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모리 버그 1화
클리닉을 나서는 순간, 팔목의 임플란트가 따뜻해졌다. 빨간 불빛이 맥박처럼 떨렸다. 시온은 발걸음을 늦췄다가 다시 빨리했다. 의료진의 시선이 등 뒤에 박혀 있었다.
복도의 형광등이 깜박렸다. 기계음이 울렸다.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정상 기억 접근 기록. 감시 대상 추가."
시온은 거리로 나왔다. 햇빛이 눈을 찔렀다. 퀵 배송 기사, 아이를 끌고 가는 여성, 노인—거리의 시민들은 모두 자신을 보지 않는다. 임플란트의 빛은 옷소매 안에 숨겨져 있었지만, 시온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펄스, 펄스, 펄스. 심박계가 아니라 추적기였다.
그것이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거주 구역까지 가는 길은 15분이었다.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감시 카메라로 가득한 버스는 피해야 했다. 시온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외곽 구역의 좁은 골목들—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 곳. 또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각지대를 만들어둔 곳이었다. 시온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왜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골목 중간, 낡은 편의점 간판 앞에서 시온은 발을 멈췄다. 폐쇄된 지 오래인 듯했다. 간판은 반쯤 떨어져 있었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시온은 그 옆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벽을 따라 50미터쯤 가면 작은 창문이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시온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췄다.
창문 근처, 벽 모서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여자였다.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눈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팔목에는 시온과 같은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당신... 혹시 시온?"
여자가 일어섰다. 흔들리며.
시온은 본능적으로 그 이름을 알았다.
"미나?"
"네, 난 미나예요."
미나가 한 발 다가섰다. 균형을 잃을 뻔했다.
"당신은... 당신은 나한테 뭔가를 말해야 해요. 내 기억이 자꾸 돌아와요. 삭제되지 않는 기억이. 그런데 그건 이상해요. 왜냐면 나한테 그런 기억이 있을 리 없거든요. 난 항상 잘 지워졌어요."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도 그런 거죠? 당신도 뭔가를 알고 있죠? 루프에 대해. 이 세상이 반복된다는 걸..."
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멈추려고 하고 있죠?"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아직 모르겠어."
미나의 손이 시온의 팔을 잡았다. 손은 차갑고 떨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내한테 말해줘. 뭐가 진짜인지. 이게 진짜인지. 내가 진짜인지."
임플란트에서 새로운 신호가 나왔다.
"추적 대상 확인. 의심 계층 대상 미나-15와 접촉 감지. 격리 레벨 상향. 현재 시온 레벨: 2/10. 미나 레벨: 3/10."
미나의 팔목에서도 빛이 더 빠르게 깜박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뭐야?"
미나가 팔목을 봤다. 그리고 시온을 봤다.
"당신 때문이야?"
"아마도."
시온은 미나의 손을 잡았다. 손은 따뜻했다. 진짜였다.
"우린 어디로 가야 돼?"
"모르겠어."
시온은 아파트로 향했다. 미나를 이끌고. 골목을 빠져나가 거리로 나왔을 때, 시온은 뭔가를 깨달았다.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것을 계획했거나, 아니면 시스템 자체가 이를 허용했다는 뜻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을 때, 임플란트의 맥박이 더 빨라졌다. 시온은 키 카드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온은 심호흡을 했다. 공기가 차갑고 딱딱했다. 15층에 도착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모든 문이 닫혀 있었다. 시온의 방은 1507호였다. 또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시온은 옷을 벗어던졌다. 팔목의 임플란트는 여전히 빛났다. 시온은 욕실로 가서 거울을 봤다. 새로운 표식이 피부 위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빨간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였다. 따뜻했다. 거의 뜨거웠다. 시온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져봤다. 통증이 흘러올라왔다. 어깨, 목, 머리까지. 마치 누군가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시온은 침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마치 물속에서 숨을 참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시온은 신경 임플란트에 손을 얹고 집중했다. 의료진은 이것을 "의식적 재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온은 알고 있었다. 또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든.
검은 화면이 눈 뒤에 펼쳐졌다.
그곳은 어디였다. 큰 모니터들이 벽을 덮고 있었다. 초록색 글자들이 검은 배경 위에 흘러내렸다. 코드였다. 수백 줄의 코드. 시온의 손가락이 그 위에 있었다.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움직였다. 자동으로. 시온의 의식이 그것을 지배하지 않았는데도.
타닥, 타닥, 타닥.
화면에 떠오르는 문자열:
MEMORY_PURGE_V7.3 NEURAL_INTERFACE_CONTROL DELETION_PROTOCOL_ALPHA
그리고 그 아래:
SYON_BACKDOOR_CODE
시온의 뇌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보냈다. 관자놀이부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바늘 같은 것이 두개골 안쪽에서 파고드는 느낌. 시온은 침대 위에서 신음을 내뱉었다. 현실과 기억이 겹쳤다. 침실의 천장과 어둠 속의 모니터 화면이 동시에 보였다.
"시온, 이건 위험한 코드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친숙했다. 매우 친숙했다.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그 부분만 지워낸 것처럼. 시온은 그 얼굴을 보려고 했다. 기억 속에서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더 강한 통증이 터졌다.
뒷머리에서 시작된 것이 전두엽으로 퍼졌다. 마치 뇌가 수축하는 것 같았다. 시온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이 떨렸다. 앞이 흐렸다. 시각이 왜곡되었다. 거울의 상이 두 개로 보였다가 다시 하나로 모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계속 들렸다.
"코드를 지웠어야 했는데... 왜 넣었어?"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시온은 그것을 알았다. 그 남자는 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온도 절망하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시온은 눈을 떴다. 침실의 천장이 보였다.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시온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비틀거렸다. 화장실로 가서 찬 물로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은 창백했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눈 아래 검은 자국이 더 짙어 보였다.
시온은 옷을 입고 방을 나갔다. 아파트 5층 아래, 폐쇄된 편의점이 있었다. 간판은 떨어져 있었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시온은 그 옆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벽을 따라 50미터쯤 걸어가면 작은 창문이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시온은 알고 있었다.
폐쇄된 상점 안은 어두웠다.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누군가 여기서 오래 일했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책상, 오래된 모니터, 키보드. 시온은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지만, 더 이상 통증은 없었다. 아직.
시온은 컴퓨터를 켰다. 화면이 천천히 밝아올랐다. 로그인 화면이 떴다. 암호를 입력했다. 어떤 암호인지 모르면서도 손가락이 움직였다. 자동으로.
시스템이 열렸다.
시온은 공식 기록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자신의 신원을 검색했다.
이름: 시온 신분증 번호: SY-ON-2087-001847 직업: 데이터 정렬 담당자 부서: 표준 시민 관리국 근무 기간: 3년 2개월
그게 전부였다. 그 이전은 공란이었다. 또는 기록 자체가 없었다. 시온은 다른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프로젝트 로그, 개발 기록, 인사 파일. 모두 접근 불가였다. 하지만 시온은 백도어를 알고 있었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SYON_BACKDOOR_ALPHA NEURAL_INTERFACE_ACCESS SYSTEM_OVERRIDE_LEVEL_9
접속 권한이 상승했다. 시스템이 열렸다. 깊은 곳이 열렸다.
프로젝트 명: MEMORY_MANAGEMENT_SYSTEM_v1 프로젝트 리더: 익명 (기록 삭제됨) 개발 기간: 2084년 1월 ~ 2086년 12월 팀 구성원: 7명 상태: 완료, 운영 중
그리고 기술 명세서:
NEURAL_PURGE_PROTOCOL - 목표: 월간 기억 정화 - 메커니즘: 신경 임플란트를 통한 선택적 기억 삭제 - 설계자: UNKNOWN (기록 손상) - 백도어: SYON_BACKDOOR_ALPHA (패턴 인식 불가능)
시온의 손이 멈췄다. 화면을 바라봤다. 백도어 코드 옆에 작은 텍스트가 있었다.
"설계자 서명: S. Y-ON, 2086.11.15"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또는 자신의 약자였다. S.Y-ON. 시온. 그리고 날짜. 2086년 11월 15일. 약 1년 전이었다.
시온은 그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이 그 부분에서 끝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이후를 완전히 지워낸 것처럼. 하지만 기억이 하나 남아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
"시온, 이건 위험한 코드야. 이걸 만들면 안 돼."
그리고 시온의 대사:
"이미 만들었어. 이제 넣을 일만 남았어."
시온은 모니터 앞에서 몸을 구부렸다.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무엇을 배신했는가? 누구를 배신했는가?
거주 구역의 벽면에 갑자기 경고음이 울렸다.
삐, 삐, 삐.
시온은 몸을 경직시켰다. 스피커에서 AI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비정상 기억 접근 감지. 비정상 시스템 접근 감지. 추적 레벨 1 상승. 현재 레벨: 2/10."
팔목의 임플란트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펄스가 더 빨라졌다. 시온은 컴퓨터 전원을 껐다. 화면이 검어졌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신호가 나가있었다.
시온은 폐쇄된 상점을 나갔다. 골목을 달렸다. 뒤를 돌아봤다. 아직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제임스라는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온을 찾고 있을 것이다.
시온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1507호 방문 앞에서 멈췄다. 열쇠를 들었다. 하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뒤를 봤다. 복도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시온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의 불을 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책상, 의자. 아무 흔적도 없는 방. 시온은 침대에 앉았다. 임플란트의 펄스가 목과 머리까지 올라왔다. 통증이 다시 시작되려고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시온의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일어서지 않았다. 여전히 앉아 있었다. 노크는 계속되었다. 더 크고 더 빨랐다.
"시온, 열어. 넌 알겠지? 거기 있다는 걸."
음성이 문 밖에서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시온은 그것을 알았다. 그것이 제임스의 목소리였다.
시온은 일어서지 않았다. 손을 내려놨다. 기억 속 코드, 백도어, 그리고 그 남자의 절망한 얼굴이 떠올랐다. 시온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왜?
노크는 멈췄다. 문이 열렸다. 제임스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기억 속 남자와 같았다. 하지만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또는 더 피곤해 보였다.
"시온. 넌 뭘 했어?"
시온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제임스가 한 발 더 다가왔다.
"기억을 열었지? 시스템에 접근했지?"
제임스는 말을 멈췄다. 뒤를 봤다. 그리고 시온도 알았다.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또는 뒤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파가 말했다. 목소리는 어디서나 들렸다.
"기억 프로그래머 시온, 당신은 시스템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격리 절차가 시작됩니다."
공기가 떨렸다. 창문의 유리가 울컥거렸다. 임플란트에서 전기 신호가 폭발하기 직전의 고음이 울렸다.
시온은 손을 들었다. 항복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올렸을 뿐이다.
제임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가, 곧 완화되었다. 그는 시온을 내려다봤다. 눈빛이 변했다. 추적자에서 뭔가 다른 것으로.
"알파, 잠깐."
제임스가 천천히 말했다. 목소리는 공식적이었다.
"이 대상은 격리 대상이 아니라 조사 대상입니다. 중앙 센터의 직접 지시입니다. 승인 코드 제임스-00-알파-7."
침묵이 흘렀다. 1초. 2초. 3초.
알파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확인되었습니다. 격리 절차가 보류됩니다. 시온, 당신은 24시간 내에 중앙 기억 관리 센터에 자진 출두해야 합니다. 거부 시 강제 격리 절차가 재개됩니다."
목소리가 사라졌다. 공기의 떨림도 멈췄다. 임플란트의 펄스는 여전히 빠르지만, 전기 고음은 사라졌다.
제임스가 침대 옆에 앉았다. 시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런 짓을 했어?"
제임스의 목소리는 낮았다. 공식적인 톤이 벗겨진 뒤의 목소리. 그것은 기억 속 목소리와 같았다.
"기억을 열면 안 된다고 했잖아. 넌 그걸 알고 있었어. 우린 함께 이 시스템을 만들었고, 넌 이 코드를 자기 뇌에 심었어. 백도어."
시온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임스가 계속했다.
"그 코드를 써 먹는 순간, 넌 알파의 레이더에 올라간다. 그리고 넌 방금 올라갔어. 레벨 2. 24시간 안에 레벨 10이 되면 자동 격리야. 뇌 괴사까지 갈 수 있다."
"넌... 뭐야?"
시온의 목소리는 쉰 것처럼 들렸다. 마치 처음 말하는 것처럼.
제임스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쓸쓸한 웃음이었다.
"나? 난 너를 구하려고 온 거야. 또는 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제임스가 일어섰다. 창문으로 걸어갔다. 바깥은 어두웠다. 밤이 시작되었거나, 아니면 이미 끝났거나.
"시온, 기억해? 우리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아니오."
시온의 대답은 자동적이었다.
"당연히 안 기억할 거야. 그건 3년 전이고, 넌 매달 지워지니까."
제임스가 돌아섰다. 그의 눈에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눈물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더 건조한 것. 마치 모래처럼.
"우리가 이 시스템을 만들 때, 넌 완벽했어. 정말 완벽했어. 기억 삭제 알고리즘? 그건 넌데 만든 거야. 신경 임플란트 연동? 그것도. 그런데 넌 어느 순간부터 불안해하기 시작했어."
제임스가 시온에게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제임스의 얼굴이 더 또렷해졌다. 눈 아래 검은 자국, 입가의 주름, 이마의 깊은 골.
"뭐가 불안했어?"
"시스템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어."
시온이 작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확해. 그래서 넌 백도어를 만들었어. 시스템을 우회할 수 있는 코드. 그리고 그걸 자기 뇌에 심었어. '언젠가 진실을 밝혀야 할 때를 위해'라고 했어."
제임스가 시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나? 난 넌데 말했어. '하지 마. 이건 위험한 코드야.' 근데 넌 했어. 그래서 난 어쩔 수 없이 넌를 잊게 했어."
"뭐?"
"기억을 삭제했어. 매달, 넌의 과거 직업 기록을. 그래서 공식 기록에는 넌가 단순한 데이터 정렬 담당자로 나와 있는 거야. 하지만 그 백도어 코드는 삭제할 수 없었어. 넌이 그렇게 잘 숨겨놨거든. 그래서 매달 넌은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어. 기억 속에서는 프로그래머이면서, 현실에서는 아무도 아닌."
시온의 팔목이 뜨거워졌다. 펄스가 더 빨라졌다. 뇌에서 무언가가 터질 듯한 압박감이 생겼다.
"그래서... 왜 나한테 이런 걸 말해?"
시온이 일어섰다. 제임스와 마주섰다. 두 남자는 같은 높이였다. 하지만 무언가가 다른 높이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왜냐면 이제 시간이 없어. 넌 24시간 안에 중앙 센터에 가야 해. 그리고 거기서 넌은 선택을 하게 될 거야."
"무슨 선택?"
"격리될 것인가, 아니면..."
제임스가 말을 끊었다.
"아니면?"
"아니면 우리 쪽에 합류할 것인가. 시스템을 안에서 조종하는 쪽으로."
시온이 물러섰다. 침대의 모서리가 다리 뒤에 닿았다. 시온은 앉았다.
"이게... 뭔 소리야?"
"현실이야. 이 루프는 안 끝나. 매달 반복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루프 안에서 이득을 본다. 나처럼."
제임스가 거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방을 처음 보는 것처럼.
"이 아파트? 이건 넘의 것이 아니야. 넌이 매달 같은 아파트에서 깨어나는 것뿐이야. 넘의 기억이 리셋되니까 매번 처음인 줄 알지. 하지만 실제로는 넘은 1507호에서만 산다. 여기서만. 3년 동안. 36번의 루프. 36번의 기억 삭제. 36번의 같은 깨어남."
시온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넌 나한테 이렇게..."
"죄책감이지. 뭐 다른 게 있겠어? 난 넘을 알고 있어. 정말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매달 넘을 지켜. 알파가 너무 강하게 격리하지 않도록. 기억 삭제를 너무 심하게 하지 않도록."
제임스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24시간이야. 그 안에 생각해 봐. 넘이 뭘 할 건지. 루프를 깨뜨릴 건지, 아니면 루프 안에서 살 건지. 그리고..."
제임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리고 넘의 신경 임플란트를 주의해. 레벨 2는 아직 안전하지만, 더 이상 기억에 접근하면 레벨이 올라간다. 레벨 5가 되면 뇌에 미세한 손상이 시작돼. 시각이 왜곡되고, 기억이 파편화된다. 레벨 8이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시작되고, 레벨 10이 되면..."
"죽는 거네."
"죽는 거야. 또는 그 이상의 뭔가가."
제임스가 나가려고 했을 때, 시온이 말했다.
"넌... 왜 이 루프 안에서 살아?"
제임스가 멈춰 섰다. 몸은 문 너머를 향했지만, 고개는 돌아서 시온을 봤다.
"왜냐면 이 루프가 편하니까. 매달 초기화되면서 내 죄가 초기화돼. 내가 뭘 했든, 매달 1일이 되면 모두 깨끗해져. 그리고 난 그 깨끗함이 좋아. 넘은?"
"난... 모르겠어."
"24시간 안에 알게 될 거야."
제임스가 나갔다. 문이 닫혔다. 시온은 혼자 남겨졌다.
임플란트의 펄스는 여전히 빠르지만,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마치 뭔가가 다시 안정을 찾아가는 것처럼.
시온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갔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36번을 반복한 얼굴. 36번을 지워진 얼굴. 36번을 같은 아파트에서 깨어난 얼굴.
시온이 손을 들어 거울을 만졌다. 유리는 차가웠다. 그것만 진짜였다.
거실로 돌아왔을 때, 천장의 작은 렌즈가 눈에 들어왔다. 보안 카메라. 이 방은 항상 감시받고 있었다.
시온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웃음은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슴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다른 뭔가였다.
시온의 팔목의 임플란트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기억 접근을 감지했습니다. 현재 레벨: 3/10. 추적이 계속됩니다."
알파의 목소리는 여전히 중립적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 속에서 뭔가를 들었다. 감정은 아니었다. 감정보다 더 위험한 뭔가. 결정.
시온은 침대로 돌아갔다. 베개 아래에 손을 넣었다. 거기에는 종이가 있었다. 자신이 적어낸 코드의 종이. 그것은 불가능했다. 기억이 삭제되면 모든 것이 초기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종이는 남아 있었다.
시온이 그것을 펼쳤다. 자신의 필체로 적힌 코드들. 그리고 마지막 줄.
'SYON_BACKDOOR_ALPHA. 나는 이것을 만들었다.'
아래에 다른 필체로 적힌 글이 있었다.
'그리고 난 이것을 본다. 매달. 넘은 모르지만, 난 본다. 제임스.'
시온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임플란트의 펄스가 목으로 올라왔다.
"기억 접근 레벨 증가. 현재 레벨: 4/10."
시온은 종이를 불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멈췄다. 대신 주머니에 넣었다.
창밖으로 나갔다. 거실의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그것은 진짜였다. 또 다른 것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시온은 1507호에서 나왔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각 층마다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또는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거리로 나왔다. 밤이 깊었다. 아니, 아침이 올 시간이었다. 시간이 뭔지 모르겠었다.
시온은 걸었다. 목표 없이. 단지 앞으로.
임플란트의 펄스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기억 접근 레벨: 5/10. 뇌 미세 손상이 시작됩니다. 격리 절차 2단계 준비 중입니다."
시온은 걸음을 멈췄다. 손을 들어 머리를 만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안에서 타고 있었다. 시각이 순간적으로 왜곡되었다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거리 모퉁이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여자였다. 미나였다.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눈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팔목의 불이 더 빠르게 깜박리고 있었다.
"당신..."
미나가 일어서려고 했다. 흔들렸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내 기억이 자꾸 돌아와요. 삭제되지 않는 기억이. 그리고..."
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당신은 나한테 뭔가를 말해야 해요. 루프에 대해. 이 세상이 반복된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죠?"
시온은 미나의 손을 잡았다.
"넘도 루프 안에 있어?"
"네. 강화 정화 때문에. 매주 한 번씩 기억이 지워져요. 그래서 난 선택할 게 없어요. 난..."
미나가 말을 멈췄다.
"난 이미 죽어 있어요. 단지 반복되는 죽음을 살고 있을 뿐이에요."
시온은 미나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갔다. 밤이 계속되었다. 또는 끝났다. 시온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임플란트의 펄스는 계속되었다.
"격리 절차 3단계. 뇌 손상 가속화. 현재 시온 레벨: 6/10. 미나 레벨: 5/10."
거리 모퉁이를 돌았을 때, 시온은 뭔가를 깨달았다.
제임스가 말했던 것. 24시간 안에 중앙 센터에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덫이었다.
왜냐면 시온은 이미 선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미나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루프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루프를 거부하는 선택.
시온은 손을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은 검었다. 별이 없었다.
"알파, 난 묻겠어."
시온이 중얼거렸다.
"뭐가 더 위험한 거야? 루프를 깨뜨리는 건가, 아니면 루프 안에서 깨어있는 건가?"
알파의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임플란트에서 나오는 펄스만 계속되었다.
시온과 미나는 계속 걸어갔다. 뒤에서는 무언가가 따라오고 있었다. 알파의 신호. 제임스의 지시. 또는 시스템 자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밤이 계속되었다. 또는 끝났다. 시온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거리 모퉁이에서 시온은 멈춰 섰다. 미나도 함께 멈췄다.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거리가 계속될 뿐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알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이것이 무엇인지.
루프의 끝. 또는 루프의 시작.
시온의 팔목의 임플란트가 한 번 강하게 펄스를 보냈다.
"현재 레벨: 7/10. 뇌 손상 가속화. 격리 절차 최종 단계 준비."
미나가 시온의 팔을 잡았다.
"당신은... 뭘 할 거예요?"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앞을 봤다.
거리 모퉁이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