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7일의 시작

준호의 침실에서 나온 지우는 거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천장의 하얀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들이 손가락 자국처럼 보였다.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의 밝기가 최대치인데도 글씨가 흐릿했다.

남은 시간 7일.

수치가 떨려 보였다. 아니,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우는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보였지만 윤곽이 흐릿했다. 투명한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움직임이 약간 늦게 따라왔다.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지우는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침실에서 준호의 코골이가 들렸다. 살아 있는 소리였다. 지우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음—음—하는 규칙적인 호흡음. 얼마나 오래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화면에 메모 앱이 떠 있었다.

박혜진 - 내일 오후 3시 47분 아파트 베란다 이지현 - 내일 오후 5시 22분 지하철 2호선 김은하 - 모레 오전 11시 15분 병원 중환자실 송민주 - 모레 오후 2시 31분 사무실 건설 현장 최유미 - 모레 오후 8시 9분 자동차 지우 - 7일 후 밤 11시 편의점

여섯 개의 죽음. 그 중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준호의 죽음은 목록에 없었다. 어제 밤 지우가 준호를 붙잡았을 때, 자신의 남은 수명이 7일로 깎였을 때 준호의 죽음은 목록에서 사라졌다. 대신 지우의 수명이 깎였다. 공평한 거래였다.

지우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은 7일 동안 할 일들을 생각해봤다. 박혜진을 찾아야 한다. 이지현도. 그들의 주소, 연락처, 무엇이든. 그리고 경고해야 한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지만, 해야 한다. 준호를 설득해야 한다. 경찰이든 누구든 증거를 만들어야 한다. 메모장의 시간과 장소가 정확하다는 것을. 그것만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들 것이다.

오전 7시 15분. 준호가 일어났다. 지우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안 가."

"뭐..."

"차를 타지 마. 절대로."

준호는 눈을 비비며 지우를 봤다. 지우의 얼굴이 창백했다.

"지우, 넌..."

"절대로 차를 타지 마. 오늘 하루 종일. 약속해."

"뭐가 문제야? 자동차?"

지우는 준호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옆 탁자에 자동차 키가 놓여 있었다. 지우가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여러 번 떨어뜨렸다. 결국 손가락 세 개를 모아 쥐고 나갔다.

"이거 뭐 하는 거야?"

"오늘 밤 11시까지만. 그 다음은 괜찮아."

준호의 눈이 흔들렸다. 지우의 말이 뭔가 다르게 들렸다. 마치 준호가 오늘 밤 11시 이후를 못 본다는 식으로.

"너 정신이 이상해. 정말."

"내가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니야. 세상이 이상한 거야."

지우는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흐릿했다. 가까이서 봤을 때 눈, 코, 입이 보이지만 전체적인 윤곽이 희미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마치 이미 죽은 것처럼.

지우는 거울을 주먹으로 쳤다. 손가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아프지 않았다.

아침 9시. 준호가 외출하려고 현관으로 나갔다. 지우가 팔을 잡았다.

"어디 가?"

"회사. 뭐."

"가지 마."

"뭐라는 거야?"

"가지 마. 제발."

준호는 지우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지우는 더 강하게 잡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투명해져 가는 바람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준호가 쉽게 빠져나갔다. 지우의 손가락이 준호의 팔을 뚫고 지나갔다.

"넌 진짜 미쳤어. 알아?"

지우는 준호의 눈을 마주했다. 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투명해지는 손가락들이 그의 팔을 관통했다. 그것은 손이 아니었다. 유령의 손이었다.

"내가 미친 게 아니야! 너는 오늘 밤 11시 47분에 강남대로 교차로에서 트럭에 치인다고!"

준호의 몸이 굳었다. 지우의 투명한 손이 자신의 팔을 뚫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공포를 압도했다.

"넌 그때 신호를 무시하고 건넌다고. 왜냐하면 너는 지우가 말하는 걸 믿지 않으니까. 그래서 죽는다고!"

"지우, 잠깐..."

"내가 너를 살렸어! 내 수명을 깎아서! 이제 넌 죽지 않아. 오늘 밤 11시까지만 집에만 있어!"

준호는 현관 문을 열었다. 지우가 다시 잡으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제발!"

준호는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창문으로 봤다. 준호가 아래층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자동차 쪽으로.

지우는 집을 나왔다.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투명해진 손으로 난간을 잡으려고 했지만 닿지 않았다. 몸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마치 떠다니는 것처럼.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지우가 차 문을 손으로 쳤다. 음향이 나지 않았다.

준호가 시동을 걸었다.

지우는 차 앞에 섰다. 준호가 지우를 봤다. 지우의 얼굴이 거의 투명했다. 마치 유령처럼. 그 모습이 준호의 숨을 멎게 했다. 손가락도, 팔도, 얼굴도 모두 현실이 아닌 것처럼 떠 있었다.

"제발... 제발 움직이지 마."

준호는 시동을 껐다. 그리고 잠시 후 차에서 내렸다.

"경찰을 부르겠어. 너는 뭔가 위험해."

"제발 하지 마."

"너는 나한테 집착하고 있어. 이건 이상해. 진짜 이상해."

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

경찰은 오전 11시 42분에 도착했다. 지우의 원룸. 준호는 경찰관 두 명과 함께 들어왔다.

"이 친구가 저한테 폭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감시하고 있어요. 뭔가 정신이..."

"진정하세요. 자세히 말씀해 주실래요?"

경찰관은 지우를 봤다. 지우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손과 희미한 얼굴로.

"그 친구가... 그 친구가 죽을 거라고 했어요. 오늘 밤 11시 47분에 강남대로 교차로에서 트럭에 치여서. 그래서 내가 그걸 막으려고..."

"죽을 거라고요?"

"네. 저는 예지 능력이 있어요. 밤 11시에 손님들이 오면 그 손님의 지인들의 죽음을 봐요. 정확하게. 시간, 장소, 방식 다 알 수 있어요."

경찰관은 준호를 봤다. 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 친구가 자꾸 이런 말을 해요. 그리고 날 붙잡아요. 마치 제가 죽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경찰관은 지우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혹시 최근에 스트레스가 많으셨나요?"

"아니요. 저는 정상입니다. 제 손을 봐요. 투명해지고 있어요. 제가 사람을 살릴 때마다 제 수명이 깎여요. 그리고 그 손님들, 밤 11시에 오는 손님들, 그들이..."

"손이 투명해 보인다고요?"

"네. 제 얼굴도."

경찰관은 지우의 손을 봤다. 손은 정상으로 보였다. 색깔도 있었고 투명하지 않았다. 경찰관은 휴대폰을 들었다.

"혹시 메모장에 뭔가 기록해 두신 게 있으신가요?"

지우가 휴대폰을 건넸다. 경찰관은 메모 앱을 열었다. 이름들과 정확한 시간, 장소들이 적혀 있었다. 박혜진, 이지현, 김은하... 경찰관은 메모를 읽으며 눈썹을 좁혔다.

박혜진 - 내일 오후 3시 47분 아파트 베란다

오후 3시 47분. 그 시간이 경찰관의 뇌를 스쳤다. 어제 뉴스에서 본 기사가 떠올랐다. 강남구 아파트에서 30대 여성이 베란다에서 추락했다는 기사. 시간이 정확히 맞았다.

이지현 - 내일 오후 5시 22분 지하철 2호선

오후 5시 22분. 그 역시 며칠 전 뉴스였다. 지하철 선로에 뛰어든 여성. 신원 미상.

경찰관은 다른 경찰관과 눈을 맞췄다. 메모에 적힌 시간과 장소들이 실제 사건 기사와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지우는 이 메모를 언제 썼는가. 그리고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있는가.

"이 기록들은... 언제 쓰신 거예요?"

"어제 밤이요. 밤 11시에."

경찰관의 손이 떨렸다.

"이 친구들이 정말 죽을 거 같으신가요?"

"아니, 정말 죽을 거예요! 나는 본 거라고! 정확하게!"

경찰관은 준호를 봤다.

"이 친구분이 이런 행동을 얼마나 오래 해오셨나요?"

"한... 일주일? 아니, 더 오래 된 것 같아요. 점점 심해졌어요."

경찰관은 메모장을 꺼냈다. 메모에 적힌 나머지 이름들을 확인했다. 김은하, 송민주, 최유미. 그리고 지우 자신의 이름도 있었다. 모두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여기 정신건강복지센터 번호를 드릴게요. 그리고 이 친구분도 한 번 상담을 받아보시길 권해요. 혹시 약을 복용 중이신가요?"

"약? 나는 정상이야! 너희가 못 보는 거야!"

경찰관은 준호와 눈을 맞췄다.

"일단 이 친구분과 거리를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까."

---

경찰이 나간 후 준호도 나갔다. 지우는 혼자 남겨졌다.

휴대폰의 시계가 오후 3시 2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혜진이 죽을 시간까지 19분 남았다.

지우는 움직일 수 없었다. 준호를 설득하지 못했다. 경찰도 믿지 않았다. 아니, 경찰은 메모를 봤다. 메모의 정확성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박혜진을 막을 수도 없었다. 지우는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했다. 메모에만 남겨져 있었다. 지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누구에게 전화할 수 있을까. 누가 이 말을 믿을까.

오후 3시 47분.

지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안녕. 넌 누구인가?"

지우의 몸이 굳었다. 그 목소리. 그 질문.

"회색 옷의 남자?"

"아직도 그렇게 부르니?"

"왜... 왜 전화를 해?"

"너의 친구가 죽었어. 강남대로 교차로에서. 오후 3시 47분. 정확하게."

지우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아니... 아니야. 내가 막았어. 내가 그를 살렸어. 그의 수명을..."

"그런데 왜 그는 여전히 죽었을까? 혹은 이미 죽어 있었을까?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너는 그를 살린 게 아니야. 그냥 죽음을 미뤘을 뿐이야."

전화가 끊겼다.

지우는 침대 위에 쓰러졌다. 천장이 회전했다. 아니, 지우가 회전하고 있었다. 손가락들이 더 투명해졌다. 이제 손가락이 완전히 사라졌다. 손목 끝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존재가 천천히 지워지는 것처럼.

지우는 자신의 팔을 들었다. 팔도 절반이 투명했다. 가슴에서 복부로 투명함이 내려오고 있었다.

박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색 코트를 입은 여자. 웃음이 많던 여자. 목소리가 부드러운 여자. 하지만 그 이미지들이 하나씩 흐릿해졌다. 먼저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 부드러운 톤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그 여자가 웃던 모습이 회색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 사라졌다. 지우는 자신이 누구를 살리려고 했는지도 점점 잊혀가고 있었다.

자신이 죽음의 매개자가 되었다는 자각이 몸을 타고 내려왔다. 살린다고 생각한 건 모두 거짓이었다. 자신은 단지 죽음을 옮기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자신에게 옮기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오후 5시 22분. 이지현이 죽을 시간.

오전 11시 15분. 김은하가 죽을 시간.

오후 2시 31분. 송민주가 죽을 시간.

오후 8시 9분. 최유미가 죽을 시간.

그리고 밤 11시. 지우가 죽을 시간.

지우는 시계를 봤다. 오후 5시 45분. 이지현이 이미 죽었을 것이다. 지하철 선로에서. 지우는 그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본 것 같았다. 어둡고 차가운 선로 위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그 누군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우의 기억 속에서도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윤정민이었다.

"지우? 너 괜찮아?"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우? 왜 안 말해? 나 너 걱정돼. 준호 형이 뭔가 말했는데..."

"정민."

"응?"

"나한테서 멀어져. 제발."

"뭐라는 거야?"

지우는 정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웃을 때 눈이 작아지는 모습. 검은 스웨터를 자주 입던 모습. 자신을 걱정하던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아직 생생했다. 하지만 지우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것들도 사라질 것이다. 박혜진처럼. 이지현처럼.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내가 구하려고 해도 죽어. 그리고 그걸 보지 못하는 너희는 나한테 더 가까워질수록 위험해. 멀어져. 제발. 나를 잊어. 그게 너를 사는 길이야."

"지우, 넌..."

지우는 전화를 끊었다. 정민의 목소리도 이제 기억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사는 방법이었다.

밤이 내려왔다. 하늘이 검어졌다. 지우는 편의점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손가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리도 투명해지고 있었다. 발이 땅을 딛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유령이 되어 가는 것처럼.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밤 10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8분 남았다.

매니저 이수영이 카운터 뒤에 있었다. 지우를 봤을 때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우 씨. 오셨네요."

"네."

"요즘 어떤가요? 일은 괜찮으신가요?"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수영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손님들처럼 공허했다. 아니, 더 깊은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지우는 이수영의 손을 봤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자주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카운터 위에 올려놓을 때도 손가락을 구부려 숨기려고 했다. 지우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이수영의 손이 떨렸다. 손가락들이 반투명했다. 마치 지우의 손처럼.

"당신도... 알고 있구나."

이수영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오래된 피로가 담겨 있었다.

"우린 항상 알고 있었어요. 시작부터. 너를 선택할 때부터."

형광등이 깜빡였다.

밤 11시.

손님이 들어올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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