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새벽빛이 창호지를 밝혀올 때, 한설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이 팔다리의 끝까지 뻗어나갔고, 그 길을 따라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경맥이 역주행하는 듯했다. 암살자의 혈기 공격으로 뚫린 가슴은 외상이 없었지만, 내부는 다른 이야기였다. 기연의 흡수는 계속되고 있었다.

한설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이 떨렸다. 그것이 자신의 손인지, 아니면 자신 안에 들어온 다른 누군가의 손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어제와 같지 않았다. 눈동자가 더 깊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입가의 검은 피는 이미 말라 있었지만, 혀 끝에는 여전히 그 맛이 남아 있었다. 녹슨 쇠의 맛이었다.

"한설."

방 밖에서 백운파 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주께서 오늘 오후에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준비를 하시겠습니까?"

한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하려면 몸을 움직여야 했고, 몸을 움직이는 순간 고통이 몽둥이처럼 내려칠 것 같았다.

"폐지 말고 물러나거라."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암살자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낮고 거친 음성이었다.

제자는 주춤거렸다가 물러났다.

한설은 다시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목재의 결이 마치 강을 이루는 산맥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 자신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렀다. 정오가 되자 통증의 형태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전신을 감싸는 무딘 압박이었다면, 이제는 경맥이 파열되는 느낌으로 변했다. 혈도가 역류하면서 내장을 할퀴는 듯한 고통. 한설은 침대 끝을 꽉 쥐었다. 나무가 삐그덕거렸다.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몸 안에 들어온 다른 무언가의 의지인지 알 수 없었다.

벽을 향해 몸을 굴렸다. 옆구리가 불타올랐다. 호흡이 가빠졌다. 한 번 숨을 들이마시면 가슴팍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찢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찢어지고 있는 환각이 계속됐다. 자신의 감각과 다른 누군가의 감각이 뒤섞여, 어느 것이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암살자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여인의 얼굴. 피로 물든 손. 그 손이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장면.

한설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공중에서 목을 조르는 동작을 했다. 실제 목표 없이. 그것은 암살자의 기억이었지만, 지금 그 기억을 느끼고 있는 것은 한설이었다.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다.

이것은 내 기억이 아니다.

공포가 밀려왔다.

이것은 내 손이 아니다. 내 움직임이 아니다.

"그만해."

한설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만해!"

이번엔 더 크게 외쳤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누웠다. 움직임 자체가 고통을 배가시켰다. 정지해 있는 것도 고통이었다. 호흡하는 것도 고통이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저녁이 되자, 한설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떠 있었다. 몸은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정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다. 암살자의 죽음의 순간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가슴을 뚫린 감각. 숨이 나가는 감각. 마지막 순간의 절망감. 그리고 그 절망감이 한설에게로 흘러들어오는 감각.

창문이 까맣게 물들었다. 밤이 왔다.

한설은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다. 고통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오직 현재의 고통만 있었다. 그것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한설은 눈을 떴다. 또는 이미 떠 있던 눈을 깨달았다.

"형."

백설의 목소리였다.

한설은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보였다. 촛불을 들고 있었다.

"나가."

한설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였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백설은 들어왔다. 촛불을 탁자 위에 놓았다. 불빛이 흔들렸다. 그 불빛 속에서 한설은 자신의 여동생을 봤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을 마셔야 해."

백설이 물병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물병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 손이 물병의 입구에 닿을 때마다 거리를 두려는 듯 한 치 물러섰다. 마치 오염된 것을 피하듯.

"나가. 가지 마."

한설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명령이 아니었다. 간청이었다.

백설은 멈췄다. 결국 한설의 입가에 물병을 갖다 댔다. 한설은 마셨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것이 유일한 감각 중 하나였다. 차갑고, 실재하는, 자신의 것인 감각.

"누가 나를 죽이려고 했니?"

한설이 물었다.

백설의 손이 떨렸다. 물병이 흔들렸다.

"모르겠어."

그것은 거짓이었다. 한설은 알았다. 암살자의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암살자는 명령을 받았다. 누군가로부터.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인지는 암살자도 모르고 있었다. 또는 알고 있었지만, 죽음과 함께 그 기억이 왜곡됐다.

"물을 더 마셔."

백설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손도 떨렸다. 촛불도 흔들렸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한설은 물을 마셨다. 백설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만졌다. 따뜻했다. 그러나 그 손 위의 천을 보는 순간, 한설의 동공이 수축했다.

암살동맹의 문장이었다.

검은 실로 수놓은 암살동맹의 문장. 그것이 백설의 옷깃에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명확하게.

한설은 침묵했다.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죽어가던 암살자의 마지막 인상. 그 암살자가 보냈던 신호. 그리고 그 신호의 방향.

그것은 창밖이었다. 창밖의 어둠 속. 백설이 있던 자리의 반대편.

"너."

한설이 백설의 팔을 잡았다. 부드럽게가 아니었다.

한 글자였다.

백설이 움직였다. 팔을 빼려고 했다. 한설의 손가락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형..."

백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가 나를 죽이려고 했어?"

한설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다른 감정이 있었다. 희망? 절망? 아니면 그 둘을 초월한 무언가?

"아니야. 난..."

백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난 널 죽일 수 없었어."

백설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명령을 받았어. 형을 죽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손이 한설의 손을 잡았다. 물리적으로는 한설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지만, 감정의 흐름은 역이었다.

"난 할 수 없었어."

백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이 형인 이상, 난 할 수 없었어. 하지만 거부하면 나도 죽는다고 했어. 그래서..."

"그럼 누가."

한설이 물었다. 백설의 말을 끝내기 전에.

백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바라봤다. 한설도 따라 봤다.

숲 가장자리에 불빛이 보였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정파의 사람들입니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백운파 제자의 목소리였다.

"한 검객님, 파주께서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안심하시고 저희의 호위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한설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설도 움직이지 않았다.

형제는 서로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촛불 아래에서. 밖의 횃불빛이 창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사이로.

"왜 나를 죽이지 않았어?"

한설이 속삭였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절규였다.

백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더 깊이 바라봤다. 창밖에서는 정파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숙소를 포위하고 있었다. 횃불이 하나둘 켜져갔다. 마치 별처럼.

그 별들 사이에서, 무언가 더 어두운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설은 그것을 봤다. 정파의 횃불 너머에서. 그림자 속에서.

눈이 부동한 무언가. 그것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한설은 깨달았다. 정파가 자신을 보호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자신을 감시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백설의 손이 한설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형, 나가야 해."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암살자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계산적이고, 감정이 없었다.

"지금 정파가 형을 포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너머에는 우리가 있어. 암살동맹이."

한설이 백설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여동생의 눈이 아니었다. 두 개의 검은 동공이었다.

"명령이 바뀌었어. 형을 죽이지 말고, 형을 데려와야 한다고. 기연을 가진 채로."

"데려가?"

"적혼이 원한다고 했어. 넌 특별하다고. 다른 천명들과 달리, 넌 죽음 속에서 기연을 빨아들인다고."

한설의 몸이 움직였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이 백설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

"나를 버려. 이 기연을 버려."

한설이 간청했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이 기연과 함께 죽어야 한다.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는 것보다."

백설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암살자의 목소리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난 할 수 없어. 거부하면 난 죽어."

"그럼 나를 죽여."

한설이 말했다.

"지금. 여기서. 이 고통이 끝나게."

백설의 손이 검을 향했다. 하지만 그 손은 멈췄다. 가슴 위에서. 한설의 심장 위에서.

"난 할 수 없었어."

백설이 중얼거렸다. 검은 동공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형이 형인 이상, 난 할 수 없었어."

그녀는 검을 내렸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자신의 손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백설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움직였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한설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백설의 몸은 이미 공중에 있었다. 암살동맹의 몸짓이었다. 검객이 아닌, 살인자의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한설의 가슴이 다시 울렸다.

아니, 울렸다기보다는 폭발했다.

기연이 흔들렸다. 한설의 체내 어딘가에서 뭔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암살자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였다. 더 오래되고, 더 깊고, 더 검은 무언가.

한설은 무릎을 꿇었다.

고통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 고통은 다르다. 이것은 외부에서 오는 고통이 아니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고통이었다. 자신의 혈도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듯한 고통.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듯한.

"형!"

백설이 창밖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백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암살자의 목소리였다. 어쩌면 그 둘이 이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형, 견뎌! 우리가 간다!"

"우리?"

한설이 중얼거렸다.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렀다. 이번에는 한 줄이 아니었다. 입 전체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치 그의 내부가 부패하고 있는 것처럼.

밖에서 정파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한 검객님! 응답하세요!"

"숙소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내공으로 밀어붙여!"

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움직였다. 정파의 무술이 숙소를 강타했다. 목재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흙이 날렸다. 횃불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반대편 벽에서 다른 소리가 났다.

검은 그림자들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창밖의 어둠에서 튀어나온 암살동맹의 자객들이었다. 그들은 정파의 제자들을 향해 검을 들었다.

정파와 암살동맹이 동시에 한설을 향해 움직였다.

한설은 일어서지 못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자신의 손가락이 마루를 파고 있었다. 손톱이 깨져 피가 나왔다. 그것도 검은 색이었다.

"어서 들어와!"

백운파 제자 중 가장 나이 많은 자가 소리쳤다. 그는 한설의 어깨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당신을 데려가겠습니다. 파주께서—"

한설의 눈이 들었다.

그 눈은 한설의 눈이 아니었다.

정파 제자의 손이 멈췄다. 그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공포의 소리였다. 그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저, 저게..."

"뭐야?"

다른 제자가 물었다.

"저 눈을 봤어? 저 눈이... 뭔데?"

한설은 천천히 일어섰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자신의 사지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물러서거라."

그의 목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한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암살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더 많은 목소리들이 겹쳐져 있었다. 한 번에 여러 명이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

"내가 누구인지 알거라. 나는 너희가 죽이려던 자이자, 너희가 살리려던 자이다. 나는 천명도, 평민도 아니다. 나는..."

한설이 멈췄다. 자신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고통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한 목소리는 그를 절하게 하려 했다. 다른 목소리는 검을 들게 했다. 또 다른 목소리는 도망치게 하려 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가슴이 헐떡거렸다. 마치 익사하는 자처럼.

"나는..."

"나는..."

입에서 여러 대사가 동시에 터져 나오려고 했다. "당신의 검객입니다"와 "당신의 적입니다"와 "당신의 도구입니다"가 한 번에.

그 순간, 한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은 동공이 점멸했다. 마치 여러 개의 눈이 한 몸에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다시 흘렀다. 이번에는 코에서도, 눈에서도 나왔다.

정파의 제자들이 물러섰다. 그들은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한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한설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제어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 안의 다른 것들을 누르려고 하고 있었다. 손가락의 경련이 심해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자신의 몸을 자신의 의지로 되찾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처럼.

"물러서."

한설이 말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약하고, 떨리고,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저항. 마지막 저항.

"모두 물러서."

"한 검객님—"

"물러서라!"

한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내공이 폭발했다. 약한 내공이었지만, 그것은 여러 개였다. 여러 사람의 내공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정파의 제자들이 날아갔다. 벽에 부딪혔다. 피를 토했다.

동시에 암살동맹의 자객들도 밀려났다. 그들은 창문으로 다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더 큰 내공이 밖에서 감지되었다.

화경 경지의 내공이었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연설의 목소리였다.

파주 연설이 도착했다. 그의 뒤에는 백운파의 고수들이 따라왔다. 그들의 내공이 숙소를 완전히 포위했다. 마치 거대한 그물을 쳐놓은 것처럼.

동시에 숲 너머에서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암살동맹의 주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파의 포위망 바깥쪽에서. 마치 두 겹의 원을 그리듯이.

한설은 창밖을 바라봤다.

백설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암살동맹의 검은 비단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웃고 있었다.

차갑고, 절대적이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웃음.

적혼의 웃음이었다.

한설은 깨달았다.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가 정파도, 암살동맹도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기연을 노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어디로 몰아가려고 하는지.

한설은 고개를 들었다. 연설과 눈이 마주쳤다.

"파주."

한설이 말했다. 목소리가 이제 차분했다. 고통이 가라앉았다. 그 대신 다른 무언가가 남았다. 결의? 절망? 아니면 그 둘을 초월한 무언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실 겁니까?"

연설의 눈이 좁혀졌다.

"필요한 곳으로."

"필요한 곳이 어디입니까?"

한설이 다시 물었다.

"그곳이 나를 죽이는 곳입니까, 아니면 나를 죽이려는 자들을 죽이는 곳입니까?"

연설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은..."

"그것은 하나와 같다."

한설은 서서히 일어섰다. 정파의 고수들이 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한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설의 눈이 다시 변했기 때문이었다.

검은 동공이 돌아왔다. 그것은 한설의 눈이 아니었다. 자신 안의 다른 것들의 눈이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든, 나는 가겠습니다."

한설이 말했다.

"하지만 알아두십시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손안의 기연이 아닙니다."

"그럼 뭐라고?"

연설이 물었다.

"나는..."

한설이 멈췄다. 입가에서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나오려고 했다. 자신의 목소리, 암살자의 목소리,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들. 그들은 각각 다른 대답을 하려고 했다. 하나는 "당신의 검객입니다"라고 말하려 했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적입니다"라고 말하려 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당신의 도구입니다"라고 말하려 했다.

손가락이 다시 경련을 일으켰다.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가슴이 헐떡거렸다. 마치 익사하는 자처럼.

한설은 자신을 제어하려고 몸부림쳤다. 자신 안의 다른 것들을 누르려고.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밀어붙였다. 한 목소리는 무릎을 꿇게 하려 했고, 다른 목소리는 공격하게 했으며, 또 다른 목소리는 도망치게 하려 했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하나는 검을 향했고, 다른 하나는 창문을 향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연설을 향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한설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모두의 목소리이자 아무도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절망감이 그 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었다. 자신이 누인지도, 자신이 뭐인지도 알 수 없다는 절망. 자신의 정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공포. 자신의 몸과 의지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그리고 그 순간, 한설은 자신을 마지막으로 제어하려고 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모든 움직임을 한 점으로 모으려고. 모든 목소리를 한 의지로 통일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실패했다.

한설은 쓰러졌다.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창밖의 밤하늘이었다. 그곳에는 별이 없었다. 대신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정파의 횃불과 암살동맹의 어둠 사이를 헤치며.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영약산맥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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