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정파의 침실 담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한설의 귓가에 울렸다. 운영의 검이 연설의 칼을 막아낸 그 순간, 정파 무사들의 발걸음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한설은 백설의 손을 잡고 담장 너머로 뛰어내렸다. 영약산맥의 야경이 펼쳐진다. 검은 능선들이 하늘을 가르고, 그 사이로 도망칠 길이 보인다.
"이 방향이 아니야."
혁명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그는 한설과 백설을 산맥 남쪽으로 이끌었다. 진무교의 사람들이 미리 준비한 길이었다. 정파의 추격대는 동쪽으로 향했고, 한설 일행은 서쪽의 좁은 산길을 통해 깊숙이 들어갔다.
백설이 한설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암살동맹의 스파이였던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형을 배신한 죄책감이 목을 조였다.
"형, 제발 멈춰."
"계속 가야 한다."
한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공허했다. 정파의 보호는 감금이었고, 백설의 우정은 감시였다. 강호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검뿐이었다.
혁명이 한설 앞에 섰다. 산길의 끝자락, 절벽 위에서 그는 검을 거두고 말했다.
"여기서 헤어진다. 난 정파의 추격대를 막을 테니, 너는 계곡으로 내려가. 저쪽은 혈의교의 영역이지만, 넌 살아남을 거야."
"왜 돕지?"
한설의 질문에 혁명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통한 웃음이었다.
"기연은 천명이 아닌 저주라고 생각하니까."
혁명은 돌아서 정파의 추격대를 향해 검을 그었다. 한설과 백설은 계곡으로 내려갔다.
밤새 계속된 도주. 아침이 되자 한설과 백설은 영약산맥의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이곳은 정파와 마파의 경계지대였다. 고목과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설이 멈췄다. 누군가 있었다.
남자는 바위 위에 서 있었다. 흰 옷을 입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한설이 지금까지 만난 누구와도 달랐다. 암살자도, 망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천명의 경지. 한설은 직감으로 알았다.
"적혼의 부하들 중 하나지?"
한설이 말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설을 바라봤을 뿐이다. 그 시선에는 수집가의 욕망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자신이 컬렉션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설이 뒷걸음질쳤다. 한설은 검을 뽑았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얼굴은 평정을 유지했다.
남자가 뛰어내렸다.
칼이 부딪히는 순간, 한설의 팔 전체가 저렸다. 단순한 통증이 아니었다. 뼈가 울리는 듯한 진동이 어깨까지 전해졌다. 한설은 검을 돌려 상대의 검을 밀어냈지만, 남자의 두 번째 일격이 이미 날아오고 있었다.
피해야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의 암살자들은 한설이 흡수한 무공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천명의 경지는 단순히 내공의 양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서였다. 그의 모든 검 한 자루가 천지의 기운 자체를 담고 있었다.
한설의 등에 남자의 검이 박혔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렸다기보다는 느껴졌다. 한설의 의식이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백설의 비명이 들렸지만, 멀리서 울려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설은 땅에 쓰러졌다. 피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오직 하나의 생각만 있었다—죽음이 다가온다.
남자가 한설 위에 섰다. 검을 들어 올렸다.
"기연을 빨아먹고 싶니?"
남자가 물었다. 그의 음성은 마치 악기를 울리는 것 같았다. 완벽한 음정, 완벽한 리듬. 이것이 천명의 경지에 이른 자의 말인가?
한설은 움직였다. 손을 뻗었다. 검을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 그 마지막 순간이 왔다.
남자의 검이 한설의 심장을 관통하려는 그때.
한설의 손이 남자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천명의 기연. 수십 년을 수련해온 내공. 그리고 그 기연을 만든 영혼 자체.
한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입에서는 피만 흘렀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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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돌아왔을 때, 한설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돌로 만든 동굴의 천장이었다. 햇빛이 구멍을 통해 들어왔다.
"형, 깨어났어?"
백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설의 손을 잡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며칠간을 그렇게 있었던 것 같았다.
한설이 입을 열었다. 나온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 몸은... 누구인가?"
첫 번째 암살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거친 톤.
백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형?"
한설이 눈을 깜빡였다. 다시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한설이다. 너는 내 여동생 백설이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목소리가 한설 안에서 울렸다.
"아니다. 나는 망혼이다. 암살동맹의 망혼이다."
세 번째 목소리는 천명의 경지에 이른 남자의 목소리였다.
"모두 거짓이다. 우리는 모두 한 명의 사람이다. 한 몸에 담긴 셋."
한설의 손가락이 경련했다. 백설의 손을 안으려던 움직임이 갑자기 주먹을 쥐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시 펼쳐졌다. 손가락이 떨렸다. 한설은 자신의 손이 누구의 의도를 따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백설이 형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형의 눈빛이 계속 바뀌고 있었다. 때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때로는 형처럼.
"형, 제발. 제발 돌아와."
한설은 백설의 얼굴을 봤다. 그런데 그 얼굴이 여러 개로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여러 명의 시선이 한 명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첫 번째 암살자의 관점. 망혼의 관점. 천명의 경지에 이른 자의 관점. 그리고 한설의 관점. 네 가지가 모두 다르게 보였다.
"내가... 돌아올 수 있을까?"
한설이 물었다. 목소리는 네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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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발소리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백설이 한설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운영이 나타났다. 검을 짚은 채로.
"깨어났나."
운영이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사흘을 자고 있었다. 의약사가 온 건 이틀째였다. 넌 그때도 깨어나지 않았다."
백설이 운영을 바라봤다. 증오심이 눈에 가득 찼다.
"당신이... 형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니다."
운영이 웃음을 흘렸다.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내가 만든 게 아니라, 그의 기연이 만들었다."
운영이 한 발 더 들어왔다. 동굴의 어둠이 걷혔다. 햇빛이 운영의 얼굴을 비추자, 한설은 그의 표정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과학자의 표정이었다. 실험을 지켜보는 자의 표정이었다.
운영이 검을 돌렸다. 검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반사된 빛이 동굴 벽에 드리워졌다. 마치 그림자 같은 형태로.
"세 명의 기연을 흡수했으니, 넌 이제 천명의 경지에 가까워졌다."
운영이 말했다.
"하지만 넌 이제 넌 아니야. 셋이 된 너."
한설은 자신의 몸을 느껴보려 했다. 운영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몸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피부 안쪽에서 세 개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첫 번째 것은 격렬했다. 끝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두 번째 것은 갈증 같았다. 무언가를 빨아들이려는 욕망 같았다. 세 번째 것은 가장 강했다. 압도적이었다. 모든 것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설의 의식은 네 개였다.
백설이 비명을 질렀다. 운영을 향해 손을 휘저으려 했지만, 한설이 백설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고 했다. 손이 움직인 것이 자신의 의도였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 손은 운영을 향해 움직이려고 했다. 칼을 빼내려고 했다. 아니, 칼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손에 칼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운영이 동굴의 벽에 기대었다. 검을 다시 돌렸다. 이번에는 동굴 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림자는 한설의 형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 개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여러 개가 겹쳐 있었다.
"기연을 버려야 한다."
운영이 중얼거렸다.
"버리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한설은 운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자신은 더 이상 한설이 아니었다. 아니, 한설도 맞고 동시에 다른 누군가도 맞았다. 첫 번째 암살자도 맞았다. 망혼도 맞았다. 천명의 경지에 이른 남자도 맞았다.
"기연을 버릴 수 있나?"
한설이 물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네 개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버릴 수 없다면?"
"버릴 수 없으면 넌 사라진다."
운영이 검을 짚은 채로 일어섰다.
"아니, 정확히는 흡수될 때마다 조금씩 사라질 거다. 네 번째를 흡수하면 세 명이 남고, 한설은 없어진다. 다섯 번째를 흡수하면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거다. 단지 행동만 남을 거야."
운영이 동굴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백설은 형을 붙잡았다.
"형, 제발... 제발 돌아와."
백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설은 여동생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이 여러 개로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여러 명의 시선이 한 명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한설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백설의 얼굴을 쓸어내리려고. 하지만 손가락은 백설의 눈물을 닦아냈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움직임이었다. 아니, 맞는 움직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손이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으니까.
"내가... 누구야?"
한설이 물었다.
백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형을 더 세게 안았다. 형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떨리는 게 아니었다. 형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싸우고 있었다.
"형, 제발. 제발..."
백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아니, 멀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설의 의식이 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네 개의 목소리가 한 명이 되려고 싸우고 있었다. 첫 번째 암살자가 분노했다. 망혼이 욕망했다. 천명의 경지에 이른 자가 침묵했다. 그리고 한설은...
한설은 무엇을 원했는가?
그 질문을 하는 것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한설은 알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보다, 누구가 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아니, 이미 자신은 누군가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아니라 누군가들이었다.
세 번째 기연의 흡수는 단순한 강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설의 존재 자체를 질문하는 것이었다. 아니, 질문이 아니라 부정이었다.
강호에서 그는 이제 한 명이 아니었다.
한설의 눈이 뜨였다.
그 눈에는 네 가지 빛이 담겨 있었다.
백설의 손이 한설의 손에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