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밤 11시의 손님

밤 10시 50분. 강준의 책상 위에는 결산 보고서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한 줄 한 줄 검토하는 손가락의 속도는 여전히 정확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모니터 시계로 향했다. 11시. 그 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제처럼 또 올까?

그 생각이 든 순간, 강준은 자신의 손을 멈췄다. 뭐 하는 거야, 자신에게 질책했다. 신입 하나 때문에 시간을 재고 있다니. 그런데 손은 계속 시계를 본다.

9분이 남았다.

강준은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글자들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마케팅 3분기 실적, 광고 배치 최적화, ROI 분석, 고객 접근성... 어제는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전부였다. 이 일들을 완성하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뭔가 그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사무실의 형광등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텅 빈 책상들, 꺼진 모니터들, 누구도 없는 공간. 어제는 이곳이 얼마나 편했는가. 방해받지 않는 공간, 성과만 쌓이는 공간. 그런데 지금은?

"팀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11시 2분. 강준은 고개를 들었다.

이수현이 삼각김밥을 들고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은 편의점 삼각김밥.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그 손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컵. 아마 라면일 것 같았다.

"내일 죽으면 그 야근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수현이 말했다. 어제와 정확히 같은 말. 강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하는 거야?"

"야근 방해요."

이수현이 대답했다. 자연스럽게 강준의 책상 맞은편에 앉으려 하자, 강준이 몸을 일으켰다.

"이거, 농담 아니지? 매일 이럴 거야?"

"네, 매일입니다. 신입 때부터 이렇게 연습했어요."

"누가 시켰어?"

"그냥...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수현의 얼굴이 진지했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표정이다. 농담 같으면서도 진지한, 그런 표정. 강준은 이수현을 쫓아내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이수현이 삼각김밥과 라면을 책상에 내려놨다.

"먹고 퇴근하세요, 팀장님."

그리고 돌아섰다.

"잠깐—"

강준이 손을 들었지만, 이수현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어제보다 더 빨랐다. 마치 이미 정해진 패턴이라도 있는 것처럼.

강준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책상 위의 삼각김밥과 라면을 바라봤다. 따뜻한 김이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식을 것이다. 음식이 식는다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강준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몸이 움직였다.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손이 삼각김밥을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벗겼다. 한 입 물었다.

따뜻했다.

중얼거린 자신의 말에, 강준은 움찔했다. 왜 이런 말을 했지?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할 필요가 있나? 강준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손은 계속 움직였다. 라면 컵을 들었다. 냄새를 맡았다. 진한 국물 냄새.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준비한 음식의 냄새.

10분을 더 먹고 있었다.

---

다음날 오후 3시.

"팀장님, 뭐 생각하세요?"

박민준이 강준의 책상 앞에 섰다. 강준은 마우스를 놨다.

"뭐라고 했어, 어제 신입이?"

"아, 그건..."

강준이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박민준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젊은 팀원의 눈에 뭔가 호기심이 가득했다.

"신입이 계속 나타나는 거, 알고 있죠? 밤 11시에. 팀장님 책상 앞에."

"알아."

"그게 뭐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박민준이 말했다. 어제 강준이 퇴근한 후, 자신도 퇴근했다. 그런데 오늘은? 박민준의 눈빛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오늘도 밤 11시까지 남을 생각이구나.

"넌 퇴근해. 할 일 없으면."

"할 일 있습니다. 좀 더 정리할 게..."

박민준이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강준은 박민준을 보았다. 3년 차 팀원. 실적도 좋고, 성격도 밝다. 하지만 지난 6개월간 퇴근 시간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다.

"할 일 정말 있어? 아니면 그냥 있는 줄 알아?"

박민준이 입을 다물었다.

"퇴근해. 진짜로."

강준이 말했다. 그런데 박민준은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보고서를 펼쳤다. 강준은 그 모습을 한 번 더 봤다. 박민준의 어깨가 경직되어 있었다. 강준과 이수현을 보고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강준은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지만, 손가락은 계속 떨렸다.

---

밤 8시 30분.

강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이서'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뭐해?"

전화를 받은 강준이 물었다.

"일해."

대답은 짧았다. 그런데 이서의 목소리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강준은 감지했다. 음성 톤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야근이야?"

"그래."

"또? 어제도 했잖아."

이서의 목소리에 뭔가 있었다. 가늘어진 톤. 그리고 그 뒤의 침묵. 강준은 그것을 무시했다.

"일이 많아."

"...그래. 잘해. 내일 봐."

전화가 끊겼다. 강준은 한참을 그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이서의 목소리. 그 가늘어진 톤. 그리고 침묵의 길이. 뭔가 말하려다 멈춘 그 순간.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강준은 다시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

밤 10시 45분.

강준은 자신도 모르게 시계를 봤다. 15분이 남았다. 그는 보고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같은 부분을 세 번 읽고 있었다.

책상 옆 모니터에는 한영희 과장의 메일이 떠 있었다.

'강준 팀장의 최근 야근 시간 감소에 대해 경영진께 보고할 예정입니다. 효율성 저하 가능성을 체크하겠습니다.'

강준은 그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야근 시간 감소? 어제 하루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효율성 저하로 이어진다고?

강준의 손이 마우스로 향했다. 회신을 쓰려다 멈췄다. 지웠다. 다시 썼다.

'감사합니다. 저는 효율성을 위해 야근을 줄이고 있습니다. 팀원들의 퍼포먼스 향상을 위해서입니다.'

지웠다. 너무 약해 보였다.

'효율성은 시간이 아니라 결과로 판단됩니다. 제 성과는 변함없습니다.'

지웠다. 너무 공격적이었다.

그 순간, 여러 목소리들이 동시에 들렸다.

'내일 죽으면 그 야근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수현의 목소리.

'효율성 저하 가능성을 체크하겠습니다.'

한영희의 목소리.

'또? 어제도 했잖아.'

이서의 목소리.

세 목소리가 뒤섞였다. 강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뭐 하는 거야, 강준이 자신에게 물었다. 신입 하나 때문에, 상사 하나 때문에, 친구 하나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니.

강준은 메일창을 닫았다. 저장하지 않고. 보고서도 닫았다. 모니터를 껐다.

5년 동안 해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밤 11시 전에 일을 멈추는 것.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이수현이 들어왔다. 어제보다 큰 목소리로. 손에는 삼각김밥이 없었다. 대신 뭔가 더 크고 무거운 것을 들고 있었다. 도시락이었다.

"진심으로 묻겠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이수현이 강준의 책상에 도시락을 내려놨다.

"그리고 이건 어머니가 아닙니다. 제가 준비했습니다. 밥도 있고, 국도 있고, 반찬도 여러 개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수현이 한 숨을 고르고 말했다.

"팀장님은 영양 관리가 필요하시거든요."

그 말을 하는 이수현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오직 진지함만 있었다. 그리고 그 진지함 속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강준은 그것을 느꼈다.

관찰.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

그것이 불편했다. 그리고 동시에 안도감을 주었다.

"내일도 올 거야?"

강준이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네. 내일도 오겠습니다. 모레도. 그 다음도."

이수현이 대답했다.

"왜?"

"필요하니까요."

그 한마디에, 강준의 세상이 조용해졌다.

이수현이 돌아서려는 순간, 강준은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다. 흰 밥 위에 계란말이, 시금치나물, 소시지 구이. 국은 미역국이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먹고 가."

"아, 저는 괜찮습니다. 팀장님이 드세요."

"같이 먹자."

강준이 말했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담담한 톤으로.

이수현이 멈췄다. 돌아보는 것에 1초가 걸렸다.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고 웃음이 피어올랐다. 작은 웃음이었지만, 강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밥을 좀 덜어드릴까요?"

이수현이 책상 옆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강준이 예비로 두었던 도시락 하나를 꺼내 밥을 담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밤 11시 5분.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 팀장과 신입이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강준에게는 자연스러웠다.

"국 괜찮으세요? 간은 좀 심할 수도 있어요. 엄마 레시피가..."

이수현이 말을 멈췄다.

"아, 제 엄마 말이에요. 저 혼자 만든 게 아니라."

"알았어."

강준이 국을 한 숟가락 떴다. 따뜻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받은 따뜻한 음식이 언제였는지 강준은 기억할 수 없었다.

"팀장님, 혹시 요즘 밥을 제대로 못 챙기세요?"

"왜?"

"얼굴이 좀..."

이수현이 강준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창백하고, 눈이 좀 침침해 보여요. 그리고 목에 뭔가..."

"스트레스."

강준이 먼저 말했다.

"일 때문?"

"여러 가지."

강준이 국을 한 숟가락 더 떴다. 이수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밥을 집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밥을 먹었다. 그것은 편한 침묵이었다.

밤 11시 20분.

박민준이 들어왔다.

"어? 팀장님. 아직 안 가셨어요?"

박민준이 멈췄다. 그리고 이수현을 봤다. 이수현이 도시락을 들고 밥을 먹고 있었고, 강준도 밥을 먹고 있었다.

박민준의 얼굴에 뭔가 복잡한 것이 떠올랐다. 의심. 질문. 그리고 뭔가 더. 그는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를 반복했다. 마침내 말을 꺼냈다.

"팀장님, 혹시... 신입이랑 특별한 관계가 있으신 건가요?"

침묵이 흘렀다. 강준과 이수현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박민준의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 속에는 뭔가 확실한 것이 있었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

"뭐라고 했어?"

강준이 물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팀에서 좀 말이 있어서요."

박민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 눈은 강준과 이수현을 번갈아 봤다.

"어떤 말?"

강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팀장님이 신입이랑 자주 만난다고 해서요. 밤에. 그리고 오늘 야근하다 보니까..."

박민준이 말을 흐렸다. 하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팀 내에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제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강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동요가 있었다.

"네, 팀장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팀원들한테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까."

박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먼저 가겠습니다. 내일 봐요."

박민준이 나간 후,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 침묵은 어제의 침묵과 완전히 달랐다. 그 속에는 질문이 아니라 현실이 있었다. 팀 내에 소문이 난다는 현실.

"팀장님..."

이수현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냥 먹자."

강준이 말했다. 하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밥을 집었다. 하지만 그것을 씹을 수 없었다. 입 안에서 밥이 뭉쳐졌다.

---

밤 11시 35분.

이수현이 나갔다.

"내일도 올게요. 같은 시간에."

"알았어."

강준이 대답했다. 이수현이 떠난 후, 강준은 남은 밥을 정리했다. 도시락을 닫고, 책상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를 켰다.

한영희 과장의 메일이 떠올랐다. 강준의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움직였다. 회신을 눌렀다.

'감사합니다. 야근 시간 감소는 의도적인 조직 문화 개선입니다. 효율성은 시간이 아니라 결과로 판단되며, 제 성과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일 회의에서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타이핑했다. 읽었다. 전송했다.

강준은 메일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니터를 껐다.

밤 11시 45분.

강준은 가방을 들었다. 5년 만에, 밤 11시 45분에 사무실을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강준은 생각했다.

이수현이 말했던 것. '필요하니까요.'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필요하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일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이 뭔지 강준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 밤 11시, 자신은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수현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

다음날 밤. 11시.

강준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보고서는 열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박민준은 밤 10시 30분에 나갔다. 어제와는 달리.

"팀장님, 먼저 가겠습니다. 내일 봐요."

그 한마디에 강준은 뭔가를 느꼈다. 변화.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팀 내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밤 11시 5분.

이수현이 들어왔다. 어제보다 더 큰 도시락을 들고.

"팀장님! 오늘은 제 엄마도 도움을 주셨어요. 된장찌개요. 팀장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강준이 이수현을 봤다. 그 얼굴을 자세히 봤다. 밝은 표정. 하지만 그 밝음 뒤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불안감. 그것을 감추려는 노력.

"민준이가 뭐라고 했어?"

강준이 물었다.

이수현이 움찔했다.

"아, 그건... 별 거 아니고요."

"뭐라고 했어?"

강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팀에서 저랑 팀장님 관계에 대해 얘기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괜찮습니다. 팀장님이 괜찮으시면."

이수현이 말했다. 하지만 그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강준은 이수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이 단순한 야근 방해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누군가의 선택이라는 것을.

"도시락은 이제 그만 가져와."

침묵이 흘렀다. 이수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팀장님?"

"팀에서 말이 나고 있어. 앞으로는 더 심해질 거야. 이건 좋지 않다."

강준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뭔가 단호한 것이 있었다.

이수현이 도시락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팀장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를 선택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수현이 질문을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자신을 선택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선택하는 것인가.

"나도 모르겠어."

강준이 대답했다. 그것이 솔직한 답변이었다.

"그럼 제가 대신 결정하겠습니다."

이수현이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뭔가 단호한 것이 있었다.

"뭘?"

"팀장님이 선택하실 때까지 저는 올게요. 그리고 팀에서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수현이 강준을 바라봤다.

"팀장님이 필요하니까요."

그 말을 하는 이수현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수현..."

"아, 그런데 팀에서 뭐라고 하든 팀장님이 책임져야 합니다. 제 말은..."

이수현이 한 숨을 쉬었다.

"팀장님이 이 감정을 표현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이 세상의 규칙이니까요."

강준이 움직였다. 이수현의 말이 뭔가 다르게 들렸다.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뭔가 더 깊은 것이 있는 것처럼.

"대가?"

"네. 팀장님이 저를 선택한다면, 누군가는 상처받을 거고, 팀에서도 문제가 생길 거고, 팀장님도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게 감정을 표현하는 대가예요."

이수현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을 말하는 것처럼.

"그래도 올 거야?"

강준이 물었다.

"네. 올게요. 팀장님이 준비되실 때까지."

이수현이 도시락을 들었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올게요."

그리고 돌아섰다.

---

밤 11시 30분.

강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서였다.

"뭐해?"

"일해."

강준이 대답했다.

"혼자?"

이서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래."

침묵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침묵.

"강준. 우리 얘기 좀 하자."

"지금?"

"지금."

이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강준은 그것을 느꼈다.

"내가 뭔가 부족했어? 내가 뭘 잘못했어?"

"이서..."

"아니면 그 신입이 더 나은 거야?"

"그게 아니야."

"그럼 뭐야? 설명해 봐."

강준은 말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왜 이수현을 기다렸는지. 왜 그 밤 11시가 그렇게 기다려졌는지. 왜 그 따뜻한 음식이 그렇게 필요했는지.

"강준. 나랑 헤어지자."

그 말이 들렸다.

"뭐?"

"나랑 헤어지자. 너는 그 신입이랑 잘 지내. 나는... 나는 너를 기다릴 수 없어."

이서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있었다.

"이서, 잠깐—"

"이미 기다렸어. 충분히."

전화가 끊겼다.

강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의 대가.

그 순간, 강준은 이수현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그 대가인가? 20년을 함께한 친구를 잃는 것이?

밤 11시 35분.

강준은 도시락을 열었다. 이수현이 남긴 도시락. 따뜻한 된장찌개. 하지만 그것을 먹을 수 없었다. 입 안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강준은 밥을 집었다. 한 입 물었다. 하지만 그것을 씹지 못했다. 입 안에서 밥이 뭉쳐졌다. 목구멍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강준은 밥을 뱉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이수현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뭘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책상 위의 메일 알림이 울렸다. 한영희 과장의 메일이었다.

'내일 오전 회의에서 강준 팀장의 인사 평가 결과를 논의할 예정입니다. 참석 부탁드립니다.'

강준은 그 메일을 읽었다. 인사 평가. 야근 시간 감소. 효율성 저하 가능성. 그리고 팀 내 소문.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강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 뭔지를.

하지만 그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내일 오전, 그 선택의 대가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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