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손가락 끝에 남은 따뜻함이 먼저다.
에밀리는 눈을 떴다. 거울의 방. 오후 3시의 창백한 빛이 은색 표면을 비추고 있었다. 자신의 신부 복장이 거울에 비쳤다. 드레스의 주름, 머리에 꽂힌 수선화, 그리고 죽은 듯한 눈.
손가락을 펼쳤다. 손톱 끝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은 흔적.
머리가 무겁다. 뭔가 중요한 것이 물 속에 빠진 것처럼 손이 닿지 않는다. 기억이 조각조각이다. 루이. 루이는. 루이는 뭐지.
에밀리는 거울의 방을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벽에 붙은 촛불만이 노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금은 결혼 전야의 오후. 연회는 7시에 시작된다. 아직 4시간이 남아 있다.
계단을 내려가며 에밀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왜 떨리고 있지. 뭔가 무서운데 그 무서움이 뭔지 모른다. 이 느낌을 전에 느껴본 적이 있나. 그렇다. 자정이 올 때마다 느끼는 공포. 잊혀지는 공포. 그리고 누군가를 잃는 공포.
거실에서 소피를 만났다. 시녀는 에밀리를 보자 무언가 말하려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소피, 오늘 밤엔 누가 거울의 방에 올 건가."
"...백작님이신가 합니다, 부인."
백작. 루이. 그 이름이 가슴을 철렁하게 내려앉힌다. 왜. 왜 그 이름만으로 가슴이 아파.
"지금 어디 계신가."
"서재에 계신 것 같습니다.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고."
에밀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서재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고, 회랑을 통과했다. 손가락 끝의 따뜻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계속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서재의 문을 밀었다.
루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펜을 들고 뭔가를 쓰고 있었다. 에밀리를 보자 펜을 놓았다. 동작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깨질 것 같은 유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에밀리."
루이가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가슴의 움직임. 철렁 내려앉는 것. 아, 이건 기억이 아니라 몸의 기억이구나. 신체가 기억하는 감정.
에밀리는 한 걸음 다가갔다. 루이를 관찰했다. 그의 눈. 초점이 맞지 않는 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눈. 그리고 눈 밑의 검은 자국.
"넌 알고 있지."
에밀리가 말했다. 확신이 아니라 질문처럼.
"뭘."
"이 반복을. 날 반복되는 거울이 돌려보낸다는 걸."
루이의 어깨가 경직됐다. 긴 침묵이 흘렀다. 시계 소리만 들렸다. 틱톡. 틱톡.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증거.
"누가 말했어."
"어머니가. 백작모가."
"그래."
루이가 한 걸음 다가갔다. 에밀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반복의 패턴을. 넌 자정마다 기억을 잃지만, 난 계속 기억해. 넌 날 의심해. 넌 날 죽이려 해. 그리고 넌 날 구한다."
"구한다고?"
"그래. 마지막 순간마다, 넌 날 죽이지 않기로 선택해. 독약을 내려놓아. 나를 지키려고 해."
에밀리의 호흡이 빨라졌다. 루이의 말이 기억의 가장자리를 건드렸다. 자신이 한 선택들. 루이의 목에 독약을 들었던 손. 그리고 그 손을 내려놓았던 이유.
"그건."
"거짓이 아니야. 넌 알 수 있어. 이 손가락."
루이가 에밀리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끝에 남은 체온이 그대로 전달됐다. 아, 그래. 이건 기억이 아니다. 이건 진실이다. 기억이 없어도 몸이 알고 있는 진실.
"넌 나를 사랑했어. 기억이 없어도. 넌 나를 지키려고 했어."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건 뭐지. 이건 너무 위험한 말이다. 루이를 사랑한다. 그건 복수의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 그건 자신을 약하게 만든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난 여기서 나가야 해. 이 반복에서 벗어나야 해. 그리고 넌."
에밀리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넌 뭐라고 말하려고 했어."
루이가 에밀리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이 턱 아래에 닿았다. 그 접촉만으로도 에밀리의 심장이 요동쳤다.
"난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뭐."
"넌 나를 구원하려고 해. 이 악몽에서 날 구하려고 해."
에밀리가 루이의 손을 밀어냈다. 한 발 물러났다. 서재의 벽까지 밀려났다. 등이 차가운 벽돌에 닿았다.
"그건 거짓이야. 넌 내 감정을 조종하고 있어. 넌 이 반복을 알고 있으니까 내가 뭘 할지, 뭘 느낄지 다 예측할 수 있어. 넌 날 계산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에밀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은 분노가 아니었다. 공포였다. 자신의 감정이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 그리고 루이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뭘 해야 하는가 하는 공포.
루이의 입술이 움직였다. 에밀리는 그의 다음 말을 알았다. 같은 질문. 같은 말. 몇 번이나 반복된 그 질문.
"그렇다면 왜 넌 내 목에 독약을 넣지 않았어."
에밀리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이 자신의 모든 계획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루이가 한 걸음 다가갔다. 에밀리는 벽으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왜 넌 나를 지키려고 하는지."
에밀리의 손가락이 떨렸다. 벽을 짚었다. 손톱이 벽돌 사이의 회반죽을 파고들었다.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그 말이 나오자, 에밀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자신이 정말로 모르는 것이다. 왜 자신은 루이를 죽이지 않는가. 왜 매번 기억이 사라질 때마다 또 다른 버전의 자신이 루이를 구하려 하는가.
루이가 한 발 더 다가갔다. 에밀리의 얼굴과 루이의 얼굴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럼 이건?"
루이가 에밀리의 손을 다시 잡았다. 손가락 끝의 체온. 아, 이 따뜻함. 이것이 모든 것이 아닐까.
"이 체온은 뭐야. 이 따뜻함은 뭐야. 기억이 없어도 느끼는 이 감정은."
에밀리의 호흡이 더 빨라졌다. 루이의 가슴 가까이에서.
"그건 거짓이어야 해. 거짓이어야만 해. 넌 내가 복수를 포기하게 만들려고 해. 넌 내 분노를 빼앗으려고 해."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절망 때문이었다.
"분노가 뭐야, 에밀리."
루이가 에밀리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분노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쓰는 방패야. 하지만 넌 이미 알고 있어. 그 방패 뒤에 뭐가 있는지."
"뭐가 있는데."
에밀리가 물었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절망. 그리고 사랑."
루이가 에밀리의 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무서워하는 심장.
에밀리의 손가락이 루이의 가슴 위에서 떨렸다. 그 떨림이 루이에게도 전해졌다. 루이는 에밀리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난 너처럼 무서워. 이 반복이 끝날 때마다, 난 네가 기억을 잃을까봐 무서워. 넌 나를 모르게 될까봐 무서워. 하지만 동시에, 난 희망해. 다음 반복에서도, 넌 나를 찾을 거라고. 넌 나를 지킬 거라고."
에밀리가 루이의 손을 밀어냈다. 이번엔 힘이 없었다. 벽을 등지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건 조종이야."
"그렇다면 왜 넌 이 말을 듣고도 날 죽이지 않아."
루이의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에밀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길고 긴 침묵. 시계의 틱톡 소리만 들렸다.
에밀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기억 없는 눈물. 하지만 그 눈물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이 루이를 죽이지 않은 이유를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절망.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갈망. 그것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루이가 에밀리의 눈물을 닦았다. 손가락이 뺨을 따라 내려갔다. 그 접촉에 에밀리의 몸이 경직되었다가 풀렸다.
"이제 알겠어?"
루이가 물었다.
에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루이의 팔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슴이 루이의 가슴에 닿았다. 두 심장이 함께 뛰었다.
시계가 울렸다. 오후 4시.
"아직 시간이 많이 있어. 연회는 7시에 시작돼. 그 전에 넌 뭘 할 거야, 에밀리."
루이가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다. 넌 나를 죽일 거야, 아니면 나와 함께할 거야.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서재의 문이 열렸다.
"루이."
마르셀이 들어섰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에밀리와 루이가 서로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에밀리와 루이는 급히 떨어졌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마르셀의 눈은 이미 모든 것을 포착했다.
"아, 에밀리. 넌 여기 있었구나."
마르셀의 목소리가 달았다. 꿀처럼 달콤한 독이 섞인 목소리.
마르셀은 에밀리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천천히 루이로 옮겨갔다. 말없는 위협. 침묵의 무게. 그것이 서재 안에 가득 찼다.
"뭐 하는 거야, 루이. 신부를 혼자 두는 건 좋지 않은 징조야. 특히 결혼 전야에는."
마르셀이 에밀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밀리, 나랑 나가자. 루이는 아직 준비할 게 많아."
에밀리는 루이를 바라봤다. 루이의 눈이 마르셀을 보고 있었다. 그 눈 속에 있는 것은 두려움과 무언가 다른 감정이었다. 결의.
"아니야."
에밀리가 말했다. 마르셀의 손을 거절했다.
"난 여기 있을 거야."
마르셀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 순간, 그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리고 이내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전과 달랐다. 냉기가 서려 있었다.
마르셀은 에밀리를 노려봤다. 말없이. 오직 시선만으로. 그 시선 속에는 위협이 있었다. 그리고 약속이 있었다. 이것은 끝나지 않았다는 약속.
"자정이 오면, 모든 게 끝날 거야."
마르셀이 돌아섰다. 문을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져 갔다.
에밀리와 루이만 남았다.
"그가 뭘 알고 있어."
에밀리가 물었다.
"충분히 위험한 것들을."
루이가 에밀리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에밀리가 밀어내지 않았다.
"우리가 할 게 있어."
"뭐."
루이는 대답하지 않고 거울의 방으로 향했다. 에밀리를 이끌며.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갔다. 거울의 방으로 향했다.
은색 거울이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에밀리는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드레스를 입은 신부. 하지만 눈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루이가 뒤에서 에밀리를 안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신부와 신랑.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축제의 기쁨이 아니라 절박함으로 가득했다.
"이 거울이 뭐야?"
에밀리가 물었다.
루이는 거울을 바라봤다. 은색 표면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것을.
"이 거울은 죽음의 문턱에서만 나타나는 신비로운 유물이야.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한 남자의 절망이 응축된 것. 우리 가문의 저주를 반복시킨다. 자정이 올 때마다."
루이가 에밀리를 돌려 바라봤다.
"넌 기억을 잃지만, 난 계속 기억해. 반복을 끝내려면, 누군가가 이 거울을 깨뜨려야 해. 그런데 넌 할 수 없어. 왜냐하면 넌 기억을 잃기 때문이야. 매번 자정이 오면 모든 게 리셋되니까."
"그럼 넌?"
"난 할 수 있어. 난 반복을 기억하니까. 하지만 아직 아니야. 아직 자정이 아니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루이가 거울 옆에 놓인 촛대를 집었다. 무거운 청동으로 만든 촛대. 거울을 깨뜨릴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것. 그것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치 결심을 다지는 것처럼.
밤 5시, 거울의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른 발소리. 여러 명의 발소리.
루이와 에밀리는 거울 앞에서 떨어졌다.
문이 열렸다.
백작모 샤를로트가 들어섰다. 그 뒤로 시녀들과 하인들이 따라왔다. 백작모의 얼굴은 창백했다.
"루이."
백작모가 루이를 바라봤다.
"어머니."
"넌 뭘 하고 있어. 이 시간에 신부와 함께?"
루이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준비를 하고 있었어."
백작모는 에밀리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에밀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갔다.
"드 생-쥐스트 공작의 딸. 넌 루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넌 도구일 뿐이다. 우리 가문의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에밀리는 백작모를 마주봤다.
"그렇다면 왜 이 결혼을 강요하셨습니까?"
백작모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루이가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실수였다. 아들에게 감정을 허락한 것이 내 유일한 약점이다."
백작모가 에밀리를 노려봤다. 말없는 위협. 침묵의 무게. 그것이 에밀리를 압박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넌 도구다. 도구는 버려진다. 마르셀이 널 데려갈 것이다. 자정 이전에."
백작모는 거울을 바라봤다. 은색 표면이 백작모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표면 위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검은 그림자. 거울 속 깊숙한 곳에서 움직이는 무언가.
에밀리도 그것을 봤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것이 비치는 것을.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손이 움직이는 것을.
"그것이 저주다."
백작모가 말했다.
"저주?"
에밀리가 물었다.
"우리 가문의 저주. 이 거울에 갇혀 있는 것.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한 남자들의 절망이 모여 만들어진 것."
백작모는 돌아섰다.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오늘 밤 거울의 방에서 만나거든, 거울을 깨뜨리지 마. 그것은 우리 가문의 비밀이다. 루이는 이미 알고 있다."
백작모는 떠났다. 시녀들과 하인들도 따라갔다.
에밀리와 루이만 남았다.
에밀리는 거울을 다시 바라봤다. 거울 속 깊숙한 곳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그림자였다. 아니,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
"거울이 뭐야?"
에밀리가 물었다.
루이는 거울을 바라봤다. 은색 표면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것을.
"이 거울은 저주를 담는 그릇이야. 우리 가문의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할 때마다, 그 절망이 거울 속에 모여. 그리고 자정마다 그 절망이 반복을 만든다. 넌 기억을 잃지만, 난 계속 기억해. 반복을 끝내려면, 누군가가 이 거울을 깨뜨려야 해. 그런데 넌 할 수 없어. 왜냐하면 넌 기억을 잃기 때문이야. 매번 자정이 오면 모든 게 리셋되니까."
"그럼 넌?"
"난 할 수 있어. 난 반복을 기억하니까."
루이가 거울 옆에 놓인 촛대를 집었다. 무거운 청동으로 만든 촛대.
"하지만 아직 아니야. 아직 자정이 아니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루이가 촛대를 내려놨다. 그것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치 결심을 다지는 것처럼.
밤 6시, 연회가 시작되려고 했다.
에밀리는 침실에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저녁 드레스. 더 화려한 드레스.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시 빗었다.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몸은 이 모든 절차를 안다.
소피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연회가 시작됩니다."
"알았어."
에밀리는 거울 앞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드레스를 입은 신부. 하지만 눈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아니다. 눈이 변했다. 이전의 죽은 눈이 아니었다. 이제 그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결의. 그리고 사랑.
에밀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무도회장은 촛불로 밝혀져 있었다. 귀족 남녀들이 모여 있었다.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루이가 무도회장의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신랑.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에밀리의 숨이 멈췄다. 루이의 눈이 에밀리를 따라갔다.
에밀리는 루이에게 다가갔다. 주변의 귀족들이 속삭였다. 하지만 에밀리는 그들을 무시했다.
루이 앞에 섰을 때 루이가 손을 내밀었다.
"춤을 춰줄래?"
목소리가 떨렸다. 루이의 목소리는 항상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절망이 아니라 간절함이었다.
에밀리는 루이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가슴 속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루이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이 흐르고, 다른 사람들도 춤을 춘다. 하지만 에밀리의 세상에는 루이만 있었다.
춤이 끝났다. 주변의 귀족들이 박수를 쳤다. 루이는 에밀리를 바라봤다. 루이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밤 9시, 에밀리와 루이는 거울의 방으로 들어갔다.
은색 거울이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에밀리는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드레스를 입은 신부. 하지만 눈은 살아 있었다.
루이가 뒤에서 에밀리를 안았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어."
루이가 속삭였다.
"뭐가?"
에밀리가 물었다.
"자정. 그리고 반복의 끝."
루이가 에밀리를 돌려 바라봤다.
"넌 날 믿어?"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해."
루이가 거울 옆에 놓인 촛대를 집었다.
"뭐를."
"이 거울을 깨뜨려. 함께."
루이가 에밀리의 손을 잡았다. 촛대를 에밀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무거운 청동이 에밀리의 손에 전달됐다.
"넌?"
"난 이미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 이 반복 속에서 계속 죽고 또 죽어왔으니까. 하지만 넌 다르다. 넌 살아야 해. 이 반복 밖에서. 그리고 날 기억해 줄 거지?"
루이가 에밀리의 눈을 들여다봤다.
"기억할 거야. 자정이 와도. 기억이 사라져도. 이 손가락 끝의 체온으로 기억할 거야."
에밀리가 말했다.
"그럼 됐어."
루이가 에밀리를 안았다. 마지막 포옹.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알면서도.
시계가 울렸다. 밤 11시 50분.
"이제야."
루이가 말했다.
에밀리와 루이는 함께 촛대를 들어올렸다. 거울을 향해.
"기억해 줄 거지?"
루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에밀리는 대답했다.
"왜냐하면 난 너를 사랑했으니까."
촛대가 거울을 향해 날아갔다.
거울이 깨졌다.
은색 표면이 산산조각 났다.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 순간, 거울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쏟아져 나왔다. 비명 같은 소리. 고통 같은 울음. 저주가 풀려나가는 소리. 그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겹쳐 울려 퍼졌다. 우리 가문의 남자들이 품었던 절망.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한 모든 순간들.
세상이 밝아졌다.
자정의 종소리가 울렸다.
---
오후 3시, 거울의 방에서 눈을 뜬다.
손가락 끝에 남은 따뜻함이 먼저다.
에밀리는 눈을 떴다. 거울의 방. 하지만 거울이 없었다. 벽면에는 깨진 거울의 파편들만 흩어져 있었다.
에밀리는 손가락을 펼쳤다. 손톱 끝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은 흔적.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은.
에밀리는 거울의 방을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벽에 붙은 촛불만이 노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루이!"
에밀리가 외쳤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재로 향했다.
문을 밀었다.
루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펜을 들고 뭔가를 쓰고 있었다. 에밀리를 보자 펜을 놓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에밀리."
루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절망의 떨림이 아니었다.
에밀리는 루이에게 달려갔다. 루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기억해. 기억해 줄래. 난 너를 사랑해. 난 항상 너를 사랑했어."
에밀리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루이는 에밀리를 안았다.
"기억해. 난 기억할 거야. 이번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었다.
거울이 깨졌다. 저주가 풀렸다. 반복이 끝났다.
이제 그들은 자유였다.
손가락 끝의 따뜻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