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정파의 성 침실에서 한설이 눈을 뜼 때 새벽 서기(西氣)가 아직 창에 닿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는 뜻이다. 그의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세 명의 영혼이 한 몸에서 부딪히는 통증은 약간 가라앉았지만, 이제 그 통증은 진정한 위험 신호처럼 느껴졌다. 의약사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정신 파괴. 자아 붕괴.

문득 방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숨을 쉬지 않으려는 듯 조용했고, 움직임은 전투를 연상시켰다. 한설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누운 채 귀를 기울였다. 복도를 지나가는 발걸음들. 그리고 그들이 멈춘 곳은 자신의 방 앞이었다.

복도에서 낮은 목소리가 오갔다.

"여기인가."

"장로께서 명하신 대로."

한설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정신은 즉각적으로 깨어났다. 창밖을 보면 정파의 뜨락이 있고, 그 아래 두 길이 갈라진다. 왼쪽은 성의 중앙 광장이고, 오른쪽은 남쪽 담장으로 이어진 골목이었다. 그는 이미 그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지 사흘이 지났다.

방의 문이 천천히 밀렸다.

한설은 침대 위에서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검이 나타났다. 첫 번째 암살자의 무공—신속(身捷)이었다. 세상이 느려 보이는 순간, 세 명의 무사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복장은 정파의 것이었지만, 움직임은 암살자의 그것이었다. 검은 한설의 침대를 관통했고, 베개에서 모래가 흩어졌다.

"피했군."

가장 앞의 무사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한설이 본 것은 그들의 눈이었다. 죽음을 주기 위해 태어난 눈들이었다.

한설은 검을 들었다.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내공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세 명의 무공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 암살자의 신속, 두 번째 망혼의 섬세한 검선, 그리고 세 번째 무사의 잔상(殘象)—모두 그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왜?"

한설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정파가 나를 보호한다고 했는데."

가장 앞의 무사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정파의 모든 것을 따르지 않는다. 일부만."

그 말이 끝나기 전에 한설은 움직였다. 신속으로 그들의 검을 피하고, 망혼의 기억으로 검을 휘어 상대의 손목을 노렸다. 첫 번째 무사가 비명을 질렀다. 피가 흩어졌다. 하지만 한설의 몸도 흔들렸다. 세 명의 무공을 동시에 구동하려니 내공이 감당하지 못했다. 마치 세 마리의 뱀이 자신의 몸 안에서 동시에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 무사의 검이 한설의 옆구리를 노렸다. 한설은 피했지만, 창문에 부딪쳤다. 유리가 깨졌고, 시원한 밤공기가 흘러들었다.

그 순간, 방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감히!"

연우의 목소리였다.

방의 문이 폭발하듯 열렸다. 연우가 검을 들고 들어섰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손에 든 검은 백운파의 정통—천명검(天鳴劍)이었다. 그녀가 검을 휘자 공기 자체가 울렸다. 정파 무사들이 뒷물러났다. 연우는 그들을 따라가며 검을 계속 휘었다.

"내 아버지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연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들은 정파의 검이 아니라, 연설의 검일 따름인가!"

복도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한설은 깨진 창문을 통해 밖을 봤다. 정파의 뜨락은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다. 수십 명의 무사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은 정파의 표준 복장을 했고, 다른 한쪽은 더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정파의 성 중앙 광장에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나이가 많았다. 얼굴에는 수십 년의 권력이 새겨져 있었고,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연설이었다. 정파의 장로이자 연우의 아버지. 그의 손에는 검이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한설의 피부가 곤두섰다. 이것은 암살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파 내 파벌 싸움이었다.

한설은 빠르게 침실의 짐을 챙겼다. 옷 한 벌, 물주머니, 그리고 지난 사흘간 감춘 돈주머니. 창문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던 그때,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 것은 달랐다. 빠르고 경솔했다.

"형!"

백설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한설이 백설을 봤을 때, 그녀의 팔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뭐 한 거야?"

한설이 물었다.

"암살동맹의 상관이 나한테 형을 죽이지 말라고 명했어. 그런데 정파의 장로들이 나한테 형의 위치를 알려주라고 했어. 둘 다 거부할 수 없으니까..."

백설이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정파의 무사들에게 검을 썼어. 다섯 명 정도. 충분할 거야. 형, 우린 나가야 해."

한설은 자신의 여동생을 봤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암살동맹의 스파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여동생으로서. 두 개의 역할 사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넌 뭐야, 백설."

한설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배신감이 있었다.

"정파의 스파이야? 암살동맹의 스파이야? 아니면 그냥 나를 이용하려는 거야?"

백설이 한설을 봤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차갑고, 감정이 없었다.

"난 너를 지키려고 했어. 그게 전부야."

"그게 전부라고?"

한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웃음이 아니었다. 절망의 웃음이었다.

"정파는 나를 이용하려고 했고, 넌 정파와 암살동맹 사이에서 나를 감시했어. 결국 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네."

"형, 지금 싸우는 건 아니고..."

백설이 말을 끝내기 전에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더 들렸다. 이번에는 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정파의 복장을 입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일반 여행객의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설은 그를 알았다.

혁명이었다.

"늦었나?"

혁명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정파의 균열이 더 빨리 벌어질 줄 알았는데. 연설은 여전히 옛날 방식을 고집하네. 노인은 때가 됐다."

"넌 뭐 하는 거야?"

한설이 물었다.

"정파를 돕는 거야? 아니면 나를 돕는 거야?"

혁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셋 중 누구도 아니야. 난 진무교를 돕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넌 정파와 혈의교 사이에서 이용당하고 있어. 정파는 널 통제하려고 했고, 혈의교는 널 제거하려고 한다. 둘 다 넌 도구야."

한설이 검을 들었다.

"그럼 넌 뭔데?"

"나? 난 그냥 관찰자일 뿐이야. 하지만 네가 정파를 벗어나고 싶다면, 이 길을 따라와."

혁명이 손가락으로 복도의 왼쪽을 가리켰다.

"거기 담장이 있어. 그걸 넘으면 강호가 있어. 정파도 혈의교도 닿지 못하는 곳이야. 적어도 지금은."

한설은 백설을 봤다.

"같이 가자."

"난 못 가. 나는 정파에서 이미 들통났어. 나라도 남아서 연우를 돕지 않으면, 형이 탈출할 기회가 없어."

백설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결정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암살자야. 형은 검객이야. 우리는 다른 길을 가야 해."

한설이 말을 하려다가, 창밖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려고?"

그 목소리는 낮고, 신비로웠다. 누군가가 창문 밖의 담장 위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 형태만 보였지만, 한설은 그것이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정파도, 혈의교도, 진무교도 아닌 다른 곳으로?"

"누군데?"

한설이 물었다.

그 형태가 담장에서 뛰어내려 창문 근처에 착지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오래된 시간을 담고 있었다.

"이름은 운영이야. 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검객일 뿐이야."

운영이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안개가 흐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리고 넌 내가 찾던 사람이야. 기연을 가진 자."

한설이 검을 들었다.

"또 다른 세력인가?"

"세력? 아니야. 난 세력 따위는 관심 없어. 난 그저 강호의 규칙이 깨지는 걸 보고 싶을 뿐이야."

운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넌 그 규칙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왜냐하면..."

운영이 한설을 바라봤다.

"기연은 버려야 하거든."

"뭔 소리야?"

한설이 물었다.

"기연을 어떻게 버려? 이미 내 몸에 들어와 있는데."

"방법은 있어. 하지만 그건 나중이야."

운영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없었다. 하지만 한설은 그가 언제든 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도망쳐. 정파의 장로들이 곧 올 거야. 그리고 혈의교도 이미 움직이고 있어. 영약산맥이 넓지만, 모두가 너한테 시선을 돌렸을 때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어."

한설은 마지막으로 백설을 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어."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한설은 운영과 함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정파의 뜨락에서는 여전히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고, 연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를 찾아내라. 그 자는 정파의 자산이다. 자산은 관리되어야 한다!"

한설과 운영이 담장을 넘어 정파의 성을 떠날 때, 한설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기연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정파가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공포.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공포. 세 명의 영혼이 한 몸에서 부딪히고 있고, 강호의 모든 세력이 자신을 노리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도 자신을 이용하고 있었다.

"넌 지금 뭘 생각하고 있어?"

운영이 물었다. 그들은 정파의 성에서 멀어져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파가 나를 도구라고 했어. 혁명도 그렇게 말했어. 넌 기연을 버리라고 했어. 모두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한설이 대답했다.

"그 중에 누가 맞는 거야?"

운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맞지 않았어. 모두 틀렸어. 그리고 모두 맞아. 이게 강호의 본질이야.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고 거짓이야."

"그럼 난?"

한설이 물었다.

"난 뭐야?"

"그건 넌 스스로 알아야 해."

운영이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넌 천명이 아니야. 그리고 도구도 아니야. 그럼 뭐냐? 그건 영약산맥에 가서 알 수 있을 거야."

한설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 본문

정파의 성 뜨락에서 칼이 부딪치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한설이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봤을 때, 이미 정파의 검객 수십 명이 무장을 갖추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동작은 질서정연했다. 마치 사냥감을 포위하는 사냥꾼들처럼.

"저게 뭐야?"

백설이 한설의 어깨 뒤로 다가섰다. 여동생의 얼굴이 창백했다.

"정파가 우릴 잡으러 온 거야. 더 정확히는..."

한설이 입을 다물었다. 정파의 뜨락 중앙에서 연설의 목소리가 울렸다. 늙은 장로의 음성이었지만, 거기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명령이 담겨 있었다.

"그를 찾아내라! 그 자는 정파의 자산이다. 자산은 관리되어야 한다!"

한설의 몸이 경직됐다. 자산. 그 단어가 자신을 명확히 정의했다. 보호 대상이 아니라. 도구. 물건. 통제 대상.

백설이 한설의 팔을 움켜잡았다.

"형, 우리 도망쳐야 해. 연설 할아버지가 진짜 화났어. 저건 포위야. 정파 전체가 움직이고 있어."

"연설이 뭐하는 거야?"

한설이 중얼거렸다. "3화에서 연우가 경고했다. 정파가 나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군가는 날 없애려 한다고. 그게 연설이었구나."

뜨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우였다.

"아버지! 이건 정파의 본뜻이 아닙니다! 한설은 정파의 손님이고—"

"손님? 그 자는 도구야, 딸아."

연설의 음성이 연우의 말을 짓눌렀다. 그 목소리 속에는 아무런 의심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확신만 있었다.

"기연은 정파의 소유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호의 균형이 무너진다. 그리고 저 자의 기연은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태야. 의약사의 보고를 받았다. 세 명의 영혼이 섞여 있고, 그것이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고.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야."

한설이 창을 통해 정파의 마당을 봤다. 연설이 서 있었다. 백발의 장로, 화경 경지의 고수, 백운파의 실권자. 그리고 지금 자신을 죽이려는 자.

"제거하라. 혈의교보다 먼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파의 검객들이 방향을 바꿨다. 뜨락에서의 전투가 갑자기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었다. 방향이 바뀐 것이다. 정파 내부의 누군가가 저항하고 있었다.

"연설 장로! 이건 미친 짓입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한설은 그 음성을 알았다. 진무교의 혁명이었다. 그는 정파의 뜨락에 있었다.

"진무교가 여기 있었어?"

백설이 중얼거렸다.

"아, 그리고 저건..."

한설의 눈이 좁혀졌다. 뜨락의 한쪽에서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파의 검객들과 정체불명의 인물이 맞서고 있었다. 그 사람의 검법은 정파의 어느 파벌과도 다른 것이었다. 자유로웠다.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저건 누구야?"

"모르겠어. 하지만..."

백설이 갑자기 한설의 팔을 잡아끌었다.

"형, 지금 당장 나가야 해! 저 싸움이 심해질수록 우리가 탈출할 시간이 많아져!"

백설의 판단이 정확했다. 한설은 여동생의 손을 잡고 침실의 뒷문으로 향했다. 그 순간, 창문이 부서지며 무언가가 안으로 날아들었다.

한설이 몸을 날렸다. 화살이 지나갔다. 정파의 화살이었다.

"또 다른 암살자들!"

백설이 외쳤다. 침실 밖의 복도에서 검을 든 인물들이 나타났다. 정파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냉정했다. 이것은 포위가 아니라 사냥이었다.

한설이 검을 뽑았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기연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자신이 믿었던 정파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공포.

첫 번째 검객이 도약했다. 한설은 본능적으로 암살자의 무공을 썼다. 첫 번째로 흡수한 기연의 검법이었다. 검객의 칼이 한설의 칼에 부딪혔고, 검객은 뒤로 날아갔다.

"형! 이쪽이야!"

백설이 복도의 다른 쪽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나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을 막고 서 있는 인물이 있었다.

연설이었다.

늙은 장로가 한설과 백설 사이에 섰다. 그의 검은 이미 뽑혀 있었고, 칼날이 달빛을 반사했다.

"한설이라 했던가. 좋은 이름이다."

연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온화해 보였다.

"하지만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너의 기연이다. 그것이 강호의 균형을 위협한다."

"제 기연이 뭐라고 알고 있습니까?"

한설이 물었다.

"죽음 직전에 상대의 기연을 흡수한다."

연설이 대답했다.

"그것은 천명이 아니다. 그것은 저주다. 저주는 통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통제될 수 없는 저주는 제거되어야 한다. 너를 정파에 들인 것은 너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너를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 목표가 달성될 수 없다면..."

연설이 검을 들었다.

"너는 필요 없다."

한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말이 자신을 명확히 정의했다. 도구. 그리고 도구가 쓸모없으면 버려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연설의 검이 날아들었다.

한설은 본능적으로 검을 맞췄다. 하지만 연설의 내공은 자신이 흡수한 어느 기연과도 비교가 안 됐다. 화경 경지의 고수. 수십 년의 경험. 한설은 밀려났다.

"형!"

백설이 소리쳤다. 그 순간, 백설이 연설의 옆구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독약이었다. 암살동맹의 독약.

연설이 몸을 날렸다. 독약은 공기를 가로지르며 사라졌다.

"암살동맹? 넌 누구냐?"

연설이 백설을 바라봤다.

"정파의 딸이면서 암살동맹의 스파이냐?"

백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체가 들통났다.

"아, 그렇구나. 이 자식도 정파의 도구가 아니었구나."

연설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거해야 한다. 도구가 아닌 것은 위험하다."

연설이 검을 들었고, 그 검이 백설을 향했다.

그 순간, 담장에서 무언가가 뛰어내렸다.

검이 부딪쳤다. 연설의 검과 다른 검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화경 경지의 내공이 폭발했다.

그 형태가 담장에서 뛰어내려 창문 근처에 착지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오래된 시간을 담고 있었다.

"또 누군데?"

연설이 물었다.

"이름은 운영이야. 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검객일 뿐이야."

운영이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안개가 흐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연설과의 검 비비는 순간적이었지만, 그곳에서 흘러나온 내공의 흔적은 화경 경지에 버금가는 수준을 시사했다.

연설이 한 발 물러섰다.

"화경 경지 근처의 고수네. 그럼 넌 누구 쪽이냐? 진무교냐?"

"쪽? 아니야. 난 쪽 따위는 관심 없어. 난 그저 강호의 규칙이 깨지는 걸 보고 싶을 뿐이야."

운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냉소적이었다.

"그리고 이 자는 그 규칙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기연을 가진 자라는 뜻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운영이 한설을 바라봤다.

"기연은 버려야 한다는 거야."

한설이 운영을 봤다.

"뭔 소리야? 이미 내 몸에 들어와 있는데 어떻게—"

"방법은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운영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는 이미 검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가 흘러나왔다. 한설은 그것을 느꼈다. 그것은 세 번 죽음의 경계를 건넌 자만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도망쳐. 정파의 장로들이 곧 올 거야. 그리고 혈의교도 이미 움직이고 있어. 연설이가 이 자를 제거하려 할수록, 모든 세력이 더 빨리 움직일 거야. 영약산맥이 넓지만, 모두가 너한테 시선을 돌렸을 때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어."

운영이 연설과 마주 섰다. 둘의 검기가 공중에서 부딪혔다. 연설은 한 발 더 물러났다.

한설은 백설의 손을 잡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어."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한설과 백설은 운영이 만들어낸 틈을 통해 침실을 빠져나갔다. 정파의 뜨락으로 나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뜨락에서는 여전히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고, 혁명의 목소리가 연설에 맞서고 있었다.

"정파는 정말 미쳤군요! 이것도 도의인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한설은 알았다.

한설과 백설이 담장을 넘어 정파의 성을 떠날 때, 한설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기연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정파가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공포. 백설이 자신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공포.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정말로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공포.

세 명의 영혼이 한 몸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암살자의 영혼. 망혼의 영혼. 그리고 한설 자신의 영혼. 그들이 점점 더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의약사가 경고한 정신 파괴의 신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한설은 알 수 없었다.

"넌 지금 뭘 생각하고 있어?"

운영이 물었다. 그들은 정파의 성에서 멀어져 어두운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백설은 한설의 뒤에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죄책감으로 뒤틀려 있었다.

"정파가 나를 도구라고 했어. 혁명도 그렇게 말했어. 넌 기연을 버리라고 했어. 모두가 다른 말을 하고 있어."

한설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그 중에 누가 맞는 거야? 누가 날 진정으로 도우려는 거야? 아니면 모두가 날 이용하려는 거야?"

운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슬픈 것이었다.

"아무도 맞지 않았어. 모두 틀렸어. 그리고 모두 맞아. 이게 강호의 본질이야.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고 거짓이야. 정파는 너를 도우려고도 했고, 이용하려고도 했어. 혁명은 혁명을 위해 너를 써먹으려고 했고, 동시에 너를 진정으로 구하고 싶기도 했어. 그리고 난?"

운영이 멈춰 섰다. 달빛 아래에서 그의 눈이 반짝였다.

"난 그냥 강호의 규칙이 깨지는 걸 보고 싶어. 그게 너든, 남이든 상관없이."

"그럼 난?"

한설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뭐야? 도구인가? 아니면 규칙을 깨뜨릴 도구인가? 정파의 자산인가? 진무교의 희망인가? 아니면 강호 전체의 재앙인가?"

"그건 넌 스스로 알아야 해."

운영이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넌 천명이 아니야. 그리고 도구도 아니야. 너는 뭔가 다른 거야. 그 다른 게 뭐냐? 그건 영약산맥에 가서 알 수 있을 거야."

한설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정파는 자신을 죽이려 한다. 혈의교는 자신을 노린다. 진무교는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백설은—

한설이 백설을 봤다. 여동생이 검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속에는 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더 복잡한 감정도 있었다.

"형, 난 정말..."

백설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 단어가 모든 것을 말해줬다. 백설도 자신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형을 사랑한다는 것.

한설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었다.

"영약산맥은 저쪽이야."

운영이 가리켰다. 동쪽 지평선 너머로 검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었다. 영약산맥. 천명이 모이는 곳. 기연의 근원지.

"거기 가면 뭘 할 수 있어?"

한설이 물었다.

"기연을 버릴 수 있어?"

"모르겠어. 아무도 가본 적이 없어."

운영이 대답했다.

"하지만 넌 가야 해. 왜냐하면 거기 말고는 넌 갈 곳이 없거든. 강호의 모든 곳이 넌 노린다. 정파, 혈의교, 진무교, 암살동맹. 모두가. 거기만이 넌 숨을 수 있는 곳이야."

"거기서 뭘 찾을 거야?"

"넌 알아야 해."

운영이 말했다.

"기연은 버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버리는지는 넌 스스로 깨달아야 해. 그게 강호의 진정한 규칙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이야."

운영이 몸을 날렸다. 그의 형태가 어두운 밤하늘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한설은 백설의 손을 잡았다.

"우리 가자. 영약산맥으로."

"형, 거기 가면 죽을 수도 있어."

백설이 말했다.

"여기 있어도 죽을 거고, 거기 가도 죽을 거야. 그럼 뭐가 다르냐고 물을 거지?"

한설이 대답했다.

"여기는 정해진 죽음이야. 거기는 선택한 죽음이야. 그 차이가 있어."

한설은 백설을 이끌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정파의 성이 점점 작아졌다. 앞에서는 영약산맥이 검은 봉우리를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한설의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공포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각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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