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 11시 정각. 강준의 책상 위 시계가 울렸다.

이수현이 들어올 시간이었다. 하지만 책상 서랍은 이미 비어있었다. 어제 밤, 강준은 이서와의 대화를 모두 버렸다. 삼각김밥 봉지들을 하나하나 집어 던졌다. 종이 위에 맺힌 기름 자국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마치 그 3주간이 없었던 일처럼.

"팀장님."

이수현이 들어섰다. 손에는 도시락이 없었다. 표정도 밝지 않았다.

"어제는 뭐... 그런 말씀을 하시고."

이수현이 책상 앞에 섰다.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말투도 달랐다. 조심스러웠다.

강준이 눈을 들었다. 3주간 그를 기다려온 시간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서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싫은 사람이세요?"

강준이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이서는 20년이었다.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좋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사이의 무언가였다. 책임이었다. 미안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의 고통이었다.

"팀장님이 결정해야 해요."

이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이 간단했다. 하지만 그 간단함이 강준의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가졌다. 결정. 선택. 그것은 누군가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너는?"

강준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저는... 팀장님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했어요. 어제도. 그런데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무서워요."

"무서워?"

"네. 팀장님 때문에 뭔가를 선택하고 싶지 않아요."

이수현이 돌아섰다. 떠나기 직전, 그가 덧붙였다.

"팀장님이 혼자 결정하세요. 저 때문이 아니라."

사무실 문이 닫혔다.

강준은 책상에 팔을 올렸다. 얼굴을 묻었다. 손이 떨렸다.

---

아침 7시 30분. 박민준이 들어왔다.

팀원들이 도착하기 전, 그는 항상 강준을 찾았다. 이제는 야근이 없었으니까. 그 시간을 이용해 보고서를 정리하거나, 개인 업무를 봤다. 하지만 오늘 표정이 달랐다. 뭔가를 결정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팀장님, 한 가지 묻고 싶은데요."

"뭐."

"저도 이제 야근 안 해도 돼요?"

강준이 고개를 들었다. 박민준의 눈이 진지했다. 3주간 강준이 야근 시간을 줄이면서, 박민준도 함께 줄었다. 하지만 그것이 선택이 아니라 따라온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직의 문화란 그런 것이었다. 위가 움직이면 아래가 따른다.

"응."

강준이 대답했다.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돌아섰다가 멈췄다.

"팀장님, 한 가지 더요."

"뭐냐."

"한영희 과장이 어제 제게 물었어요. 팀장님이 야근을 줄인 이유가 뭐냐고. 저는 잘 모른다고 했는데..."

박민준이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했어?"

"한영희 과장이 말했어요. 이렇게 가면 팀 전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특히 신입이 야근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생기면 조직 전체가 흔들린다고."

강준이 침묵했다. 박민준은 계속했다.

"그리고... 경영진에 보고할 거라고 했어요."

박민준이 나갔다.

그 순간 강준은 깨달았다.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흔드는지. 박민준은 강준 때문에 야근을 줄였고, 이제 그것이 조직 전체의 문제로 번지고 있었다. 한영희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강준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가 아니었다. 조직 전체의 구조를 바꾸려는 시작이었다.

---

오전 9시 회의실.

한영희 과장이 들어왔다. 폴더를 들고 있었다. 표정이 차가웠다.

"팀장님,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데요."

"뭔가."

"지난 3주간 팀 전체의 야근 시간이 30% 감소했습니다. 이게 의도된 정책인가요?"

강준이 대답했다.

"맞다."

한영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과가 저하될 수 있습니다. 대책이 있으신가요?"

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책이 없었다. 있는 것은 확신뿐이었다. 이것이 맞다는 확신. 하지만 그 확신이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이 조직에서는 설득력이 없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한영희가 돌아섰다. 입술이 일직선이 되어 있었다.

---

밤 10시 50분. 강준은 시계를 본다.

10분 남았다. 이수현이 올까. 아니면 어제 말처럼 자신이 결정할 때까지 오지 않을까.

강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리듬이 불규칙했다. 마음이 고르지 않았다.

어제 버린 삼각김밥 봉지들이 떠올랐다. 기름 자국. 종이의 재질감. 그 안에 담긴 온기. 모두 지워버렸다. 깨끗하게.

하지만 깨끗함은 공허함이었다.

10시 55분.

강준은 손가락을 멈췄다. 시계를 본다. 초침이 돈다. 카카카카.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10시 58분.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수현이 들어섰다. 손에는 도시락이 있었다.

"팀장님."

이수현이 말했다.

"저 오늘 도시락을 못 싸왔어요. 엄마가 이미 싸주셨어요. 그런데 팀장님 생각이 자꾸 나서..."

강준이 일어났다. 처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수현을 마주보다니.

"너 때문에 내가 변했어."

말이 나왔다. 목이 메었다.

"그리고 그게 좋아. 하지만 동시에..."

강준이 말을 멈췄다. 말을 마치고 싶지 않았다. 말을 마치면 끝이 났다. 현실이 되었다.

"무서워."

그 단어가 나왔다.

이수현의 눈이 반짝였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강준을 무너뜨렸다.

"그게 성장이에요."

이수현이 말했다.

"성장은 항상 무서운 거예요. 이전의 자신을 버리는 거니까요."

강준은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성장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것은 선택이었다. 누군가를 받아주고, 누군가를 외면하는 선택. 그 선택 속에서 자신도 상처받고, 타인도 상처받는다는 것을.

"팀장님, 저 가볼게요. 엄마가 기다려요."

이수현이 돌아섰다.

"내일 밤 11시에..."

"오지 마."

강준이 말했다.

이수현이 멈췄다.

"날 혼자 두고 가. 내가 스스로 결정하는 동안."

이수현이 미소를 지었다. 진짜 미소였다. 강준을 바라보는 미소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미소였다.

"알겠습니다."

사무실 문이 닫혔다.

강준은 혼자 남았다. 밤 11시 15분의 텅 빈 사무실에서.

그 순간,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한영희 과장. 그리고 그의 뒤로 경영진이 따라들어왔다.

"팀장님, 이번 분기 성과가 저하되었습니다."

한영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강준이 일어났다. 시선이 경영진을 향했다. 경영진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순간 강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이서'라고 떠 있었다.

강준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경영진 앞에서 전화를 받는 것은 무례였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화면을 누르고 있었다.

"강준아."

이서의 목소리였다. 밤 11시 20분에 걸려온 전화. 이서는 이 시간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

"뭐야."

강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영진이 보고 있었다. 한영희도. 모두가 강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너한테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이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침묵이 흘렀다.

"지금은 안 돼.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강준이 전화를 끊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을 내렸다. 경영진을 다시 봤다.

"죄송합니다."

강준이 말했다.

한영희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이번 분기 야근 감소로 인한 성과 저하는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신입 이수현이 야근을 거부하면서 팀 문화가 이완되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팀 관리 실패입니다."

경영진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준 팀장, 당신의 야근 감소가 팀 전체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강준이 입을 열었다. 경영진의 눈을 마주쳤다.

"저는 이 결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한영희의 얼굴이 굳었다.

"팀장님, 이게 무슨..."

"박민준이라는 팀원이 있습니다."

강준이 말했다.

"지난달에 그는 야근으로 인한 피로로 중요 보고서에서 실수를 했습니다. 고객사 미팅을 놓쳤고, 그로 인해 계약이 연기됐습니다. 그게 성과입니까?"

경영진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야근은 성과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야근은 회피입니다."

강준이 계속했다.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지 않기 위한, 책임을 미루기 위한 회피입니다. 저는 5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한영희가 말을 끊으려 했지만, 경영진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강준은 계속했다.

"신입 이수현은 제 야근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팀 문화 파괴가 아니라 팀 문화의 구조 변경입니다. 지난 3주간 팀의 실수율이 15% 감소했습니다. 그것도 성과입니까?"

"팀장님, 감정론으로 성과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한영희가 말했다.

"성과는 숫자입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강준이 고개를 들었다. 한영희의 눈을 봤다.

"숫자는 거짓말합니다. 야근 시간을 성과로 환산하는 그 순간, 이미 거짓입니다. 제 팀원들이 건강을 잃고, 관계를 잃으면서 만든 성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과가 아니라 착취입니다."

경영진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강준 팀장, 당신의 의견은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이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생존하기 위해 인간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강준이 말했다.

그 순간, 사무실이 조용했다. 시계 소리만 들렸다. 초침이 도는 소리.

경영진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뭔가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강준은 그것을 느꼈다.

"강준 팀장, 이 문제는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당신의 의견도 기록하겠습니다만, 조직의 최종 결정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영진이 일어섰다. 한영희도 따라 일어났다. 둘의 표정은 다웠다. 경영진은 중립적이었고, 한영희는 입술을 일직선으로 다물었다. 눈동자가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이번 분기 실적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다음 분기에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합니다."

경영진이 나갔다. 한영희가 마지막으로 강준을 봤다. 그 시선 속에는 분노가 있었다. 입술이 더욱 팽팽해졌다.

사무실 문이 닫혔다.

강준은 혼자 남았다.

밤 11시 35분.

강준은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제야 떨렸다. 경영진 앞에서는 떨리지 않았는데, 이제 떨렸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달으면서부터 떨렸다.

조직에 반기를 들었다. 상관에게 말대꿉했다. 자신의 커리어를 걸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이서에게 전화를 했다.

"이서."

"강준아, 미안해. 밤에 전화를..."

"지금 통화 가능해?"

이서가 침묵했다.

"응. 들어."

이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20년을 함께했는데, 너한테 할 말이 너무 많았어. 너한테 상처를 받은 것도 있고,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그런데 너는 이수현 때문에 변한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화났어."

강준이 말하지 않았다. 들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너는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 변한 거구나."

이서가 잠시 멈췄다. 강준은 그 침묵 속에서 이서의 눈물을 들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너한테 필요한 게 아니라, 너 자신이 너한테 필요했던 거구나. 그리고 그걸 깨닫는 데 20년이 걸렸어."

"이서..."

"우리 관계는 끝이야. 하지만 나는 너를 놓고 싶지 않아. 그냥 다르게 함께하고 싶어. 강준아, 수고했어."

전화가 끝났다.

강준의 눈이 따뜻했다. 목이 메었다.

20년을 함께한 사람이 자신을 놓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이 자신을 처음으로 진정하게 받아준 순간이었다.

강준은 휴대폰을 내렸다. 책상을 봤다. 깨끗한 책상. 삼각김밥이 없는 책상.

밤 11시 45분.

강준은 시계를 봤다.

이수현이 올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수현은 오지 않기로 했다. 강준이 결정할 때까지.

강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책상 서랍을 열었다. 비어 있는 서랍 속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일이 있었다.

상부 보고. 그것이 다음을 결정할 것이었다. 한영희의 움직임. 경영진의 결정. 그리고 이수현의 선택.

강준은 서랍을 천천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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