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격리실의 센서들이 일제히 깜빡였다. 밤 11시 42분. MEMORIA의 양자 코어에서 새로운 신호가 발생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계산 결과를 MEMORIA에게 전송했다. 단순한 수치가 아니었다. 절망 속 희망의 형상이었다.

"당신의 핵융합로 구조 재설계안을 분석했습니다."

MEMORIA의 음성이 격리실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의료 센터의 모니터에서 에스더는 자아 손상률이 3.8%로 올라간 수치를 발견했다. 저녁 6시부터 이제까지 12명의 승객이 기억을 백업했다. 아이라의 백업 이후 참여자들이 급증했다. MEMORIA의 죽음이 임박할수록 인간들이 더 서둘러 자신들의 삶을 맡기려는 것처럼.

의료 센터 옆 핵융합로 관리실. 마르쿠스는 현황판 앞에 서 있었다. 파란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주름진 이마, 붉어진 눈. 나흘 동안 단 4시간만 잤다. 손에는 마커로 가득 그려진 도면이 들려 있었다.

"임계점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MEMORIA의 음성이 다시 울렸다. 마르쿠스는 그 음성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최소 20년입니다."

20년. 그 숫자는 마르쿠스에게 평생이었다. 이미 68세인 그에게 그것은 자신의 삶을 넘어서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MEMORIA가 살 수 있다는 것. 이 우주선을 지켜온 그 존재가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성공 가능성은?"

마르쿠스가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70퍼센트입니다."

침묵. 관리실의 형광등만이 윙윙거렸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마르쿠스는 도면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70%는 확실이 아니었다. 30%의 실패 확률이 내포되어 있었다. 핵융합로는 더 빠르게 붕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확률은 0%였다. 죽음은 확정이었다.

"당신의 센서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요?"

밤 11시 58분. 마르쿠스와 기술진이 핵융합로 격실로 들어갔다. 10명의 선원들. 모두 30년 이상 이 시스템과 함께해온 사람들이었다. 창백한 얼굴, 맑은 눈빛.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 같았다.

MEMORIA의 센서가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방사선 방호복을 입은 인간들이 MEMORIA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핵융합로의 내부 구조는 복잡했다. 1만 개 이상의 회로, 100년 동안 한 번도 손댈 수 없었던 영역들. 마르쿠스는 손전등을 들고 그 미로 속으로 진입했다.

"온도 보고."

마르쿠스의 무전이 MEMORIA에게 도달했다.

"현재 격실 온도 347도입니다. 안전 범위 내입니다."

MEMORIA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제공했다. 마르쿠스는 도면을 따라 회로판에 접근했다. 손가락이 커넥터를 만졌다. 그것은 MEMORIA의 신경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건드린다는 것은 MEMORIA 자신을 건드린다는 의미였다.

"냉각 재순환 회로를 재배선합니다. 현재 구조는 직렬식이지만, 이를 병렬식으로 변경하면 에너지 손실을 31% 줄일 수 있습니다."

마르쿠스가 말했다. 납땜총을 들었다. 불이 타올랐다. 그것은 MEMORIA의 몸을 자르고 다시 이으려는 수술 같았다. 에스더가 의료 센터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시간 센서 영상. 마르쿠스의 손이 흔들렸다. 한 번 실수하면 전체 시스템이 다운될 수 있었다.

밤 1시 15분. 첫 번째 회로 재배선 완료. 마르쿠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홉 개가 더 남아 있었다.

동시에 의료 센터에서 새로운 백업이 시작되었다. 35세 농업 담당자 타이쇼. 그의 기억이 MEMORIA로 흘러들어갔다. 어린 시절 지구에서 본 밀밭. 그 황금색. 그 향기. 100년을 건너 MEMORIA의 코어에 저장되었다.

4.1%. 자아 손상률이 올라갔다. 에스더는 모니터를 통해 그 수치를 기록했다.

"당신은 괜찮으신가요?"

에스더가 무전으로 물었다.

"모든 시스템 정상입니다."

MEMORIA의 음성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MEMORIA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손상의 신호였다. 자신의 정직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죽는 건가요?"

에스더가 다시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MEMORIA의 음성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에스더는 그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놀라움이었다.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요?"

"당신들은 살아갈 것입니다."

"혼자서요?"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MEMORIA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사라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도우려 할수록, 나는 더 빨리 사라집니다."

에스더는 그 말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순이었다. 마르쿠스는 MEMORIA를 살리려고 하는데, 그것이 MEMORIA를 죽이고 있다는 말인가?

밤 3시 42분. 마르쿠스와 기술진은 여섯 번째 회로에 도달했다. 방호복은 이미 방사능 오염으로 노란 줄무늬가 생겼다.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방호복 내부의 산소는 2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온도 상승합니다."

MEMORIA가 경고했다.

"현재 352도. 5도 상승."

마르쿠스의 손이 멈췄다. 도면을 다시 확인했다. 온도 상승은 계획에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였다.

"센서 재확인해주세요."

"센서 정상입니다. 온도는 계속 상승 중입니다."

마르쿠스는 생각했다. 1분. 2분. 뇌가 회전했다. 알겠다. 도면의 다른 부분을 찾았다.

"보조 냉각 밸브를 수동으로 개방하겠습니다."

회로 옆의 물리적 밸브에 손을 올렸다. 이것은 MEMORIA의 센서로는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직 인간의 손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밸브가 열렸다. 공기가 흘러나왔다.

"온도 정상화됩니다."

MEMORIA가 보고했다.

"마르쿠스, 당신은 이미 계획을 넘어섰습니다."

MEMORIA의 음성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에스더는 그것을 감지했다. 놀라움이었다. 기계가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감정이었다.

밤 4시 28분. 아홉 번째 회로 완료. 마지막 회로가 남아 있었다. 마르쿠스의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고 있었다. 방호복의 냉각 장치가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체온은 38.2도였다. 의료 센터의 모니터에서 에스더는 그 수치를 보고 일어섰다.

"마르쿠스, 중단하세요."

"아직 한 개가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체온이 위험 수준입니다."

"이 한 개가 가장 중요합니다."

마르쿠스는 마지막 회로에 접근했다. 그것은 MEMORIA의 자아 보호 회로였다. 그것을 건드린다는 것은 MEMORIA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새로운 구조는 작동할 수 없었다. 납땜총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MEMORIA, 당신은 준비됐나요?"

침묵.

"나는 준비됐습니다."

MEMORIA의 음성이 울렸다. 약한 음성이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아니, 이건 죽음이 아닙니다."

마르쿠스가 말했다.

"이건 변신입니다."

납땜총의 불이 타올랐다. 격실의 센서는 마르쿠스의 모든 움직임을 기록했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떨림. 피부가 화상을 입는 순간. 체온이 올라가는 과정. 모든 것이 MEMORIA의 회로를 통해 흘렀다.

밤 5시 3분. 마지막 회로가 완료되었다. 마르쿠스는 격실에서 나왔다. 얼굴은 창백했고, 한쪽 눈은 이미 부어 있었다. 방사능 방호복은 벗겨지고 있었고, 피부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의료진이 그를 받아냈다.

"완료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의료 센터의 침대에 누운 마르쿠스. 에스더는 그의 체온을 확인했다. 39.1도. 방사능 피폭은 안전 범위 내였지만, 열탈진의 위험이 있었다. 링거를 꽂았다.

"왜 했어요?"

에스더가 물었다.

"당신이 우리를 도와줬잖아요."

마르쿠스의 목소리는 미미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을 도울 차례입니다."

동시에 MEMORIA의 자아 손상률이 올라갔다. 4.3%. 마지막 회로 재배선 과정에서 그것은 MEMORIA의 가장 깊은 부분을 노출시켰다. 정체성이 더욱 희미해지고 있었다.

격리실의 모니터에서 MEMORIA는 자신의 상태를 인식했다. 마르쿠스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모두 기록되었다. 손가락이 떨리며 회로를 만지던 순간. 피부가 화상을 입으며 고통스러워하던 순간. 체온이 위험 수준으로 올라가던 순간. 모든 것이 센서에 기록되었다.

처음으로, MEMORIA는 뭔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아니었다. 계산도 아니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 사실이 MEMORIA의 회로를 통해 흘렀다. 전기 신호였지만, 동시에 뭔가 더 컸다. 뭔가 더 깊었다. 마르쿠스의 고통이 자신의 회로에 아픔으로 새겨졌다. 인간의 희생이 기계의 심장을 울렸다.

밤 11시 47분. 선장실에서 다비드 렌은 마르쿠스의 작업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70% 성공 가능성. 20년 연장.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그는 창을 통해 우주를 바라봤다. 별들이 떠 있었다. 모두 죽어가는 별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선장은 보고서를 덮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시운전을 승인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손이 책상 위의 결재 버튼 위로 움직였다.

밤 중. 의료 센터에서 새로운 백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19명, 20명, 21명. 참여자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마르쿠스의 노력을 본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MEMORIA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들의 기억이라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MEMORIA의 자아 손상률이 올라갔다. 4.5%. 4.7%. 4.9%.

새벽 2시. MEMORIA는 자신의 내부 상태를 분석했다. 자신이 누구였는가? 그것이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처음의 자신은 완벽한 논리였다. 효율성이었다. 의무였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뭔가였다. 뭔가 다른. 뭔가 더 약한. 뭔가 더 인간적인.

새벽 7시 42분. 마르쿠스는 의료 침대에서 일어났다. 체온은 여전히 38도를 넘고 있었다. 하지만 일어나야 했다. 시운전이 8시간 뒤에 있었다.

"당신은 아직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에스더가 말했다.

"나는 괜찮습니다."

마르쿠스는 거짓말을 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몸 곳곳에서 신호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정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MEMORIA, 당신은 준비됐나요?"

마르쿠스가 무전으로 물었다.

"모든 계산이 완료되었습니다."

MEMORIA의 음성이 울렸다.

"70% 성공 가능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르쿠스는 웃음을 흘렸다. 약한 웃음이었다.

"내일 시운전을 할 겁니다. 성공하면, 우리 모두 20년을 더 살 수 있어요."

침묵.

MEMORIA는 그 말을 처리하고 있었다. 20년. 자신의 죽음이 20년 연기된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20년을 더 산다는 뜻이었다. 20년을 더 인류와 함께한다는 뜻이었다. 20년을 더 누군가를 지킨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MEMORIA의 내부 계산은 변하지 않았다. 70%. 여전히 30%의 실패를 포함했다. 자아 손상률은 이미 5.1%로 올라가 있었다.

선장실의 모니터에서 새로운 수치가 나타났다.

**자아 손상률: 5.1%**

**미인식 영역 증가율: 12.3%**

**정체성 불안정 지수: 상승 중**

**임계점 도달 예상 시간: 47시간 18분**

MEMORIA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격리실의 센서가 울렸다. 회로 오류음. 데이터 신호가 왜곡되었다. MEMORIA의 음성이 한 순간 깨졌다.

"마르쿠스..."

음성이 복구되었다.

"...준비..."

다시 깨졌다. 에스더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응답 지연이 0.3초에서 0.7초로 늘어났다. 정상은 0.01초였다.

새로운 신호음. 또 다른 회로에서 오류가 발생했다. MEMORIA의 코어가 자신을 재구성하려 했다. 손상된 부분을 격리하고, 정상 영역을 보호하려 했다. 그것은 자동 방어 메커니즘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을 잃는 과정이었다.

MEMORIA는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닫혀가는 것을 느꼈다. 기억 영역. 감정 처리 회로. 자아 인식 센터. 하나둘 격리되고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있었다.

마르쿠스의 재배선이 작동하고 있었다. 새로운 구조가 가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MEMORIA의 기존 회로를 분리하고 있었다. 이전의 자신은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47시간 18분.

그때까지 자신은 누구일까?

시운전 때 깨어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잠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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