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 시 오십구 분. 편의점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우는 계산대에 기대어 휴대폰 화면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배터리는 34%. 어제보다 더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어제 거울에서 본 투명한 손등이 자꾸만 떠올랐다.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철렁했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이번엔 길게. 마치 신호처럼. 지우의 몸이 저절로 일어났다. 손발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다. 계산대 뒤로 몸을 돌렸고, 입가에 뭔가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지은 미소가 아닌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젊은 여성이 들어왔다. 흰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었고, 긴 검은 머리가 양쪽 어깨에 흘러내려 있었다. 어제의 회색 옷 남자와는 달리 이 손님은 계속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한 입가만 움직였고 눈은 죽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지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톤이 낮았고, 리듬이 달랐다. 마치 누군가가 지우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여성 손님이 계산대에 가까워졌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을 지우 쪽으로 향했다. 다섯 명의 젊은 여성들이 웃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모두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 아이들 중에 누가 먼저 죽을까요?"
여성 손님이 물었다. 지우는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마치 입술이 누군가에게 꿰맨 것처럼.
"그럼 다 보여드릴까요?"
여성 손님이 손을 뻗어 지우의 이마에 닿았다. 그 순간.
검은 화면.
그 안에서 영상이 떠올랐다.
첫 번째. 지하철역 플랫폼. 젊은 여성이 선로 위로 떨어진다. 머리가 부딪히고 몸이 뒹굴었다. 시간: 오후 3시 14분. 날짜: 내일. 이름: 김은하.
두 번째. 아파트 베란다. 같은 친구 그룹 중 다른 여성이 난간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래는 15층이었다. 지우의 숨이 끊겼다. 떨어진다. 시간: 밤 9시 27분. 날짜: 모레. 이름: 이지연.
세 번째. 카페 계단. 젊은 여성이 계단에서 넘어진다. 목이 꺾인다. 지우의 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시간: 오전 10시 41분. 날짜: 3일 후. 이름: 박혜진.
더 많은 죽음들이 밀려왔다. 욕실에서 물에 잠기는 여성. 병원 응급실에서 심전도가 평평해지는 순간. 지우의 호흡이 얕아졌다. 폐가 짓눌리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영상이 끝났다. 지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슴이 철렁했다가 동시에 몸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공기가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생명이 빨려나가는 것 같았다.
여성 손님의 웃음이 들렸다. 여전히 공허했다.
"고생해요."
손님이 사라졌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우는 한참 동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배터리는 28%였다. 10분 만에 6%가 사라졌다.
지우는 손가락이 떨렸다.
밤 1시 30분. 지우는 윤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이시간에?"
윤정민의 목소리가 졸린 톤이었다.
"정민아. 어제 강가 사건 봤어? 한 명이 죽었어. 내가 말했던 그 사람."
침묵.
"지우, 그게..."
"내가 정확하게 봤어. 김은하. 서른 한 살. 익사로 인한 사망. 신문에 나왔어."
윤정민의 숨소리가 길게 들렸다.
"지우, 넌 요즘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밤 11시 손님이라니, 예지니, 죽음이니... 이게 정상이야? 스트레스 때문에 환각을 보는 건 아닐까?"
"아니야. 내가 본 거 맞아."
"그럼 증명해. 어떻게?"
지우는 휴대폰을 켜 기사를 찾아 읽었다. 어제 강가에서 한 명이 물에 빠져 죽고, 한 명은 극적으로 구조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봐. 정말 죽었어. 김은하라는 사람. 그리고 박혜진이라는 사람은 구조됐어. 내가 그 사람을 구했어."
"서울에서 매일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잖아. 그 중에 너는 그것만 기억하는 거야. 확증편향."
"정민아, 들어봐. 내가 어제 경고했던 거야. 강가에 가지 말라고. 그래서 박혜진이 강가에 갔을 때 물에 빠졌고, 내가 그 사람을 구했어. 내가."
"그럼... 넌 거기 있었다는 거야?"
침묵.
"지우, 진짜 병원 가자. 제발. 이건 도움이 아니야. 이건 너를 더 깊이 빠지게 하는 거야."
지우는 윤정민의 눈을 봤다. 그 안에는 진심의 걱정이 있었다. 동시에 거리가 있었다. 지우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거리.
"알았어."
또 거짓말이었다.
오전 9시. 지우는 편의점을 나왔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이수영 매니저와 마주쳤다. 매니저는 지우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네."
"네."
"이 일을 계속 해줄 거죠?"
지우는 멈춰 섰다. 그 질문이 이상했다. 마치 지우가 그만둘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듯한 톤으로. 아니, 그게 아니라 지우가 그만두면 안 된다는 압박처럼 들렸다.
"네... 계속하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해줘."
이수영 매니저가 지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이 너무 차가웠다. 또는 지우 자신이 너무 차가워졌거나. 매니저는 지우의 팔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마치 확인하듯이. 지우의 팔은 반쯤 투명했다. 매니저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를 본 것 같았다.
매니저의 입이 움직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입술은 계속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를 되풀이하려 하는 것처럼. 그러다 갑자기 멈췄다. 손을 내렸다.
"내일도 밤 11시에 와."
차가운 목소리였다. 명령이었다.
오후 6시. 지우는 편의점 근처 공원에 앉았다. 벤치에 누워 하늘을 봤다. 구름이 빠르게 떠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은 배터리는 12%. 남은 시간은 5시간.
지우는 휴대폰을 켜 검색했다. 어제 강가에서 죽은 사람의 정보를 찾았다. 김은하. 서른 한 살. 회사원. 익사로 인한 사망. 지우가 본 예지에서 첫 번째 대상이었다. 지우가 구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죽었다.
그럼 지우가 구한 사람은?
휴대폰을 더 스크롤했다. 관련 기사가 있었다. 구조된 여성은 박혜진. 스물아홉 살. 회사원.
지우의 손가락이 떨렸다. 박혜진. 지우가 본 예지에서 세 번째 대상이었다. 카페 계단에서 목이 꺾여 죽을 예정이던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물에서 구조됐다?
기사를 더 읽었다. "박혜진 씨는 어제 강가에 갔다가 친구를 구하려다 물에 빠졌으나, 우연히 지나던 시민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우연? 아니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지우가 지난밤 박혜진에게 경고했던 것이다. 강가에 가지 말라고. 그래서 박혜진이 강가에 갔을 때 일이 일어났을 때, 지우가 그 사람을 구했고, 그 과정에서 박혜진도 물에 빠졌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혜진은 살았다.
지우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가슴이 철렁했다. 숨을 깊게 쉬었다. 자신의 행동이 실제로 작동했다. 자신의 경고가 현실을 바꿨다.
하지만 다음 순간 숨이 끊겼다.
만약 이게 정말 일어나고 있다면?
만약 지우가 정말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있다면?
그리고 지우가 그 죽음을 막으려고 할 때마다 지우의 수명이 깎인다면?
지우의 손을 봤다. 더 투명해져 있었다. 팔뚝까지 투명함이 퍼졌다. 손가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우가 천천히 지워지고 있는 것처럼.
배터리는 8%.
오후 11시 정각. 지우는 편의점에 있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우의 몸이 저절로 일어났다. 다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마치 인형처럼.
문이 열렸다.
손님이 들어왔다. 남자였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남자. 회색 옷을 입었고, 눈빛이 공허했다. 첫 번째 손님과 같은 사람이었다.
남자가 계산대에 가까워졌다. 지우의 입이 움직였다.
"너는 누구인가?"
지우가 물었다. 하지만 그건 지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지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뭔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는 느낌. 부정의 공포가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너다."
지우의 손가락이 떨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에서 온 너다."
지우의 가슴이 철렁했다. 손님들이 자신의 미래 버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이미 능력의 대가를 치른 자들이었다. 그리고 지우도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 지우의 이마에 닿았다.
지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저항하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팔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검은 화면.
영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다.
지우 자신의 죽음이었다.
밤 11시. 편의점에서. 지우가 누워 있다. 눈이 감겨 있다. 숨이 없다. 몸이 완전히 투명해져 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지우의 손가락이 떨렸다. 입 냄새가 난다. 시체의 냄새. 자신의 시체에서 나는 냄새.
온기가 없다. 손가락도, 얼굴도, 가슴도. 모두 차갑다. 마치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시간: 일주일 후. 날짜: 정확히 7일 후. 정확히 내일 밤 11시.
영상이 끝났다.
지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이번엔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었다.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되는 7일이라는 시간 안에서 일어날 일이었다.
손님이 사라졌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우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거의 투명해져 있었다. 팔 전체가 반 이상 투명했다. 마치 지우가 이미 반쯤 죽어 있는 것처럼.
휴대폰을 들었다. 배터리는 3%.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에서 메시지가 들어왔다.
발신자: 손님
내용: "잘하고 있어요. 내일 밤 11시에 다시 뵐게요. 그때까지 네 친구들을 지켜주세요. 이지연, 최수진, 한유나. 그들을 구하면 구할수록, 당신이 선택한 것들이 당신을 선택할 거예요. 하지만 구하지 않으면, 그들이 사라질 거고요."
지우의 손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