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2분, 강준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모니터만 켜져 있었다. 하지만 마우스는 손에서 내려와 있었다. 그는 이수현이 앉을 의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3주 연속이었다.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맴돌다가 내려왔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일을 한다는 것은 핑계였다.
"팀장님."
이수현이 들어섰다. 손에는 편의점 도시락 두 개. 후드 티셔츠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이번엔 뭐?"
강준이 물었다. 말투가 부드러워진 지 이미 오래였다.
"김밥이랑 김밥이요.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수현이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강준은 도시락을 열었다. 밥 냄새가 퍼졌다. 실제로는 밥 냄새보다 다른 것이 더 강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썼다는 것의 냄새.
"요즘 야근이 줄었다고?"
이수현이 자신의 도시락을 까며 물었다.
"응."
"왜요?"
"이제 할 게 별로 없어서."
거짓이었다. 일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강준은 밤 11시가 되면 마우스를 내려놓기로 했다. 이수현이 올 때까지.
"거짓말."
이수현이 김밥을 한 입 베어물었다.
"왜 거짓말이야?"
"팀장님은 일이 없어서 안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강준은 대답을 멈췄다. 그 말이 정확했다.
"그럼 왜?"
이수현이 다시 물었다. 이번엔 웃음이 없었다.
강준은 한참을 침묵했다. 밥을 씹으며 생각했다. 왜일까. 왜 밤 11시가 되면 자신은 일을 멈추고 이 아이를 기다리기로 했을까.
"나는... 야근을 하면서 뭔가를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아."
말이 나왔다. 자신도 놀랐다.
"뭘 증명하려고?"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이수현이 손을 멈췄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몰랐어. 야근을 많이 하면 성과가 나고, 성과가 나면 누군가 날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사람을 필요로 하는 거랑은 다르더라."
강준이 말을 이었다.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건... 다른 거야."
이수현이 천천히 웃음을 터뜨렸다.
"팀장님이 처음으로 자기 감정을 말했어요."
"그냥 생각을 말한 거야."
"같은 거예요."
이수현이 김밥을 가리켰다. "먹어요. 식으면 맛없어요."
강준은 먹었다. 밥알이 목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팀장님은 필요한 사람이에요."
이수현이 다시 말했다.
"뭐가?"
"저한테. 지금."
강준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말 대신 밥을 먹음으로써.
밤 11시 35분, 박민준이 나타났다. 얼굴이 피곤했다. 손에는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팀장님, 이거 한 번만 봐주시겠어요?"
강준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네. 내일 아침 제출이라..."
박민준의 말이 흐려졌다. 강준은 그의 어깨를 봤다. 피로가 묻어났다.
"내일이 아니라 일주일 뒤에 제출해."
"어?"
"팀장 권한이야. 일주일 뒤."
박민준의 눈이 커졌다. 그 눈빛에는 의심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저도 이제 야근 안 해도 돼요?"
작은 목소리였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응, 가."
박민준이 간다. 그 순간, 강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를 처음으로 느꼈다.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팀장님?"
이수현이 물었다.
"괜찮아?"
"응. 그냥... 생각했어."
"뭘?"
"너 없으면 내가 계속 야근했을 것 같아. 그리고 그게 싫었어."
말을 한 순간, 강준은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성장인지 도피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밤 11시 47분, 강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영희였다.
"팀장님, 통화 가능하세요?"
"네."
"강준 팀장의 최근 야근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거든요. 혹시 특별한 사유가 있으세요?"
강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과 저하가 우려되는데요."
"성과는 나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만, 추이를 보면..."
강준이 전화를 끊었다. 조직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밤 11시 52분, 이서가 전화를 걸었다.
"우리 언제 만날래?"
강준은 대답을 생각했다.
"바빠."
침묵이 흘렀다.
"수현이보다 나한테는 시간이 없네."
이서의 목소리가 작았다.
"그게 아니야."
"뭐가 아니야? 너 요즘 매일 밤 11시에 그 아이 만나잖아."
강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강준."
"응."
"내가 20년을 너 곁에 있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알아."
"그럼 왜?"
강준은 침묵했다. 이수현이 자신을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미안함이 있었다.
"이서,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 얘기하자."
밤 11시 55분, 이서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강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이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멈췄다.
"강준, 나랑 얘기 좀 하자."
이서의 목소리는 분노가 아니었다. 울음이었다.
"이수현, 먼저 가."
"아니요, 팀장님..."
"가."
이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강준의 목소리에는 절망에 가까운 음정이 있었다. 이수현은 도시락 통을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강준과 이서만 남았다.
"앉아."
강준이 의자를 권했다. 이서는 앉지 않았다. 사무실 중앙에 서 있었다.
"넌 나를 모르고 있어."
"그게 무슨..."
"20년이야. 20년을 함께했는데, 넌 나를 정말 모르고 있어."
강준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서의 얼굴을 봤다. 창백함 뒤에는 상처가 있었다.
"내가 뭔데?"
이서가 물었다.
"뭐라고 생각해? 난 뭐야?"
"친구고..."
"친구?"
이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었다.
"친구라니. 넌 정말 모르는구나."
강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서의 목소리 속에는 자신이 평생 외면해온 무언가가 있었다.
"이서,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냐고?"
이서가 책상에 손을 짚었다. 손이 떨렸다.
"넌 내가 20년을 챙겨왔다는 걸 알아?"
목소리가 낮았다. 더 위협적이었다.
"대학 때 자취방에서 밥 챙겨주고, 감기 걸렸을 때 밤새 간호했어. 엄마 때문에 힘들 땐 내가 옆에 있어줬어. 병원도 같이 다녔고. 넌 내가 뭘 했는지 알아?"
강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아이 봤어? 3주야. 3주 만에 넌 그 아이를 위해 야근을 줄이고, 웃어. 웃어, 강준!"
이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넌 내 앞에서 웃어본 적이 있어? 한 번이라도?"
침묵이 대답이었다.
"20년을 나한테 쏟아 붓고도, 3주 만에 다른 사람한테 무릎을 꿇어. 그게 뭐야, 강준? 내가 뭐 하는 사람이야?"
이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냥 있던 사람? 당연한 사람? 이용할 사람?"
강준은 이서를 봤다. 처음으로 이서를 제대로 봤다. 20년을 함께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그게 끝이야?"
"아니야. 내가..."
강준은 말을 멈췄다. 자신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약한 목소리였다.
"그 아이가 좋아?"
이서가 물었다.
강준은 침묵했다.
"대답해."
"모르겠어."
"뭐가 모르겠어?"
"뭐가 좋아하는 건지. 뭐가 필요한 건지. 뭐가 이 감정인지. 다 모르겠어."
강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데 그 아이 옆에 있으면 뭔가 덜 외로워. 뭔가 덜 무서워."
이서가 바라봤다.
"그건 사랑이야, 바보."
"그게 사랑이야?"
강준은 의심했다. 자신이 느끼는 것이 진정한 감정인지, 아니면 단순한 도피인지. 이서의 돌봄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구인지. 그것을 모르는 자신이 두려웠다. 손이 떨렸다. 자신이 이수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이서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이수현을 붙잡은 건지. 그 구분이 자신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 그게 사랑이야. 그리고..."
이서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넌 날 사랑한 적이 없어. 한 번도."
말이 심장을 관통했다. 강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이서,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서 내 20년이 돌아와?"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래. 돌아오지 않을 거야."
이서가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잠깐."
강준이 불렀다.
"뭐?"
"우리는?"
이서가 돌아봤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맑았다.
"우린 끝났어. 오래전에 끝났어. 넌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을 뿐이야."
이서가 문을 열었다.
"이서."
"그 아이 잘해줘. 그 아이는 넌 하지 못했던 걸 할 거야."
"뭘?"
"잘 받아주는 법. 그리고 넌 그걸 절대 외면하면 안 돼. 알겠어?"
말이 경고였다. 축복이 아닌, 명확한 경고.
이서는 사무실을 나갔다.
밤 11시 58분, 강준은 혼자 남았다. 책상 위에는 이수현이 먹다 남긴 밥이 식어가고 있었다. 강준은 그것을 바라봤다.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이수현 때문에, 감정을 언어화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무너짐이었다. 이서의 경고가 자꾸만 떠올랐다. '잘 받아주는 법.' 그게 뭐라는 뜻일까. 그것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게 뭐라는 뜻일까.
이수현이 자신을 위해 밥을 챙겨왔다. 이서도 20년을 챙겨왔다. 둘 다 자신을 돌봤다. 그런데 왜 이수현과는 다르게 느껴질까. 이수현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자신도 이수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필요가 같은 무게일까. 자신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자신이 이수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수현의 돌봄에 의존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은 이서와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하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자신을 짓눌렀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수현이었다.
"팀장님, 괜찮아요?"
"응."
"이서님은?"
"그냥... 가셨어."
침묵이 흘렀다.
"팀장님, 제가 들어갈까요?"
"아니야. 혼자 있고 싶어."
강준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수현이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아침, 회의실에서 강준은 팀 전원을 모았다.
"우리 팀의 야근 문화를 바꾸려고 해."
박민준의 눈이 커졌다.
"팀장님?"
"야근은 효율이 아니야. 오히려 독이야. 내가 증명할 거야."
말을 마치는 순간, 강준은 느꼈다. 팀원들의 눈빛이 바뀌는 것. 의심과 기대, 그리고 불안이 뒤섞인 표정.
박민준이 옆 팀원 김수연과 눈을 마주쳤다. 김수연의 입가에는 작은 웃음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졌다. 희망과 의심이 동시에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정말 가능할까요?"
김수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믿음보다 우려가 컸다.
"시도해봐야 알지."
강준이 대답했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였지만,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질문 있어?"
강준이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는 신뢰와 의심이 함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부터 밤 10시 이후 야근은 금지야. 긴급 상황 제외. 그리고 성과는 시간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하겠어."
박민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이 약속이 지켜질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박민준이 먼저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다른 팀원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같은 시간, 강준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한영희의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어제 한영희가 전화할 때 들은 내용이 자꾸만 떠올랐다. 경영진 회의. 성과 저하 우려. 강준은 손을 뻗어 서류를 펼쳤다. 제목은 '강준 팀장 성과 저하 추이 분석'.
눈이 보고서의 한 문장에 멈췄다. '장기적으로는 조직 전체의 생산성 저하를 초래할 수 있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준은 알았다. 자신의 변화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야근 문화 개혁이 경영진에게는 위협으로 보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밤이 오자, 강준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감정이었다. 이수현을 기다리는 설렘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밤 11시가 되었다. 이수현은 오지 않았다.
강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영희였다.
"팀장님, 경영진 소환입니다. 내일 아침 9시."
강준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강준은 어두운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밤 11시를 기다리던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졌다.
자신이 이수현을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이수현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가. 그 불균형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이서가 20년을 견딘 것처럼, 이수현도 그럴 것인가. 아니면 자신처럼 어느 날 그것을 깨닫고 떠날 것인가.
강준은 모니터를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