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정각, 강준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보고서가 쌓여 있었다. 차트와 수치들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평소라면 새벽까지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당연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한영희 과장이었다.
"강준, 내일 경영진 보고 자료 준비 어디까지 됐어?"
"네, 과장님.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래야지. 이번 분기 성과가 중요한데, 실적 부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건지 미리 생각해둬. 경영진들이 물어볼 거야."
통화가 끝났다. 강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예상은 했지만, 현실로 마주하니 다르다. 실적 하락의 책임. 팀 평가의 하락.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11시 02분.
강준은 손을 멈췄다.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려오는 충동을 견디며 모니터를 끄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결연함도 없이. 발을 움직였다. 사무실의 불을 끄는 손가락이 떨렸다. 습관처럼 다시 켜려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폰을 들었다. 수현이의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읽지 않았다. 대신 이서에게 말을 걸었다. 키보드를 눌렀다. 지웠다. 다시 눌렀다.
'이서, 정말 미안해.'
손가락이 멈췄다. 이 말이 맞나. 이 말이 충분한가. 강준은 계속 눌렀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하지만 난 변하고 있어. 그리고 넌 날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얼마나 느리게 변하는지도 알 거야.'
송신. 화면에 '전송됨'이 떴다.
이서는 읽음 표시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준은 그것이 거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0년을 함께한 사람이 하는 침묵의 언어를 이제야 배우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강준은 박민준을 봤다. 신입 때부터 그를 따라 야근했던 후배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박민준, 가."
"어? 팀장님, 아직 할 게…"
"가. 내일은 더 일찍 와. 그리고 넌 충분히 쉬어야 해. 그게 더 나은 일을 하는 방법이야."
박민준이 놀라서 바라봤다. 강준은 그 시선을 견딜 수 있었다. 이것이 변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민준이 짐을 챙기고 나가자, 강준은 사무실을 둘러봤다. 다른 팀들의 불도 대부분 꺼져 있었다. 조직 문화는 천천히, 정말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혼자 남은 사무실은 조용했다. 강준은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모니터를 켰다. 이번엔 일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앉아 있기 위해서였다.
11시 15분.
수현이는 오지 않았다.
강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밤 삼각김밥과 함께 떠난 그 순간, 이 밤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손가락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수현이에게 문자를 칠 뻔했다. 그만뒀다. 이것이 성장이다. 강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혼자가 되는 것의 공포가 밀려왔다. 수현이 없이, 이서 없이, 누군가의 돌봄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가빠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하지만 강준은 그 떨림을 느낀 채로 계속했다.
"고마워, 수현. 그리고 안녕."
목소리가 떨렸지만, 강준은 멈추지 않았다.
"넌 날 깨웠어. 그리고 넌 옳았어. 내 약이 되지 않기로 한 그 선택이. 난 혼자 이걸 배워야 하는 거야."
사무실의 형광등이 강준의 얼굴을 비췄다. 거울처럼 작동하는 검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래도 계속 말했다.
"너 잘했어."
이 말을 누구에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성공만 강요했고, 이서는 일방적인 돌봄만 줬고, 수현이는 자신이 변하길 원했다. 그래서 강준은 자신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너 정말 잘했어, 준."
명백한 변화였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이렇게 필요한 것이라니. 30대 팀장은 그제야 깨달았다. 모든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야근 기록도, 실적도, 효율성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 순간이.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수현'이라고 떴다.
강준의 손이 멈췄다. 신기루인가. 아니다. 진동이 계속됐다. 답할 시간은 5초. 4초. 3초.
강준은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기다렸다. 곧, 톡 알림이 울렸다.
'팀장님, 언니가 말했어요. 팀장님이 변하고 있다고. 그리고 난 그걸 보고 싶어요. 앞으로도. 하지만 팀장님 옆에가 아니라, 제 인생 속에서요. 화이팅!'
강준의 입이 올라갔다.
웃음이었다. 진정한 웃음. 눈가에 수분이 맺혔지만, 그것을 닦지 않았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다. 눈물도 웃음도, 모두 자신의 일부였다. 그것을 느끼고,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혼자 감정을 돌보는 법이었다.
강준은 천천히 타이핑했다.
'고마워, 수현. 너의 인생을 응원할게. 그리고 난 내 인생을 살게. 우리 모두 잘될 거야.'
송신.
사무실의 불을 껐다. 이번엔 돌아보지 않았다.
밤거리로 나온 강준은 별을 찾았다. 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서울의 밤하늘은 주황색이었다. 하지만 강준은 괜찮았다. 별이 없어도, 누군가가 옆에 없어도, 자신 안에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빨간불이었다.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중년 여성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세요?"
강준은 웃었다.
"집이요."
"이 시간에 집? 아, 야근 끝나는 거구나. 고생하셨어요."
낯선 사람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고생을 봐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신호가 바뀌었다. 강준은 건넜다. 여성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밤 12시 37분.
오피스텔 앞이었다. 강준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자신의 집은 14층이었다. 이전엔 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일 생각을 했다. 내일 보고서, 팀 일정, 성과 목표.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엘리베이터의 움직임을 느꼈다.
14층. 문이 열렸다.
집에 들어간 강준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천장은 여전히 흰색이었다. 하지만 그 위에 뭔가가 보였다.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의 존재가 느껴졌다.
휴대폰이 울렸다. 밤 12시 52분. 이서였다.
"너 지금 집?"
"응."
"좋아.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 넌 정말 변했어. 준."
강준은 웃음이 나왔다.
"아직 시작이야. 이서."
"알아. 그래도 난 믿을게. 잘 자."
"너도. 그리고 이서, 정말 고마워."
전화가 끝났다. 강준은 눈을 감았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의 약이 아닌, 자신의 속도로.
밤 1시 30분.
강준은 깼다. 휴대폰의 불빛이 얼굴을 비췄다. 메시지 알림이었다. 발신자는 이수현.
'팀장님, 혹시 깨셨어요? 나 지금 언니랑 얘기했어요. 팀장님이 이제 야근을 안 하신다고. 그리고 팀장님이 저한테 보낸 카톡도 봤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저도 변했어요. 제 인생을 더 사랑하게 됐어요. 팀장님 덕분에.'
강준은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웃었다. 처음으로, 진정한 웃음이.
그는 천천히 타이핑했다.
'고마워, 수현. 그리고 미안해. 넌 내 약이 아니었어야 했는데. 이제 넌 너의 길을 가. 나도 내 길을 가겠어.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잘 살자.'
송신.
강준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번엔 천장을 보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호흡만 들었다. 자신의 심장만 들었다. 맥박이 고르게 뛰었다.
밤은 계속됐다. 하지만 강준은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일 경영진 보고에서 자신의 책임을 설명해야 했다. 팀의 평가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실적 부진에 대한 질문이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밤 2시 15분.
강준은 사무실에 들어섰다. 밤의 사무실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의 책상에 앉아 강준은 보고서를 펼쳤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했다. 시계를 봤다.
"2시간이면 충분해."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처음처럼.
손가락이 움직였다. 야근의 신이라고 불리던 강준이었지만, 이번엔 목표가 분명했다. 정확하게, 효율적으로. 그리고 '완벽함'이 아닌 '충분함'의 기준으로.
밤 3시 45분.
보고서가 완성됐다. 강준은 파일을 저장하고, 화면을 껐다. 그리고 자신을 봤다. 모니터에 비친 30대 팀장의 얼굴은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그것은 야근으로 인한 피로감이 아니라, 선택으로 인한 성취감이었다.
"너 잘했어."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조금 더 확실하게.
사무실의 불을 껐다.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봤다. 이 공간에서 수현을 기다렸던 그 의자, 그 책상, 그 창문. 모든 것이 추억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과거였다.
밤 4시 12분.
강준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밤거리는 더욱 고요했다. 새벽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는 그냥 걸었다.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길 위에서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