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55분. 사무실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강준은 책상 앞에서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다. 화면 속 문서는 이미 완성된 지 오래였다. 그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서의 전화 목소리. 박민준의 눈길.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현관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강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11시 55분. 너무 이르다. 아니, 너무 늦다. 아무도 이 시간에 사무실에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강준."
이서였다.
강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모니터 화면이 어둡게 느껴졌다.
이서는 천천히 걸어왔다. 신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20년을 함께했으니까. 그 얼굴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넌 왜 나한테는 이 정도로 신경 안 써?"
이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준은 처음 깨달았다. 이서가 화난 게 아니라 상처받은 거였다. 그리고 그 상처의 주인은 자기였다.
"수현이한테는 밤 11시마다 나타나서 밥 먹고, 대화하고, 음식까지 챙겨 가고. 나한테는?" 이서가 책상 위에 손을 짚었다. "나한테는 왜 '바빠'라고만 말해?"
강준이 마침내 이서를 봤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20년을 함께한 친구의 눈이었다.
"20년이야, 강준." 이서의 목소리가 부러졌다. "내가 너를 챙긴 게 20년이야. 대학 때 혼자라고 울던 너. 회사 들어갔을 때 적응 못 하던 너. 엄마 전화 받고 우울해하던 너. 그 모든 걸 내가 봤어. 내가 옆에 있었어."
이서는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넌 나한테 뭘 줬어? 뭘 말해 줬어? 고마워? 사랑해? 그런 말 한 번이라도 들었나? 넌 나한테 밥 먹자고 한 적 있어? 밤 11시에 나타난 적 있어?"
강준의 입이 떨렸다. 말을 해야 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목이 메어 있었다. 20년을 외면한 죄책감이 한 번에 밀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목을 졸라맸다.
"그 신입이 나타난 지 3주야, 강준. 3주." 이서가 손을 내렸다. "넌 3주 만에 변했어. 야근을 줄였어. 팀 문화를 개선하겠대. 누군가를 위해 노력하겠대.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는 아니네."
강준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해? 그런 말이 20년의 무관심을 지워낼 수 있을까. 사랑해? 거짓말이었다. 더 정확히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너 수현이 좋아하니?"
그 질문에 강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 게 아니야." 강준이 겨우 말했다. 목이 부스러웠다. "그냥... 필요한 사람이야."
"나는?"
침묵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형광등 소리. 에어컨 소리. 서울 밤의 소음. 모든 것이 귀에 들렸지만, 강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강준은 그걸 봤다. 20년 친구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 눈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처음으로 완전히 깨달았다. 이서는 자신을 사랑했다.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모든 행동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밤 12시에 전화를 받아주던 친구. 회사 앞에서 기다리던 친구. 자신의 엄마가 한 말들을 중화시켜주던 친구.
그리고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미안해." 강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너무 작았다. 너무 늦었다.
이서가 돌아섰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서—"
"언제 깨어날 거야, 강준?"
사무실 문이 닫혔다.
강준은 혼자 남겨졌다. 책상 앞에서. 모니터 화면 앞에서.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떨렸다. 울고 싶었다. 정말로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이 그것을 거부했다. 30년을 살면서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그랬다. 남자가 우는 게 뭐 하는 짓이냐고. 그래서 강준은 배웠다. 느끼지 않는 척하는 법을. 표현하지 않는 법을.
그것이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가장 큰 약점이라는 걸 알았다.
손이 떨렸다. 책상을 내려치고 싶었다. 모니터를 집어던지고 싶었다. 무언가를 깨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강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삼각김밥 봉지들이 쌓여 있었다. 이수현이 남긴 것들. 3주간의 흔적. 매일 밤 11시에 나타났던 그 신입이 남긴 것들.
강준은 한 봉지를 들었다. 손가락으로 구겨졌다. 그 안의 밥도 식어 있을 것이다. 이미 며칠 전의 것이니까. 어쩌면 상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준은 그것을 먹지 않았다. 다만 들고만 있었다.
이서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20년이야, 강준.'
그렇다. 20년이었다. 20년을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주고, 자신은 일방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3주 만에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했다. 말도 안 된다. 완전히 말도 안 된다.
강준은 삼각김밥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서랍을 닫았다.
밤 12시 5분.
사무실에는 강준 혼자 남겨져 있었다. 그의 책상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도 이제 따뜻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형광등 빛일 뿐이었다.
강준은 생각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이서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수현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한영희 과장의 보고서가 경영진에게 올라갔다. 제목은 '마케팅팀 야근 시간 감소에 따른 효율성 분석'이었다. 내용은 명확했다. 강준 팀장의 야근 감소가 팀 전체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그 원인은 '신입 직원의 부적절한 개입'이라는 것.
강준은 그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자신의 책상에서. 커피는 식어 있었다. 박민준은 강준의 얼굴을 보고 무언가 물으려다 말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수현이었다.
메시지: '팀장님, 오늘 밤 11시에 뵐 수 있을까요?'
강준은 그 메시지를 읽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밤 11시. 그 시간이 더 이상 따뜻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그 시간은 자신의 책임을 상기시키는 시간이 될 것이었다.
강준은 회신했다. '알았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보낸 후, 강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 강남의 아침 하늘. 회색이었다.
오후 5시. 강준은 박민준을 불렀다.
"민준이, 이거 봤어?"
보고서를 건넸다.
박민준은 그것을 읽고 한숨을 쉬었다. "과장님이 또..."
"응. 야근 감소가 효율성 저하라고."
박민준이 강준을 봤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말했다. "오늘 밤 11시에 이수현이 올 거야. 평소처럼."
"...예."
"넌 먼저 가. 야근 하지 마."
"팀장님—"
"가라고."
박민준은 나갔다. 강준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보고서를 다시 들었다. 한영희의 글씨는 정확했고, 논리는 명확했다. 그리고 위협적이었다. 강준은 그것을 알았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이 아니었다. 이것은 신호였다. 경고였다.
밤 10시 50분. 강준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서랍에는 삼각김밥 봉지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일주일 전의 것이었다. 이수현은 그것들을 꺼내가지 않았다. 강준도 버리지 않았다.
---
**다음날 밤 11시 정각.**
발소리가 들렸다. 이전과 같은 발소리. 이전과 같은 시간. 하지만 강준의 심장은 다르게 뛰고 있었다.
이수현이 나타났다. 손에는 도시락이 있었다. 삼각김밥이 아닌, 누군가 만든 도시락이었다.
"팀장님!" 이수현이 밝게 인사했다. 하지만 그 밝음은 가짜처럼 들렸다. "뭐 있어요? 얼굴이..."
강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수현의 얼굴이 변했다.
"팀장님, 뭐가 잘못됐어요?"
그 질문 속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강준은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 진심을 받아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강준은 입을 열려다 다시 닫았다.
"이서를 봤어."
이수현이 움직임을 멈췄다. 도시락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 손이 떨렸다.
"아, 그 언니요?"
"응. 어제 밤에."
강준은 천천히 말했다. "20년을 함께한 사람이야. 이서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오래 곁에 있던 사람이고."
"...팀장님."
"그 사람이 어제 사무실에 왔어. 그리고 물었어. 왜 자기한테는 이 정도로 신경을 안 쓰냐고. 왜 3주 만에 너한테는 밤 11시마다 나타나서 대화하고, 자기한테는 '바빠'라고만 말하냐고."
이수현이 천천히 앉았다. 강준의 맞은편 의자에. 마치 무언가 무거운 것을 내려놓듯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못 했어. 말이 안 나왔어."
강준은 손가락을 맞닿게 했다. 그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이서는 계속 말했어. 20년이라고. 20년을 자기가 날 챙겼다고. 그런데 난 뭘 줬냐고. 뭘 말해 줬냐고."
사무실의 형광등이 강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지난 3주 동안 보지 못했던 표정이 있었다. 무너지는 표정.
"팀장님..."
"그 질문에 난 대답할 수 없었어. 왜냐면... 정말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 뭘 했는지 생각해보니까 아무것도 없었어. 그냥 받기만 했어. 당연하게 받기만 했어."
강준이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지난 3주 동안의 삼각김밥 봉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도시락이 들어 있었고, 어떤 것은 비어 있었다.
"이거 봤어?"
이수현이 봤다.
"내가 이거를 왜 버리지 않고 있는지 알아? 왜냐면... 이것들이 내가 누군가한테 필요한 사람이 된 증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서는 20년을 날 챙겼어. 20년 동안. 그리고 이걸 한 번도 남겨놓지 않았어. 왜냐면... 그건 당연한 거였으니까. 돌봄이 당연한 거였으니까."
강준이 삼각김밥 봉지를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난 정말 최악이야. 진짜."
이수현이 손을 내밀었다. 강준의 손을 잡으려고. 하지만 강준은 손을 빼냈다.
"안 돼. 그럼 안 돼."
"팀장님—"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내가 그 사람을 필요한 만큼 돌봐야 해. 그런데 난 못 했어. 20년이나 함께한 사람한테도."
강준은 삼각김밥 봉지를 천천히 집어던졌다. 쓰레기통 쪽으로.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그 사람이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이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 깨어날 거야, 강준?' 이렇게 말했어. 마치 내가 계속 자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 깨어났어. 3주 만에 깨어났어. 그리고..."
강준이 다시 봉지를 집었다. 한 번에 여러 개를. 손가락이 떨렸지만, 계속 집어던졌다.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그 깨어남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알았어."
강준은 계속 봉지를 던졌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지우듯이. 마치 자신이 한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는 듯이. 손가락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봉지가 쓰레기통에 떨어졌다.
강준은 손을 내렸다. 그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울고 싶었다. 정말로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그것을 거부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30년을 살면서 배운 것이 너무 깊었다.
침묵이 사무실을 채웠다. 형광등 소리. 에어컨 소리. 서울 밤의 소음. 하지만 강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팀장님..."
이수현이 말했다. 하지만 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강준이 겨우 말했다. "이서한테도. 그리고 너한테도."
이수현이 물었다. "왜 미안하세요?"
"내가 너한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너를 돌봐줄 수 없어서. 내가 감정을 표현할 수 없어서. 내가... 너를 상처 입혀서."
강준이 이수현을 봤다. 그 눈빛은 어두웠다. 3주 동안 점점 밝아지고 있던 눈빛이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어둠은 달랐다. 그것은 무시와 회피의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각과 후회의 어둠이었다.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게 뭘까? 내가 너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한테서 물러나는 것뿐이야."
이수현이 일어섰다.
"팀장님, 저는—"
"가. 밤이 늦었어."
강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이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내일부터 넌 더 이상 밤 11시에 올 필요가 없어."
이수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고요?"
"내가 너한테 필요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너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너한테 상처를 주는 거야. 이서가 그걸 보여줬어. 20년을 일방적으로 주는 게 얼마나 힘든지."
강준이 서류를 정리했다. 손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지. 그런데 확실한 건... 누군가를 상처 입히면서까지 내가 깨어나고 싶진 않다는 거야."
이수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팀장님, 저도 알고 있었어요."
강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언제까지 갈 수 없다는 걸. 팀장님이 저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래도 저는... 팀장님이 저를 필요로 하기를 바랐어요."
이수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명확했다. 그것은 더 이상 청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는 목소리였다.
"저는 팀장님의 약이 되고 싶지 않아요. 팀장님이 저 때문에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것도 싫어요. 그래서... 저도 물러날게요."
이수현의 눈가가 촉촉했다.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팀장님, 고마워요. 정말."
"수현—"
"이서 언니가 맞아요. 팀장님은 깨어나야 해요. 진짜로."
이수현이 도시락을 들었다. 손이 떨렸지만, 움직임은 확실했다.
밤 11시 12분. 이수현이 나갔다. 그 뒷모습을 강준은 봤다. 작지만 곧은 등이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문이 닫혔다. 그리고 강준은 혼자가 되었다.
---
밤 11시 13분. 강준의 책상 앞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랍도 비어 있었다. 쓰레기통에는 삼각김밥 봉지들이 가득했다.
강준은 손을 모았다. 손가락들이 서로를 잡았다. 떨림을 멈추기 위해.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목이 메어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도 가슴이 내려앉지 않았다.
울고 싶었다. 정말로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강준은 책상에 엎드렸다. 팔로 얼굴을 감쌌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은 가늘게 떨렸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울음.
밤 11시 30분. 강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는 이수현이 남긴 도시락이 있었다. 뜨거워야 할 밥은 이미 식어 있을 것이다.
강준은 도시락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열었다. 밥과 반찬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만든 것이었다. 누군가의 시간이 들어간 것이었다.
강준은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식은 밥의 맛이 혀에 닿았다.
그 순간, 강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결국 눈물이 흘렀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
밤 11시 45분. 강준의 책상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 아래서 강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도시락 상자는 비어 있었다. 그의 양손은 책상 위에서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은 다른 의미였다. 억누르는 떨림이 아니라, 무언가를 놓아버린 떨림이었다.
강준은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 여전히 회색이었다. 하지만 그 회색 속에서도 무언가가 보였다. 거리의 불빛.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선택.
강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이수현에게 메시지를 쓰려다 멈췄다.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로도, 메시지로도.
그래서 강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대신 그는 생각했다. 이서가 한 말을. '언제 깨어날 거야, 강준?'
이제 깨어났다. 하지만 깨어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강준은 천천히 일어섰다. 사무실 불을 껐다. 어둠이 밀려들어왔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밤 12시. 사무실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