았다. 악수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유민서가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뭐?"

"협회에 정식으로 헌팅사를 등록하면, 우리의 모든 활동이 투명해집니다. 채취 기록, 마나 량, 게이트 위치. 전부."

"그게 뭐하는 짓이야?"

"협회의 감시를 받는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발견한 미등록 게이트들의 위치도 결국 협회에 알려질 겁니다. 공식 채취가 시작되면."

박세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우리가 발견한 게이트의 이점이 사라진다는 건가?"

"아뇨. 다르게 생각해야 해요."

유민서가 손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우리가 먼저 정식 채취를 한 게이트는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 협회 기록에 '컨트랙트'의 채취 현장으로 등록되니까요. 그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나는 법적으로 우리 것입니다. 메이저 헌팅사들이 같은 게이트를 찾아도, 우리가 이미 보유권을 선점한 거니까 침범할 수 없어요."

"선점."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네. 300개의 게이트 중에서 우리가 먼저 발견하고 채취한 것들부터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우리의 '자산'으로 만드는 거예요. 협회도 메이저 헌팅사도 우리를 제지할 수 없게."

박세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웃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있었다.

"그럼 우리는 단순한 헌팅사가 아니라, 게이트 산업 자체를 장악하는 거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협회의 독점 체계를 깨는 건 확실합니다."

이준호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강남역 광장을 지나, 훨씬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세울 미래를. 협회를 뒤흔들 그 미래를.

라이라의 힘으로 차원을 건드릴 수 있다면, 세상 자체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다.

카페에서 나온 후, 세 사람은 헌팅사 사무실로 정할 장소를 찾으러 다녔다. 강남의 건물 한 층을 임차하기로 결정했다. 30평 규모, 월세 800만 원. 박세진이 "이 정도면 협회의 공식 등록도 문제없을 거"라고 말했다.

저녁 8시, 이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5개. 모두 같은 번호였다. 어머니 이혜진의 번호.

콜백은 하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썼다.

"내일 뵐 수 있을까요?"

응답은 3분 만에 왔다.

"압구정 집. 오후 7시."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계약의 후유증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었다.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이 두려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

압구정동 이준호의 집은 강남역에서 차로 15분 거리였다. 40층 타워형 아파트의 35층. 거실 창문으로는 한강이 보였다.

이혜진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은 드레스.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60대였지만 얼굴에는 50대의 엄격함만 남아 있었다.

이준호가 들어서자, 그녀의 눈이 아들을 훑어내렸다.

"너 얼굴이..."

"뭐가?"

"달라졌어."

이준호는 소파 건너편에 앉았다.

"50억이 정말인가?"

"네."

"가문의 자산을 개인 사업에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니?"

"법적으로 제 지분입니다."

이혜진이 진주 목걸이를 다시 만졌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라, 이 가문의 자산이었다. 넌 그걸 잊고 있다."

"신체가 고착되던 날 이미 그 계약은 끝났습니다."

"뭐라고?"

이준호가 어머니의 눈을 맞췄다.

"협회에서 저를 포기했으니까, 저도 가문을 포기했습니다. 50억은 제 것이고, 그 돈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겁니다."

이혜진이 일어섰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온 줄 아니? 할아버지 세대부터 모은 재산이야. 너 혼자의 것이 아니라—"

"그럼 가족이 함께 갈아 마셨던 그 돈도 제 것 아닌가요?"

이준호가 끊어냈다.

"제가 태어나던 날부터 지금까지, 제 몸과 미래에 투자한 그 모든 돈도요."

이혜진이 멈췄다. 아들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느꼈다. 그것은 거부가 아니라 단절이었다.

"넌... 너는 왜 이러니?"

"몰라요."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 몰랐다. 왜 자신이 이러는지. 왜 어머니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 마음에 와 닿지 않는지.

뭔가 빠진 게 있었다. 감정이나 기억이 아니라, 그 감정과 기억을 촉발할 무언가가.

라이라와의 계약이 그것을 가져갔다.

"헌팅사가 성공하면, 제가 벌어들인 돈으로 가족에게 보답하겠습니다."

"보답?"

이혜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이미 가족이 아니라 거래처가 되어가는 거구나."

이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대답하려다 멈췄다. 침을 삼켰다. 눈을 깜박였다. 그 모든 것이 길게 이어졌다. 어머니의 말이 정확히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일 협회에 헌팅사 설립을 정식으로 등록합니다. 심사가 통과되면 1주일 후부터 정식 활동을 시작합니다. 가족을 걱정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걱정?"

이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너 따위가 아니야. 내가 걱정하는 건 이 가문의 미래야. 너 같은 녀석이 그것을 파괴하는 게 걱정되는 거지."

이준호가 일어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다려."

이혜진이 손을 들었다.

"너 계약 마법이라는 거, 협회가 뭐라고 했니?"

이준호가 멈춰 섰다.

"조사 중이라고."

"그래. 넌 모르겠지만, 나는 협회에 연락이 왔어. 너 같은 능력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고. 그리고 그걸 '금지된 마법'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있다고."

"금지된 마법?"

"사라진 마법이야. 너무 위험해서 인류가 봉인해놓은 기술. 그런 게 너한테 있다고 협회가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야."

이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럼 협회가..."

"너를 조사할 거지. 심사 기간 동안 넌 협회의 감시 대상이 될 거야. 헌팅사 등록은 통과할 테지만, 그 대신 모든 활동이 투명해질 거고, 언제든 조사 대상이 될 수 있어."

이혜진이 거실 창문으로 바라봤다. 한강의 야경이 반짝였다.

"넌 이 가문을 버리고 싶었어. 좋아. 그럼 이 가문도 너를 버리자. 하지만 기억해둬. 넌 이제 혼자야. 협회의 적이자, 가문의 부담이 된 존재가 되었어."

이준호가 집을 나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봤다. 떨리지 않았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어머니와의 단절 앞에서도 자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라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원 너머에서.

계약이 깊어지고 있다고.

너는 너가 아니게 될 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진행되어야 한다고.

그 목소리 속에서, 이준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

협회 심사 결과는 5일 후에 나왔다.

승인.

이유는 단순했다. 투자 규모 50억, 투자자 신원 이준호 재벌 가문의 막내, 대표자 신원 조회 완료, 추가 조사 항목 없음.

협회는 공식적으로 '컨트랙트'의 설립을 승인했다.

하지만 그 승인장 뒤에는 다른 문서가 붙어 있었다.

"특별 감시 대상 지정"

이준호는 협회 민원실에서 그 문서를 받아 들었다. 담당자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준호의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을 뿐이었다.

건물 밖에서 박세진과 유민서를 만났다. 박세진의 얼굴에는 기쁨이 있었지만, 유민서의 얼굴에는 불안이 있었다.

"감시 대상?"

유민서가 문서를 읽었다.

"헌팅사의 모든 활동이 협회에 보고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게이트 위치, 채취량, 팀 구성. 전부."

"그게 뭐하는 짓이야?"

박세진이 화를 냈다.

"우리가 미등록 게이트를 찾으면 협회에 신고해야 한다는 건가?"

"아뇨. 신고의 의무는 없습니다. 대신 우리의 모든 활동이 협회에 기록된다는 뜻이에요. 언제든 조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유민서가 이준호를 봤다.

"협회가 뭔가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계약 마법에 대해."

이준호는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경고가 떠올랐다. 금지된 마법. 역사상 없었던 능력.

박세진이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

"응. 다만..."

이준호가 두 사람을 봤다.

"우리는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협회가 의심하기 전에, 우리가 이미 충분히 강해져야 한다."

"얼마나 빨리?"

"1주일."

박세진의 눈이 반짝였다.

"1주일 안에 우리의 첫 정식 채취를 끝낸다. 협회에 기록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서 있게 돼."

유민서가 노트북을 켰다. 지도 위의 붉은 점들이 떠올랐다.

"게이트 정찰은 언제부터?"

"내일."

이준호가 말했다.

"내일부터 우리는 협회의 감시망 안에서, 그들을 피해 움직인다. 게이트를 찾고, 채취하고, 성장한다."

"그게 가능한가?"

박세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니까."

세 사람은 협회 건물을 나갔다. 뒤에 남겨진 것은 승인장과 감시 대상 지정 문서, 그리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무언가였다.

이준호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라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원 너머에서.

다음 계약이 준비되고 있다고.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 후에 무엇이 남을지는, 그도 모른다고.

밤하늘 아래,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게이트들이었다.

그리고 그 게이트들의 입구에서, 누군가는 깨어나고 있었다.

계약 마법의 진정한 정체를 가진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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