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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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봉 입구의 돌기둥 사이에서 적혼과 백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혈의교의 검은 옷 무사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백설의 옷깃이 찢어져 있었고,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적혼의 눈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그 뒤로는 정파 기수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형!"

백설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한설은 조건반사처럼 몸을 날렸다. 정파 기수들의 칼날이 자신이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설은 계곡 아래로 몸을 던졌고, 낙엽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착지했다.

백설이 있었다. 그 뒤로 세 명의 검은 옷 무사들이 있었다. 암살동맹의 표식이 그들의 팔에 선명했다.

"도망쳐. 지금 당장."

한설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백설은 고개를 저었다. "형, 난—"

"움직여."

한설이 앞으로 나갔다. 세 명의 암살자 중 가운데 있는 자가 가늘고 긴 검을 들어올렸다. 독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한설은 그 독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칼이 부딪쳤다.

한설의 검술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네 명의 기연이 숨어 있었다. 첫 번째 암살자의 민첩함, 망혼의 폭발력, 천명의 남자의 깊이, 그리고 적혼과의 대면에서 얻은 것들. 한설은 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억누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한 명의 암살자가 쓰러졌다.

"형!"

백설이 다시 한 번 외쳤다. 이번엔 절망이 섞여 있었다. 한설은 돌아보지 않았다. 두 번째 암살자의 칼이 날아왔다. 한설은 몸을 굴려 피했다. 낙엽이 얼굴에 날렸다. 그 속에서 한설은 세 번째 암살자의 위치를 감지했다. 뒤에서 오는 칼. 아래에서 오는 발차기. 한설은 동시에 두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두 명 모두를 내려쳤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계곡에는 세 구의 시체와 흐르는 피만 남았다. 한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형…"

백설이 다가왔다. 한설은 돌아섰다.

그 순간, 위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정파 기수들이 계곡을 발견했다. 검은 그림자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형, 천명봉으로."

백설이 팔을 잡아 끌었다. 한설은 저항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계곡을 빠져나가자 비수가 날아왔다. 한설이 손을 들어 비수를 맞았다. 손가락이 벨렸다. 피가 떨어졌다. 그는 계속 달렸다.

산길이 끝나고 돌밭이 나타났다. 천명봉의 입구다. 고대 유적의 돌기둥들이 안개 속에 서 있었다. 한설과 백설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는 여전히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정파, 진무교, 그리고 암살동맹의 추격이 한데 섞여 있었다.

한설이 백설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 안쪽으로."

"형, 같이—"

"가."

한설이 밀어냈다. 백설이 돌아섰다. 그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설은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보았다.

백설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설은 뒤를 돌아막았다. 정파 기수 다섯 명이 돌기둥 사이를 뚫고 나왔다. 한설의 검이 올라갔다.

"멈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파 기수들이 멈췄다. 연설 장로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한설. 넌 정파의 자산이다. 기연도 정파의 것이다."

"아니다."

한설이 말했다.

"넌 정파의 도구가 아니다. 넌 강호의 도구다. 그리고 강호는 너를 원한다."

연설이 검을 들었다. 한설도 검을 들었다. 그 순간, 천명봉 유적의 돌기둥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안에서 백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한설의 몸이 움직였다. 의지와 무관하게. 한설은 연설을 지나쳤다. 정파 기수들을 지나쳤다. 그리고 유적 안으로 뛰어들었다.

백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었다. 혈의교의 검은 옷 무리들이 유적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적혼이 서 있었다.

"한설."

적혼의 목소리는 너무 차가웠다.

"넌 내 것이다."

한설의 검이 올라갔다. 백설이 한설 뒤에 서 있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형, 미안해."

백설이 중얼거렸다.

"난 형을 지킬 수 없어."

한설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들었다. 그 말 속에 담긴 절망을. 그 절망은 자신의 것과 같았다.

"백설. 넌 뭐야."

한설이 물었다.

"난… 난 형의 여동생이야."

백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난 암살동맹의 스파이야. 형을 감시하고, 형을 죽이려고 했어. 하지만 난 할 수 없었어. 형을 죽일 수 없었어."

한설이 돌아섰다. 백설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왜 고백해."

"왜냐면…"

백설이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작은 약병이 들려 있었다.

"난 형을 지켜야 해."

한설은 그 약병을 바라봤다. 백설의 눈이 결연했다. 하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게 뭐야."

"독이야. 암살동맹의 독."

백설이 약병을 들었다.

"이것을 마시면 형의 기연이 모두 사라져. 네 명의 영혼이 잠들어. 그럼 누구도 형을 원하지 않을 거야."

한설이 그 약병을 바라봤다. 그제야 이해했다. 백설의 선택지. 형을 지키는 방법. 암살동맹의 스파이로서 완수해야 할 임무와 여동생으로서 지켜야 할 형 사이의 갈등.

한설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것이 백설이 자신을 위해 선택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한설은 백설을 진정으로 이해했다. 여동생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려는 그 결연함을.

"그럼 넌?"

"난…"

백설이 약병을 들었다. 손이 더 심하게 떨렸다.

"난 여기서 그들을 막을 거야. 형이 떠나는 동안."

한설의 손이 뻗어 나갔다. 하지만 닿지 못했다. 백설이 빠르게 물러났다. 적혼이 웃음을 터뜨렸다.

"감동적이군. 정말로. 하지만 이제 끝이야."

적혼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혈의교의 검은 옷들이 한설을 향해 달려왔다. 한설의 검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 검은 흔들리고 있었다.

백설이 한설의 손을 놓으며 외쳤다.

"형, 계속 나아가. 넌 자유로워야 해."

한설이 돌아섰다. 백설은 이미 약병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대고 있었다.

"하지 마!"

한설이 외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백설이 약병을 마셨다.

그 순간, 유적의 돌기둥들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한설의 기연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 안에 있던 네 명의 영혼들이 서서히 잠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감각은 마치 자신이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한설은 깨달았다. 기연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무언가가 명확해졌다. 자신의 몸. 자신의 검. 자신의 의지. 네 명의 영혼이 자동으로 방어하던 것들이 사라지자, 오직 자신만 남았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강한지 몰랐다.

"백설!"

한설이 외쳤다. 하지만 백설은 이미 혈의교의 검은 옷들 앞에 서 있었다.

백설의 몸이 변했다. 암살동맹의 스파이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났다. 그 움직임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검술도, 발놀림도 정교해졌다. 독을 마심으로써 기연을 상실한 한설과 달리, 백설은 기연의 족쇄에서 벗어나 암살자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움직임은 빠르고, 정확하고, 냉정했다.

"형, 미안해. 이제 난 형을 지킬 수 있어."

백설의 목소리는 이제 차가웠다. 암살자의 목소리였다.

한설은 돌아섰다. 유적의 출구가 보였다. 뒤에서는 백설과 혈의교 무사들의 전투음이 들렸다. 하지만 한설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수 없었다.

한설이 유적을 빠져나왔다.

천명봉의 밖은 여전히 전장이었다. 정파, 진무교, 혈의교, 암살동맹이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정파 기수들의 추격음이 왼쪽에서 들렸고, 진무교 깃발이 오른쪽 능선에서 펄럭였다.

한설의 기연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한설은 평범한 검객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네 명의 영혼이 자동으로 방어하던 것들이 사라지자, 오직 자신의 검술만 남았다. 그것은 흔들림 없는 검. 의심 없는 검. 오직 자신의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검이었다.

한설의 검이 들렸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천명봉의 남쪽 경사면으로 내려갔다. 한설의 발이 자갈을 밟으며 미끄러졌다. 산길이 가파르고 험했다.

산길 아래로 내려갈수록 다른 세력들의 전투음이 들렸다. 정파의 검술, 진무교의 창법, 암살동맹의 침투음. 강호의 모든 세력이 천명봉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은 더 이상 한설이 아니었다.

산 아래로 내려간 한설은 숲의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스쳤다. 따뜻한 피가 흘렀다.

한설이 나무 위로 올라갔다. 가지에서 가지로 뛰어다녔다. 숨이 가파르고, 팔다리가 무거웠고, 옆구리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의 몸. 자신의 고통. 자신의 삶.

갑자기 숲이 끝났다.

한설은 고목마을 북쪽의 계곡 앞에 섰다. 수십 미터 아래로는 계곡물이 흘렀다. 한설이 뒤를 보았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기연을 잃은 평범한 검객은 강호의 모든 세력에게 쓸모가 없었다. 한설은 그것을 이해했다.

한설이 검을 들었다.

"도망쳤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설은 돌아섰다. 적혼이 숲에서 나타났다. 그 뒤로는 수십 명의 검은 옷 무사들이 있었다.

적혼의 얼굴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기연을 버렸으니 당연하지. 강호의 모든 것이 약탈자다. 너도 알겠지. 약탈자는 늘 강한 자의 손에 떨어진다."

"나는 약탈자가 아니다."

한설이 답했다.

"그럼 뭐냐."

"그저 검객일 뿐이다."

한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적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인간의 웃음이 아니라 기계의 소음 같았다.

"검객? 너는 검객이 아니다. 넌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적혼이 검을 들었다. 그 검은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가르쳐주겠다."

적혼이 달려왔다. 한설이 검을 들어 막았다. 충격이 한설의 온몸을 흔들었다. 한설이 물러났다. 적혼이 따라왔다. 한설이 또 물러났다.

계곡 가장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설이 발을 멈추고 공격으로 전환했다. 검을 들어 올렸다. 적혼의 검과 부딪혔다.

불꽃이 튀었다.

한설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적혼의 다음 공격이 한설의 얼굴을 스쳤다. 따뜻한 피가 흘렀다.

네 명의 영혼이 없으니 이러는 거구나. 한설이 깨달았다. 네 명의 무공이 한 몸을 나누며 움직일 때, 한설의 검술은 예측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한설뿐이었다. 평범한 재질의 검객.

그런데 그 평범함이 오히려 강했다.

네 명의 영혼이 자동으로 방어하던 것들이 사라지자, 한설의 검은 더욱 명확해졌다. 기연의 간섭 없이 오직 한설 자신의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검. 그 검은 흔들림 없었다. 각 공격이 더 정확하고, 더 빠르고, 더 날카로웠다.

한설이 반격했다. 검을 휘둘렀다. 정확했다. 적혼의 검과 부딪히는 각도가 완벽했다. 적혼이 뒤로 물러났다.

한설이 따라갔다.

"뭐냐."

적혼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놀라움이었다.

"기연을 버렸는데 더 강해졌다고?"

"기연은 저주였다."

한설이 답했다. 검을 들고 다시 달려갔다.

"네 명의 영혼이 내 몸을 나누며 싸웠다. 그들의 힘은 강했지만, 그들의 갈등도 강했다. 나는 항상 그들 사이에서 흔들렸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나뿐이다. 그리고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한설의 검이 적혼의 검을 가르며 올라왔다. 적혼이 몸을 날려 피했다. 한설이 따라갔다.

계곡 가장자리가 이제 적혼의 발끝에 닿았다.

"이제 끝이다."

한설이 말했다.

그 순간, 회오리 같은 바람이 계곡에서 솟아올랐다.

적혼의 검이 하늘로 날아갔다. 적혼이 뒤로 물러났다. 한설도 놀라서 뒤를 봤다.

계곡 아래에서 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검은 옷. 피로 흠뻑 젖은 옷. 그 옷은 혈의교 무사들의 피였다. 한설은 그 사람을 알아봤다.

백설이었다.

백설이 계곡에서 올라왔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 검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백설의 얼굴에는 상처가 많았다. 하지만 눈은 맑았다. 그 눈에는 암살자로서의 냉정함이 가득했다.

"형, 계속 나아가."

백설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차갑고, 날카롭고, 무정했다. 암살자의 목소리였다.

"난 이 자를 막을 테니까."

한설의 가슴이 철렁했다. 백설이 살아 있었다. 그것은 기쁨이자 동시에 공포였다. 살아남은 백설은 더 이상 자신이 아는 여동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

적혼이 웃음을 터뜨렸다.

"암살동맹의 암살자가 나를 이길 수 있을 줄 아는가?"

"모르지."

백설이 말했다.

"하지만 형은 가야 해. 형은 천명봉을 떠나야 해. 그리고 나는 여기서 지킬 거야. 형을 죽이려고 온 모든 것들을."

한설이 백설의 손을 잡았다.

"백설, 넌…"

"형은 가."

백설이 한설의 손을 밀어냈다. 그 손은 차가웠다. 그리고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형은 자유로워야 해. 기연을 버렸으니까 이제 형은 정말로 평범한 검객이야. 평범한 검객은 이 모든 것을 피할 수 있어. 형은 나를 남겨두고 가. 나는 형을 지킬 거야."

"백설, 나는…"

한설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난 넌 잃고 싶지 않아."

한설이 외쳤다. 그 목소리는 부러져 있었다.

백설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의 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방의 웃음이었다.

"형, 미안해. 난 형을 지킬 수 없어. 하지만 형은 나를 떠나야 해. 그리고 계속 나아가야 해. 형은 기연을 버렸으니까 이제 형의 삶은 형 자신의 것이야. 형은 정말로 자유야. 그 자유를 누려. 형을 위해서."

백설이 검을 들었다. 적혼을 향했다.

"이제 우리는 끝이야."

백설이 말했다. 그리고 달려갔다. 적혼도 검을 집어 들고 맞서갔다.

한설은 물러났다.

계곡의 경사면을 올라갔다. 뒤에서는 백설과 적혼의 검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속음이 계곡을 메웠다. 한설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들었다.

백설의 검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암살동맹의 스파이로서의 정체성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백설이 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한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돌아가고 싶었다. 백설을 다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백설의 말이 가슴을 짓눌렀다. 형은 자유로워야 해. 형은 나를 떠나야 해.

한설은 그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백설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으니까.

숲 위로 올라간 한설은 천명봉을 바라봤다.

산 전체가 전쟁터였다. 정파의 기치, 진무교의 깃발, 혈의교의 검은 옷. 모두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더 이상 한설이 아니었다.

한설은 그곳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걸어갔다.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발 아래로는 물이 흘렀다. 계곡물이었다.

한설이 멈추고 뒤를 봤다.

계곡 위에서 비명이 울려 나왔다.

한설의 발이 멈췄다. 그 방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백설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형은 나를 떠나야 해.

한설이 다시 앞을 봤다. 산길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한설이 걸어갔다.

걸음이 빨라졌다. 달리기가 되었다. 뒤에서 백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한설이 산 아래로 내려갔다.

고목마을은 이미 불에 타고 있었다. 정파의 전투로 인한 것이었다. 한설은 마을을 우회했다.

강호의 모든 곳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정파 기수들의 발소리가 북쪽에서 들렸고, 진무교 깃발이 동쪽에서 펄럭였다. 암살동맹의 침투음이 서쪽에서 들렸다. 강호의 모든 세력이 천명봉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설은 기연을 잃은 평범한 검객이었다. 아무도 더 이상 평범한 검객을 찾지 않는다.

한설이 마을을 벗어났다. 남쪽 길을 따라 걸었다. 뒤를 보지 않았다.

그 순간, 숲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옷. 차가운 눈. 한설은 그 사람을 알아봤다.

"안녕, 친구."

그것은 운영이었다.

한설은 순간 몸을 날렸다. 검을 뽑으며 운영을 향했다. 하지만 운영은 손을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싸우려는 게 아니야. 난 그저 길을 묻고 싶을 뿐이야."

한설이 검을 내리지 않았다.

"넌 누구냐."

"운영이야. 암살동맹의 암살자였던 자.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운영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넌 정말로 기연을 버렸구나. 신기하네. 기연을 버린 자가 이렇게까지 살아남다니."

"백설은?"

한설이 물었다. 그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백설? 아, 그 여자 말이군. 저 계곡에서 적혼과 싸우고 있을 거야.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죽을 가능성이 높지."

운영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건 넌 상관없어. 왜냐하면…"

운영이 한 발짝 다가왔다.

"넌 이제 예측 불가능하니까. 기연 없는 넌 더 위험해. 왜냐하면 넌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강호의 누구도 넌 예측할 수 없거든."

한설이 검을 들었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넌 왜 나타났냐."

"그건…"

운영이 말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넌 어디로 가야 할까? 강호를 떠나? 아니면 계속 강호 안에 머물러?"

한설이 검을 내렸다.

"넌 날 막지 않는 건가."

"막을 이유가 없어. 넌 이제 강호의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자야. 기연 없는 검객. 그런 넌 강호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야."

운영이 옆으로 비켰다.

"가. 그리고 계속 나아가."

한설이 운영을 지나쳤다.

"한 가지 더."

운영이 말했다.

"백설이 살아남는다면, 그 여자는 더 이상 넌 여동생이 아닐 거야. 암살동맹의 암살자로서 완성된 그 여자는 넌 죽여야 할 대상이 될 수도 있어. 그걸 기억해."

한설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걸어갔다.

뒤에서 운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자유의 일부겠지."

한설이 숲을 빠져나왔다.

천명봉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정파, 진무교, 혈의교, 암살동맹이 모두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설은 더 이상 그들의 중심이 아니었다.

한설은 평범한 검객이 되었다. 기연 없는 검객. 그리고 그 평범함 속에서 진정한 강함을 찾아야 했다.

산길을 내려가며 한설은 생각했다.

—기연 없이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백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설은 알았다. 그 대답을 찾는 길이 얼마나 험한지. 그 길 위에서 몇 명을 더 잃을지.

한설의 검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강호의 모든 것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설은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설은 이미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백설이 살아남았다면, 그 여자는 언젠가 형의 목을 노릴 것이다. 암살동맹의 암살자로서 완성된 그 여자는 기연 없는 형을 죽이기 위해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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