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명을 거스르는 검 8화
동굴의 어둠 속에서 한설의 눈이 떴다. 네 개의 빛이 동시에 깨어났다.
검은 어둠도 모든 것을 드러냈다. 백설의 눈물, 운영의 냉소적인 웃음, 석벽의 미세한 균열, 공기의 떨림까지. 하지만 보이는 모든 것이 다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한설은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다섯 개였다. 맞다. 다섯 개가 맞다. 하지만 왜 마치 다섯십 개처럼 느껴지는가.
각각의 손가락이 다른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다. 왼손 검지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왼손 중지는 첫 번째 암살자의 의지로. 왼손 약지는 망혼의 의지로. 왼손 소지는 천명의 남자의 의지로 움직였다.
"깨어났군."
운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설은 고개를 들었다. 운영은 동굴의 입구에 서 있었고, 손에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형, 형!"
백설이 한설을 안았다. 하지만 한설은 느낄 수 없었다. 백설의 팔이 자신을 안는 감각이 동시에 네 가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넌 이제 한설이 아니야."
운영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검이 동굴의 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불꽃이 튀었다.
"세 개의 영혼이 한 몸에 갇혔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었어. 하지만 넷이 되니 끝이야."
한설의 입에서 네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왜."
"언제."
"어디로."
"돌아가."
백설이 한설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우리 어디로 가야 해? 형, 대답해 줘."
한설은 백설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백설의 얼굴이 네 개로 보였다. 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명봉으로 가야 한다."
운영이 말했다. 그의 검이 동굴의 바닥을 쳤다. 돌이 부서졌다.
"그곳에만 답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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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봉으로 가는 길에서 한설의 팔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
산길을 오르며 백설이 한설의 팔을 감싸 안자, 첫 번째 암살자의 기억이 팔을 지배했다. 한설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백설이 바위에 부딪혔다.
"미안해."
한설이 말했지만, 그것은 한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세 개의 다른 목소리가 동시에 말했다.
백설은 일어나 앉았다. 눈물로 가득한 눈으로 한설을 바라봤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다시 한설 옆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운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 남자가 누구야?"
백설이 물었다. 한설이 대답할 수 없었으므로, 백설이 계속 말했다.
"형, 저 남자가 뭐해? 형을 어디로 데려가?"
한설은 백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네 개의 서로 다른 시선이 백설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암살자의 시선으로 보면, 백설은 "제거해야 할 방해물"이었다. 망혼의 시선으로 보면, 백설은 "정보의 원천"이었다. 천명의 남자의 시선으로 보면, 백설은 "무시할 존재"였다. 그리고 한설의 시선으로 보면, 백설은 "누나"였다.
한설의 입에서 네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미안해."
백설은 한설의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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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봉의 입구에 도착하자 운영이 멈췄다.
고대의 석문이 서 있었다. 문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설은 그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암살자의 기억이 그 글씨를 읽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명을 거역하는 자만이 천명을 초월할 수 있다."
한설이 읽었다. 네 개의 다른 목소리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제 이해하겠지?"
운영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넌 천명을 받은 게 아니야. 천명을 거역하라고 저주받은 거야. 천명봉의 기운이 너를 선택했어. 세상의 모든 기연자는 천명의 도구가 되지만, 넌 천명의 적이 되라고 선택받았어."
"그게 무슨 말이야?"
백설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모든 기연자는 결국 자신의 기연에 잠식당해.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르지. 이 남자의 기연은 자신을 강하게 만들수록, 자신을 파괴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어."
운영이 한설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마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자의 시선이었다.
"천명봉의 유적에는 수천 년 동안 기연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들은 모두 같은 길을 걸었어. 처음엔 축복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엔 저주라고 깨달았고, 마지막엔 그것도 모두 잊어버렸어."
"그럼 형은?"
백설이 물었다.
"이 남자는 다를 수도 있어.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잃어버렸거든. 만약 이 남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다면, 천명을 거역할 수 있을 거야."
운영이 돌아섰다. 그의 검이 석문의 틈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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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 안으로 들어가자, 세상이 변했다.
동굴의 벽에는 무수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손톱자국. 피. 뼈. 그리고 글씨. 절망한 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들이었다.
"천명을 거역하겠습니다."
"저는 내 뜻대로 살겠습니다."
"기연은 저주입니다."
"나는 평범한 검객이 되고 싶습니다."
한설은 그 글씨들을 읽었다. 첫 번째 암살자의 눈으로. 망혼의 눈으로. 천명의 남자의 눈으로. 그리고 한설 자신의 눈으로.
그 순간, 무언가가 한설의 가슴에서 울렸다.
"형!"
백설이 외쳤다. 한설의 몸이 흔들렸다. 한설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아니, 네 개의 입에서 네 개의 색깔의 피가 흘렀다.
"형, 형!"
백설이 한설을 안았다. 그 순간, 한설의 몸이 안정되었다. 백설의 온기가 네 명의 존재를 하나로 묶었다.
"내 손을 놓지 마."
한설이 말했다. 네 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울렸다. 아니, 한 개의 목소리로 울렸다.
"한설이의 목소리다."
백설이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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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을 나가려는 순간, 검이 울렸다.
빨간 빛이 동굴을 비추었다. 그것은 피의 기연이었다. 적혼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고, 그 검에는 수십 명의 시신이 매달려 있었다. 아니, 매달려 있지 않았다. 그것은 적혼이 수집한 기연자들의 기억이었다.
"한설."
적혼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처럼 들렸다.
"네 기연을 내게 내놔."
한설은 백설의 손을 놓았다. 백설이 물었다.
"형?"
"뒤로 물러나."
한설이 말했다. 이번엔 확실하게 한설의 목소리였다.
한설이 검을 들었다. 그것은 첫 번째 암살자의 검술이 아니었다. 망혼의 검술도 아니었다. 천명의 남자의 검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설 자신의 검술이었다. 평범하고, 서툰, 그리고 정직한 검술.
적혼의 검이 날아왔다.
한설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받아냈다. 첫 번째 칼날의 교차. 한설의 팔이 흔들렸다. 적혼의 기연이 한설의 기연을 짓누르려 했다. 하지만 한설은 밀려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설은 더 이상 기연에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해."
적혼이 말했다. 그의 검이 다시 날아왔다. 두 번째 칼날의 교차. 한설의 발이 반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한설의 검은 여전히 적혼의 검을 받고 있었다.
적혼의 검이 가속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한설은 밀려나지 않았다. 각 칼날마다 한설의 검은 정확하게 응했다. 기연의 힘이 아니라, 순수한 검술로. 손목의 각도. 팔의 위치. 발의 디딤. 모든 것이 계산되었다.
"뭐야?"
적혼이 외쳤다. 그의 검이 멈췄다. 적혼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떨린 적이 없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넌 기연을 버렸어?"
적혼이 물었다.
"아니."
한설이 말했다.
"기연이 날 거역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한설의 검이 적혼을 향해 움직였다. 그것은 빠른 검술이 아니었다. 강한 검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직한 검술이었다. 한 발 앞으로 나가고, 손목을 틀고, 검을 수직으로 내려꽂는.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검술. 하지만 누구나 완성할 수는 없는 검술.
적혼의 검이 부러졌다.
검신이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한설의 검은 계속 나아갔다. 적혼은 몸을 날려 피했다. 한설의 검이 동굴의 벽을 긋고 지나갔다. 불꽃이 튀었다.
"불가능해."
적혼이 중얼거렸다. 그는 물러나갔다. 그의 몸에서 빨간 빛이 사라졌다. 기연이 적혼을 버렸다. 적혼은 자신의 손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기연이 주인이 되었고, 적혼은 도구가 되었다.
적혼은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의 비명이 멀어져 갔다.
한설은 자신의 검을 내렸다. 백설이 다시 한설을 안았다.
"형, 형이 돌아왔어."
백설이 울음을 터뜨렸다.
"응. 돌아왔어."
한설이 말했다. 그것은 한설의 목소리였다. 오직 한설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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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깊숙한 곳에서, 한설은 돌판을 발견했다.
그 돌판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설은 그것을 읽었다.
"천명을 거역하는 자만이 천명을 초월할 수 있다."
"천명을 초월하는 자는 자신의 천명을 스스로 정한다."
한설은 그 글씨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수천 년 전의 기연자가 남긴 메시지였다. 그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형, 이제 뭐 해?"
백설이 물었다.
한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산 아래에서 검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파의 검이었다. 마파의 검이었다. 진무교의 검이었다.
강호의 모든 세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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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을 빠져나가는 순간, 말굽 소리가 먼저 들렸다.
십여 필의 말이 산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한설은 백설의 손을 잡고 동굴 입구 좌측의 바위틈으로 몸을 날렸다. 손가락 한 뼘의 공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무리 없이 몸을 숨겼다. 백설의 숨이 가빠져 있었다.
"진무교군."
백설이 속삭였다.
말 위의 검객들이 지나갔다. 진무교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들은 동굴로 향하지 않았다. 산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한설은 눈을 좁혔다. 그들은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형, 저들은?"
"정파를 향하고 있어."
한설이 중얼거렸다. 정파의 성은 여기서 남쪽으로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진무교가 정파의 성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은, 지금 강호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내려가자."
한설이 말했다. 두 사람은 바위틈을 빠져나와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밤하늘 아래 영약산맥의 능선이 검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산을 내려오는 도중, 한설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떨리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손이 떨리지 않았다. 세 명의 기연을 흡수한 후 손은 항상 어딘가 떨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설의 손은 자신의 손이었다.
"형, 적혼이가 정말 물러난 거 맞아?"
백설이 물었다.
"응. 하지만 적혼이가 두려워하는 건 날 아니었어."
한설이 말했다.
"자신의 기연이야."
백설이 눈을 크게 떴다.
"모든 기연은 결국 주인을 배반한다고 운영이 말했어. 천명의 경지에 이른 자들은 기연의 노예가 돼. 기연이 주인이 되고, 자신은 도구가 되는 거야."
한설이 산길을 재촉했다.
"적혼이는 수십 년을 기연만을 위해 살았어. 그래서 기연이 적혼이를 버렸어."
한설은 발걸음을 멈췄다. 산길의 한 지점에서 강호의 전경이 보였다. 남쪽으로는 백운파의 성채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진무교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날 봐."
한설이 백설에게 말했다.
백설이 형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눈에는 더 이상 네 가지 빛이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색깔만 있었다. 검은 눈동자. 그 안에 담긴 의지.
"내가 기연을 버린 게 아니야. 기연이 날 버렸어."
한설이 말했다.
"왜냐하면 난 기연의 노예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거든."
백설의 얼굴에 눈물이 맺혔다.
"형이... 형이 돌아왔구나."
"응. 완전히."
두 사람은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한설의 마음은 밝아지고 있었다.
산을 완전히 내려온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한설과 백설은 고목마을의 북쪽 숲 속에 몸을 숨겼다. 한설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백설이 묵은 식량을 꺼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밥을 먹었다.
"형, 지금 뭐 생각해?"
백설이 물었다.
한설은 불꽃을 바라봤다.
"운영이 말했어. 내 기연은 천명이 아니라고. 천명을 거역하려는 자에게 내려진 저주라고."
"그게 뭐가 다르다는 건데?"
"천명은 정해진 것이고, 저주는... 선택할 수 있는 거야."
한설이 말했다.
"천명이면 난 이미 정해진 길을 따를 수밖에 없어. 하지만 저주라면, 난 그 저주를 거역할 수 있어."
백설이 밥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그래서 형이 기연을 버린 거야?"
"기연을 버린 게 아니라, 기연에 복종하지 않기로 한 거야. 큰 차이가 있어."
한설이 말했다.
"내가 기연을 사용하되, 기연이 날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거지."
"그게 가능해?"
"모르겠어. 하지만 시도는 해 볼 거야."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설의 귀가 움직였다.
"누가 온다."
백설이 벌떡 일어났다. 한설은 검을 손에 들었다.
숲 사이로 나타난 것은 연우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자신의 피는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옷은 찢어져 있었다.
"한설!"
연우가 외쳤다.
한설은 연우의 상태를 재빠르게 훑었다. 상처는 있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정파가?"
한설이 물었다.
"진무교가 성을 포위했어. 아버지와 장로들이 저항하고 있는데..."
연우가 말을 잇지 못했다.
"혁명이가 왔다는 건가?"
"아니. 혁명이는 진무교의 본군 아래에 있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
연우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정파가 당신을 찾고 있어. 아버지가 명령했어. 당신을 찾아 데려오거나..."
연우가 말을 멈췄다.
"내가 정파로 돌아가면 진무교가 물러날까?"
한설이 물었다.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 진무교가 원한 건 당신이 아니라, 정파의 약화야."
한설이 이해했다. 혁명은 기연 중심의 강호 질서를 타파하려 했다. 그 방법은 정파와 마파의 균형을 깨는 것이었다.
"당신이 정파를 떠난 이상, 정파는 당신의 기연을 얻을 수 없어. 동시에 마파도 당신을 포획하지 못하고 있어."
연우가 말했다.
"혁명이는 당신을 원하지 않아. 당신을 원하는 건 적혼이고 아버지야."
한설은 연우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피로함과 절망이 섞여 있었다.
"당신이 영약산맥의 심부로 간다는 거, 맞아?"
연우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한설이 반문했다.
"아버지가 말했어. 천명봉의 유적에 대해. 그곳에만 가면 모든 기연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연우가 한설의 옷자락을 잡았다.
"나도 함께 가면 안 될까?"
백설이 연우를 바라봤다. 그 시선은 경계 어린 것이었다.
"정파가 너를 찾을 거야."
한설이 말했다.
"그러면 너도 위험해져."
"이미 정파는 나를 찾지 않을 거야."
연우가 말했다.
"아버지가 나를 버렸으니까."
그 말에는 깊은 상처가 담겨 있었다. 한설은 알았다. 정파 내부의 균열이 얼마나 깊은지.
백설은 한설을 바라봤다. 형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설은 백설의 눈을 마주했다. 누나의 불안감을 읽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신뢰도 읽었다.
"그래. 따라와."
한설이 말했다.
연우의 얼굴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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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고목마을을 떠났다. 북쪽으로. 영약산맥의 심부로.
그들이 떠난 지 불과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산 아래의 백운파 성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무교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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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산맥의 심부는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설이 처음 느낀 것은 기운의 밀도였다. 공기 자체가 무거웠다. 마치 물 속에 있는 것 같은 감각. 내공이 낮은 자라면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경맥이 손상될 정도였다. 하지만 한설과 연우, 그리고 백설은 모두 그 정도의 내공을 갖추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한설은 돌 조각들을 발견했다. 사람의 뼈였다. 아니, 뼈 이상의 무언가였다. 그것은 석화된 시신이었다.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시신들이 돌로 변해 있었다.
"형, 이건..."
백설이 중얼거렸다.
"기연자들이야."
연우가 말했다.
"이곳에서 수련하다 죽은 기연자들."
산을 올라갈수록 시신의 수는 늘어났다. 석화된 손가락들이 마치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한설은 걸음을 멈췄다. 앞에 거대한 바위 벽이 있었다. 그 벽에는 문이 그려져 있었다. 손으로 만져진 흔적이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손이 그 벽을 만졌다.
"천명봉의 유적이다."
연우가 말했다.
한설은 손을 벽에 댔다. 그 순간, 벽이 움직였다. 돌이 돌 위로 미끄러지며 입구가 열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빛났다. 파란빛이었다. 마치 달빛처럼 부드럽고, 동시에 매서운 그런 빛.
입구 안쪽, 돌 위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글씨였다.
"천명을 거역하는 자, 한설. 여기 도착하라."
백설이 그 글씨를 읽고 몸을 굳혔다.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한설만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들어가자."
한설이 말했다.
그들이 입구를 지나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정파의 군대였다. 아니면 마파의 군대였을 수도 있었다. 혹은 진무교의 군대.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한설은 백설과 연우의 손을 잡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돌벽이 다시 닫혔다.
유적의 내부는 거대한 홀이었다. 그곳의 벽에는 수천 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기연자들의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들 위에, 가장 최근에 새겨진 글귀가 있었다.
"천명을 거역하는 자, 한설. 여기 도착하라."
한설의 손이 떨렸다. 이번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도착을 예상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곳으로 유도했다.
"형, 이건..."
백설이 중얼거렸다.
"덫이야."
한설이 말했다.
그 순간, 홀의 중심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그것은 한설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기운은 한설이 알고 있었다. 천명의 경지에 도달한 자의 기운.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더 깊은 무언가.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왔군. 천명을 거역하는 자여."
그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마치 산 자체가 말하는 것처럼.
"넌 누구야?"
한설이 물었다.
"나는 천명봉을 지키는 자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검신이 파란빛을 내고 있었다.
"네 기연의 근원을 아는 유일한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