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밤 11시 3분. 강준의 책상 위에는 정리되지 않은 보고서 더미가 쌓여 있었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화면에 떠 있는 문장은 5분째 변하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봤다. 다시 봤다. 손목을 돌려 화면을 밝혔다. 11시 3분. 정확히 3분이 지났다.
수현이가 올 시간이다.
이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3주를 넘게 이 시간을 기다려온 것 같지 않았다. 3년, 아니 30년을 기다려온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 심장이 규칙적인 박동을 잃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강준은 화면을 재빨리 닫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기다렸다. 이미 충분히 망가졌다. 돌아보는 것만 남았다.
"팀장님."
이수현이 삼각김밥 한 개를 들고 서 있었다. 평소처럼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눈 언저리가 부어 있었다. 언니와 싸웠던 것 같다. 강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 때문이겠지. 자신 때문에 이 아이가 언니와 싸우고 있다.
"앉아."
"팀장님, 저 먼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수현이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앉지 않았다. 강준은 천천히 일어섰다. 맞은편에 서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팀장님이 제 인턴십을 연장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로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아니에요. 팀장님이 조직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거 알아요. 영희 과장 얘기도 들었고, 경영진의 질책도 들었어요."
수현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팀장님이 저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싫어요."
강준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 문장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팀장님, 저도 팀장님을 좋아해요."
그 말이 나왔을 때, 강준의 숨이 멎었다. 3주간 기다렸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오는 말이 더 크게 들렸다.
"하지만 저는 팀장님의 약이 되고 싶지 않아요."
강준이 눈을 깜빡였다. 수현이는 계속했다.
"팀장님이 저 때문에 변했다고 생각하셨나요? 틀렸어요. 팀장님이 스스로 변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저는 그냥… 팀장님이 변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옆에 있었던 거예요."
"그럼 우리는?"
강준이 물었다. 목소리는 어디서 나온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팀장님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함께했던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수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팀장님, 저도 제 인생이 있어요. 내년 봄에 대학원에 들어갈 거고, 공부하면서 제 전공으로 일하고 싶어요. 팀장님의 감정 표현 도구가 되고 싶지 않아요. 매일 밤 11시에 팀장님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아요."
강준은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것은 거절이 아니었다. 거절이라면 냉정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었다. 자신을 사랑하되, 자신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 사랑.
"팀장님, 저는 팀장님을 사랑했지만, 저는 저를 더 사랑해요."
그 말이 나올 때, 강준의 목이 메었다. 눈물이 맺혔다. 손이 떨렸다. 무너지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무언가에서 해방되는 느낌. 둘 다였다.
"이제 혼자 감정을 돌볼 수 있어요? 제가 없이도?"
수현이가 물었다. 그 질문 앞에서 강준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배워야 할 것 같아."
"네. 그래요. 팀장님은 배워야 해요."
수현이는 삼각김밥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제 마지막이에요. 팀장님이 혼자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수현아."
강준이 그렇게 부르자, 수현이는 일순간 표정이 흔들렸다. 그 표정을 봤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멈췄다. 손을 뻗으면 안 되는 것을 알았다. 손을 뻗으면 그녀가 다시 돌아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마워."
그것이 강준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었다.
수현이는 돌아섰다. 사무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강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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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은 혼자 남았다. 책상 위의 삼각김밥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손을 뻗는 것이 그 음식을 더럽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수현이가 남긴 마지막 것이었다.
사무실의 형광등이 울렸다. 차갑고 희디흰 빛. 3주 전까지 강준은 이 빛이 편했다. 이 빛 아래에서는 감정이 필요 없었다. 성과만 필요했다. 보고서만 필요했다.
지금 이 빛은 너무 차가웠다.
강준은 컴퓨터를 켰다. 화면에 뜬 문장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5분이 아니라 30분이 지났는데도 움직이지 않은 문장들.
그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런데 손가락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감정이 완전히 빠져나간 자리에 무언가 찬바람이 불어오는 느낌.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밤이 깊어졌다.
보고서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 강준은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창밖으로는 서울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 그곳에는 별이 없었다. 도시의 불빛이 별을 삼켜버렸다.
수현이는 이 별 없는 밤하늘 아래에서 자신을 떠났다.
강준은 핸드폰을 집었다. 이서의 연락은 없었다. 수현이의 메시지도 없었다. 박민준의 톡도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이서의 연락처를 눌렀다. 화면이 밝혀졌다.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내렸다. 지금은 아니었다. 이 밤을 혼자 견뎌내야 했다.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키보드 위에 놓아뒀던 삼각김밥은 식어 있었다. 강준은 그것을 집어 들지 않았다. 남겨진 것을 남겨두기로 했다. 그것도 배우는 과정의 일부였다.
사무실의 불을 껐다.
텅 빈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가 자신을 따라왔다.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발소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작은 '딩' 소리. 문이 열렸다. 닫혔다. 내려갔다. 로비에 도착했다.
강준은 건물을 나왔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차갑고 밝았다. 별은 없었다. 도시의 불빛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래도 하늘을 바라봤다.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없었다.
걸었다. 방향 없이. 거리의 편의점은 아직 열어 있었다. 삼각김밥, 도시락, 따뜻한 음식들. 수현이가 자신을 위해 들고 왔던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강준은 그것을 지나쳤다.
강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서였다.
"이 시간에 왜 깨어 있어?"
"자고 못 했어."
음성 통화였다. 목소리로 뭔가를 전하려는 것처럼.
"수현이는?"
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 알겠다."
이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슬픈 웃음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혼자."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준은 알았다. 수현이가 떠났다는 것. 자신이 선택한 길이 결국 혼자가 되는 길이라는 것. 이서도 이미 떠났다는 것.
"모르겠어."
"네. 모르겠겠지."
이서의 목소리가 진정되어 있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다른 감정으로.
"강준아. 넌 이제 누구를 위해서도 야근하지 마.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야근하지 마. 그냥... 자고."
"응."
"진심이야?"
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말을 들었다. 이서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통화가 끝났다. 강준은 거리를 계속 걸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검은 하늘. 그곳에 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면.
그런 곳이 있을까?
강준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름이 자신을 조금 더 가볍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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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다.
강준은 사무실에 있지 않았다. 집에 가 있었다. 작은 오피스텔. 밤샘 작업의 흔적이 어디든 있는 공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 메시지도 없었다. 누군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이 시간에 혼자인 것이. 3주를 넘게 매일 밤 11시를 수현이와 함께했다. 그 시간이 일상이 되었다. 그 시간이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되었다.
이제 그 시간은 공허했다.
강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지 않았다. 다만 비어 있었다. 누구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손.
핸드폰을 집었다. 수현이의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그것을 바라봤다. 누르지 않았다. 누를 이유가 없었다.
강준은 일어났다.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었다. 비어 있었다. 수현이가 챙겨주던 음식들이 없었다. 당연했다. 이제 올 이유가 없으니까.
다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별도 없고, 누군가도 없고, 기억도 없었다. 아니, 기억은 있었다.
'팀장님, 저는 팀장님을 사랑했지만, 저는 저를 더 사랑해요.'
그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해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지금은 상실만 느껴질까. 왜 이 시간이 이렇게 길까.
강준은 노트북을 켰다. 박민준이 보낸 자료들을 확인했다. 영희 과장이 재검토를 요청했던 것들. 손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한 줄을 읽었다 지웠다. 다시 읽었다 지웠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았다.
강준은 노트북을 껐다. 수현이의 말이 떠올랐다. '팀장님은 배워야 해요.' 일로 채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이 밤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렀다. 누구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밤에.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 반복했다.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누군가 없이, 혼자,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안아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것. 이 밤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견뎌내는 것.
밤 12시.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강준은 눈을 떴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화면에 박민준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침 회의 준비 안내. 일상적인 메시지였다. 강준은 그것을 읽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첫 번째 밤이 지나갔다.
수현이 없이 견딘 첫 번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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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왔다. 창밖으로 해가 떠올랐다. 약한 빛이 침대 위에 내려앉았다. 강준은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이 바닥에 닿았다. 서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피곤했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핸드폰을 집었다. 박민준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내가 회의 자료 다시 검토해서 아침 8시까지 보낼게.'
보내고 나니 손이 덜 떨렸다.
강준은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몸을 적셨다. 그는 눈을 감았다. 물이 얼굴을 흘렀다. 눈물인지 물인지 알 수 없었다.
나와서 옷을 입었다. 부엌에서 간단히 밥을 먹었다. 냉장고에 남아 있던 계란과 밥. 수현이가 챙겨주지 않은 음식. 자신이 챙긴 음식.
그것을 먹으면서 강준은 생각했다. 내일도 이렇게 해야겠다고. 그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노트북을 켰다. 자료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번엔 다르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손. 그것이 조금 더 가벼웠다.
시간이 흘렀다. 오전 7시 50분. 강준은 검토를 마쳤다. 박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료 정리 완료. 회의실에서 봐.'
메시지를 보내고 강준은 일어났다. 옷을 정리했다. 가방을 챙겼다. 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거리로 나왔다. 아침 햇빛이 따뜻했다. 사람들이 출근하고 있었다. 강준도 그들 사이에 섞여 걸었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라갔다. 문이 열렸다.
박민준이 서 있었다.
"팀장님! 자료 받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워. 수고했어."
강준은 박민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박민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팀장님, 요즘 어때요? 괜찮으세요?"
그 질문에 강준은 잠깐 멈췄다. 박민준의 눈을 봤다.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응. 괜찮아. 이제 시작이야."
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이해한 표정이었다.
"네. 팀장님이라면 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듣고 강준은 웃음이 나왔다. 작은 웃음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어제 남겨뒀던 삼각김밥은 없었다. 누군가 치워둔 것 같았다. 아마 박민준이겠지.
강준은 컴퓨터를 켰다. 오늘의 일정을 확인했다. 회의. 보고서. 검토. 평범한 하루였다.
그리고 그것이 좋았다.
밤 11시가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수현이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혼자여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강준은 이제 알았으니까. 혼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