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15분, 사무실 문이 열렸다.
한영희 과장이 보고서를 들고 들어왔다. 강준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손은 키보드 위에 멈춰 있었다.
"팀장님."
"네."
"이거 봤어요?"
보고서가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강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영희의 얼굴에는 화가 가득했다.
"실적이 10% 떨어졌습니다. 지난주 비교해서요."
"네."
"3주 전만 해도 우리 팀이 마케팅 부서 1위였어요. 지금은 3위예요. 3위."
강준은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정확했다.
"이건 팀장님이 야근을 줄이면서 생긴 결과입니다. 신입 직원 때문에 팀 전체가 혼란스러워하고, 효율성이 떨어진 거예요. 경영진도 이미 눈치를 챘어요."
강준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야근 문화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게 우리 팀의 경쟁력이거든요. 신입 직원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조직 전체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강준의 손가락이 보고서를 집어쥐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아니습니다."
영희의 눈이 벌어졌다.
"뭐가?"
"야근 문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강준은 천천히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3주 전 저희 팀이 1위였던 건 야근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전략과 실행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실적이 떨어진 건 방향 설정의 문제지, 야근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강준은 한 번 숨을 쉬었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잃을지 알았다. 경영진의 신뢰. 한영희 같은 중간관리자들의 지지. 조직 내에서의 안정적인 위치. 하지만 그것들을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계속 잃어가는 것이었다. 수현을 잃고, 이서를 잃고, 결국 자신의 모습까지 잃는 것.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겠습니다. 팀원들을 위한 교육도 진행하겠습니다. 야근 없이도 실적을 낼 수 있는 방식을 만들겠습니다."
강준은 보고서를 영희에게 돌려주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밤 11시 이후 야근 금지 정책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팀원에게 통보하겠습니다. 그리고 실적 부진의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영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준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이건..."
"제 결정입니다."
영희는 보고서를 들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강준은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키보드를 누르려고 해도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조직 내에서 자신의 위치였는지, 아니면 다른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이었다. 해방감이었다. 죄책감이었다. 셋 다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서였다.
강준은 전화를 받았다.
"강준, 나랑 헤어지는 거야?"
목소리가 작았다. 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그럼 수현이랑 사귀는 거야?"
"아니야."
침묵이 흘렀다. 강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럼 뭐야? 넌 나를 선택해야 해. 나? 아니면 그 애?"
강준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도 열리지 않았다.
"강준. 말해."
"...이서."
"뭐?"
"미안해. 진짜로."
"미안해? 그게 뭔 소리야?"
"20년을 함께했는데 난 너를 짐으로만 봤어. 그걸 이제 깨달았어."
이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음이 섞여 있었다.
"20년이야, 강준. 20년을 같이 있었는데 넌 나를 본 적이 없다고?"
강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20년.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이 이서에게 해준 게 무엇인가. 함께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말을 걸었지만 듣지 않았다. 손을 잡았지만 느끼지 않았다. 그것이 강준의 죄였다.
"수현이한테는 3주 만에 무릎을 꿇잖아. 3주야. 왜 나한테는 20년을 가지고도 한 번도 눈을 맞춰주지 않았어?"
"이서..."
"넌 나를 선택해야 해. 지금 당장. 아니면 끝이야."
전화가 끊겼다.
강준은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화면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안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얼굴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눈도, 입도 움직이지 않았다.
밤 11시 30분.
박민준이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 들어가도 돼요?"
"응."
박민준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손에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눈 아래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이거... 마감이 내일 자정이거든요. 그런데 자료가 부족해서..."
"야근 하지 마."
"어?"
"내일 아침에 다시 하자."
박민준이 멈췄다.
"그럼... 저 영희 과장한테 뭐라고 들으면서 참아야 해요?"
강준은 박민준을 봤다. 박민준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있었다. 그 아래는 공포였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포.
"내가 책임진다."
"팀장님..."
"야근하지 마. 그게 내 지시다."
박민준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존경이 의심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갔다.
강준은 혼자 남았다. 시계를 봤다. 밤 11시 45분.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형광등의 불빛만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강준의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고서도, 노트북도, 그 어떤 것도.
밤 11시 50분.
휴대폰에 카톡이 왔다.
'팀장님, 언니가 뭐라고 해서 오늘은 못 갈 것 같아요. 미안해요.'
강준은 화면을 봤다. 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수현의 언니가 그녀를 지키고 있다. 강준 같은 남자로부터.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남자로부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밤 11시 55분.
강준은 여전히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책상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야근할 것도, 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왜 남아 있는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강준은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 대답이 무서웠다.
밤 12시.
사무실의 불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강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팔도, 다리도 떨리고 있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시야가 좁혀왔다. 가슴이 무거웠다. 그것을 멈추려고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조직은 자신을 필요로 했다. 야근 문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실적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 신입 직원 때문에 팀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서는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했다. 20년을 함께했다고 했다. 왜 수현에게는 무릎을 꿇냐고 했다.
강준은 선택할 수 없었다. 이서를 선택하는 건 거짓이 될 테니까. 20년을 함께했지만, 강준은 이서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수현을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강준이 할 수 있는 건 다른 선택을 하는 것뿐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택하는 것.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선택을. 그것만이 이서에게도, 수현에게도 더 정직한 것이었다.
수현은 오지 않았다.
강준은 혼자였다. 사무실 안에서, 야근의 불빛 아래서,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밤 12시에.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밤 12시 5분.
강준은 일어섰다.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닫고, 펜을 모았다. 자신이 이곳에 앉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근할 일도 없었고, 기다릴 사람도 없었다. 그저 공허함만 남아 있었다. 그 공허함이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엘리베이터 앞에서 강준은 멈췄다. 휴대폰을 꺼냈다. 이서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까. 아니면 수현에게 답장을 해야 할까.
결국 둘 다 하지 않았다.
밤 12시 20분. 강준은 집에 도착했다. 거실 소파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또는 모든 것이 생각났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서였다.
"뭐?"
"강준, 나 이제... 진짜 끝내는 거야."
"...응."
"아니, 뭔 응이야. 내가 뭐라고 했는데?"
"이서, 미안해."
"미안한 게 뭐야! 나한테 미안한 거야? 아니면 수현이 때문에 미안한 거야?"
"그게... 다른 거 같아."
침묵이 흘렀다.
"강준, 넌 나를 선택하지 않았어. 그게 최종 답변이야?"
"...응."
"그리고 수현이 애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 같은 사람을 밟지는 마. 알겠어?"
"미안해."
"미안은 이제 필요 없어. 잘 살아. 강준."
전화가 끊겼다.
강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강준은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한영희 과장이 이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장은 서류 폴더를 들고 있었다. 표정은 험했다.
"팀장님, 어제 경영진과의 통화 내용 확인하셨나요?"
"아니요."
"실적이 30% 떨어졌습니다. 야근 감소 정책 때문입니다."
강준은 책상에 앉았다. 한영희 과장을 봤다.
"그건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요?"
"야근 감소가 실적 저하의 원인이 아닙니다."
한영희 과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차가운 웃음이었다.
"그럼 뭐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세요? 신입 직원의 간섭? 팀장님의 정신 상태?"
강준의 얼굴이 굳었다. 어제 밤 새벽까지 그는 실적 저하의 원인을 분석했다. 야근 감소는 표면적 원인일 뿐이었다. 진짜 문제는 팀원들이 새로운 업무 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영희 같은 중간관리자들이 팀원들에게 여전히 야근을 강요했고, 팀원들은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박민준 같은 신입들은 야근을 하지 말라는 지시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것이 실적 저하의 진짜 원인이었다. 그리고 강준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도 외면했다.
"팀 전체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를 설명하고, 팀원들의 혼란을 해소하겠습니다."
"뭐라고요?"
"야근 문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혼란을 겪는 팀원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한영희 과장은 강준을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는 모욕이 있었다.
"팀장님, 이건 S그룹의 전략입니다. 헌신과 열정의 문화죠. 그걸 바꾼다고요?"
"네,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뀜의 책임은 누가 질 것 같은데요?"
"제가 질겠습니다."
한영희 과장은 서류를 강준의 책상에 던졌다. 종이가 흩어졌다.
"좋습니다. 그럼 이 실적 부진의 책임도 팀장님이 지시겠네요. 인사평가에 반영되겠습니다."
그리고 나갔다.
강준은 흩어진 서류를 봤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결단의 떨림이었다.
박민준이 들어왔다. 표정이 불안했다.
"팀장님, 영희 과장이..."
"박민준."
"네?"
"야근하지 마. 계속."
"팀장님, 제가..."
"내 지시다."
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있었다. 존경이 동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조직이 강준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넌 망했어. 이제 끝이야.'
오후 3시.
강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이수현에게 답장을 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수현의 언니가 그녀를 지키고 있다. 강준은 그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 대신 강준은 인사팀 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수현 신입의 인턴십 연장을 추천합니다. 실력이 뛰어납니다.'
그 문자를 보내는 순간, 강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차이를.
밤 11시.
강준은 여전히 사무실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야근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앉아만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수현이었다. 전화였다.
"팀장님?"
"응."
"제가... 언니 말을 좀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인턴십 연장 때문에 너무 많이 신경 써주셨는데, 좀... 시간이 필요해요. 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요."
강준은 수현의 말을 이해했다. 그것은 거절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거절은 아니었다.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강준은 지금 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겠어."
"그리고 팀장님도... 제 말은 아니지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팀장님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요."
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팀장님, 우린... 괜찮을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그 대답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해줄 거 같아."
전화가 끊겼다.
강준은 건물을 나갔다. 밤하늘을 봤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이 별을 집어삼켰다.
밤 12시. 사무실 불이 꺼졌다. 처음으로.
그렇게 강준은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단지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