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신체의 경계, 규정의 균열」
거실의 형광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석현의 눈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올렸을 때 반투명한 피부 사이로 거실의 벽이 보였다. 벽지의 노란 무늬가 손 안쪽을 통과해 보인다. 손가락이 사라지고 있다.
"아빠?"
준호가 이불에서 튀어나왔다. 7살 유령의 얼굴이 창백했다. 정말로 창백했다. 투명한 아이의 얼굴이 더 투명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미련이 증가할 때마다 유령은 더욱 진짜처럼 보이다가, 미련이 끝날 때가 오면 이렇게 희미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석현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은—
"아빠, 손이."
준호가 석현의 손을 잡으려 했다. 투명한 손가락이 투명한 손가락과 만났다. 두 투명함이 겹쳤을 때 약간의 따뜻함이 남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석현은 그 따뜻함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세어 보고 싶었다.
"괜찮다."
거짓말이었다. 석현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데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신체 붕괴의 신호였다. 천 년을 저승에서 지낸 공무원으로서 석현은 알고 있었다. 빙의 신체가 주인의 의식을 버텨낼 수 없을 때, 먼저 음성이 사라진다. 그다음은 촉각이다. 그다음은—
거실 문이 열렸다.
이수진이 나타났다. 밤 1시 정도였을 것이다. 아내는 석현의 팔뚝을 잡으려 했다가 멈췄다. 손가락이 팔뚝을 통과했다. 통과했다. 정말로.
"아, 아—"
이수진의 입술이 떨렸다. 그 떨림이 얼굴로 번져, 목으로, 어깨로 내려갔다. 여인은 남편의 손을 다시 잡으려 했다. 이번엔 더 단단하게.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손가락을 통과했다. 그리고 어떤 온기도 전달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수진이 울기 시작했다. 6개월 만에 아들을 만났고, 3년을 낯선 남편과 지냈고, 마지막 3일이라고 믿었는데 남편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내는 석현의 가슴을 안으려 했다. 얼굴을 묻으려 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반쯤 다른 세계에 있었다.
손가락이 통과한다. 온기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끝인가? 아들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마저 잃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이수진의 몸이 더 작아졌다. 남편을 붙잡으려는 손이 떨렸다.
"엄마."
준호가 울었다. 7살 아이의 울음은 어른의 울음과 달랐다. 그것은 순수한 공포였다. 죽음이 뭔지 모르던 아이가, 이제 깨닫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가 자신처럼 투명해지고 있다는 것을.
"아빠가 가. 아빠가 가는 거야."
"안 가. 안 갈 거야."
석현이 준호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만 닿았다. 아이의 어깨에 손가락만. 그것도 닿는 게 아니라 통과했다. 투명한 손가락이 투명한 아이의 몸을 통과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안 가! 아빠, 가지 마!"
준호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원래 크기로. 아니, 더 크게. 7살 아이의 울음이 거실을 채웠다. 그리고 그 울음에 응하듯 거실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준호."
박옥희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손자의 울음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투명해지는 모습도 봤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담담함만 있었다.
"할머니, 아빠가."
"알아. 할머니가 알아."
박옥희가 준호를 안았다. 아이는 계속 울었다. 할머니의 옷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투명한 얼굴이 할머니의 어깨에 묻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투명한 손자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괜찮아. 준호가 여기 있으니까."
할머니의 목소리는 낮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속삭임이 거실 전체를 채웠다. 아니, 거실을 넘어 어딘가 더 깊은 곳으로 전달됐다.
석현은 거실의 벽을 통해 무언가를 느꼈다. 아내의 울음. 아들의 공포. 어머니의 담담함. 그것들이 모두 자신의 투명해지는 몸을 붙잡고 있었다. 규정이 명령한다. 지금 저승으로 가야 한다고. 신체가 붕괴되기 전에 영혼을 분리해야 한다고. 하지만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준호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이제 가야 한다."
석현이 말했다. 목소리가 정말로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입술을 움직이는 것은 느껴지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이해했다. 아내가 울음을 멈추고,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할머니가 석현을 바라봤다.
그 순간, 석현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뭔가 갈라졌다. 규정과 사랑 사이의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 년 동안 지켜온 규정. 저승의 모든 시스템이 그 규정 위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규정이 자신의 아들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아내를 빼앗아가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규정을 지킬 수 없다."
석현이 중얼거렸다. 이번엔 들렸다. 목소리가. 아주 작게. 마치 멀리서 날아오는 음성처럼.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 안에는 천 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래. 규정을 지킬 수 없구나."
박옥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아들이 선택한 것을 인정했다. 손자를 안고, 사위를 바라보고, 그 투명해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표정으로.
이수진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울음은 절망의 울음이 아니었다.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울음이었다. 규정도 저승도 자신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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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재정과세청, 5층 기록실.
모니터 화면에 현생의 아파트가 떠 있었다. 거실. 형광등. 투명한 아버지와 투명한 아이. 그리고 그들을 안고 있는 할머니와 울고 있는 아내.
"이걸 봤나?"
김은철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화면을 봤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규정 위반 수치가 최고조다. 신체 붕괴 진행 중. 72시간 내 완전 소멸 예상."
또 다른 동료가 수치판을 들었다. 석현의 신체 생명력: 5%. 붕괴 속도: 분당 0.8%.
"이대로면 24시간이면 끝난다."
"강석준 과장이 뭔가 할 텐데?"
"이미 보고했다. 최종 판단은 이명희 부장이 내릴 거야."
김은철이 모니터 화면을 다시 봤다. 투명한 아버지가 투명한 아이의 손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통과했다. 하지만 아이는 놓지 않았다. 투명한 손가락을 투명한 손가락으로 계속 잡고 있었다.
"이게 규정 위반이라고?"
김은철이 중얼거렸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규정 개정안 준비됐나?"
"네. 근데 과장님이 막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장님은?"
"더 심하게 막을 거 같은데."
김은철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청원서 더미가 있었다. 1,247건의 미해결 사건. 유령이 현생에 남아 있는 사건들. 그동안 저승에 쌓여온 청원서들이었다. 모두 석현과 준호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곁에 있고 싶은 아이. 자식을 놓지 못하는 부모.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저승 규정에 걸린 영혼들.
김은철은 청원서들을 천천히 넘겼다. 첫 번째 청원서.
**'미련의 재정의 및 가족 단위 환생 규정 신설 청원서'**
청원자: 이준영(故, 교통사고로 사망) 사연: "제 딸은 아직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저는 저승 규정 때문에 환생을 미루고 현생에 남아 있습니다. 딸이 저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규정은 이를 '미련'이라 하고 처벌합니다. 사랑이 죄인가요?"
두 번째 청원서.
**'가족 단위 환생 규정 신설 청원서'**
청원자: 박미숙(故, 암으로 사망) 사연: "제 남편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었습니다. 남편은 저를 보고 싶어 합니다. 저도 남편을 보고 싶습니다. 규정은 저희를 만나지 말라고 합니다. 함께 환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저희는 그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죄입니까?"
세 번째 청원서.
**'현생 체류 기간 연장 청원서'**
청원자: 최영준(故, 뇌졸중으로 사망) 사연: "제 손자는 아직 어립니다. 할머니인 저는 손자의 첫 생일, 첫 학교, 첫 친구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규정은 3년 이상 체류를 금지합니다. 하지만 손자를 지켜보는 것이 죄라면, 저는 그 죄를 받겠습니다."
김은철이 세 청원서를 들었다. 동료들이 봤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이게 1,247건이 모두 이런 건가?"
한 동료가 물었다.
"그래. 천 년 동안 저승에 쌓여온 사랑의 기록이야."
김은철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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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행정동, 회의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이명희 부장이 앉았다. 강석준 과장이 앉았다. 저승 규정위원회의 위원들이 앉았다. 화면에는 여전히 현생의 아파트가 떠 있었다. 투명한 아버지. 투명한 아이. 그들을 지켜보는 할머니.
"안건: 저승 공무원 석현의 규정 위반 건에 대한 최종 판단."
이명희 부장이 말했다. 목소리는 무감정했다.
"신체 붕괴 진행 중. 72시간 내 완전 소멸. 현재 미해결 사건 1,247건. 유령 준호의 미련 등급 상향 추적 중."
강석준이 보고했다. 그 순간 그는 석현을 저승으로 강제 소환하려는 시도를 했다. 회의실 바닥에 소환 원이 그려졌고, 강석준의 손가락이 공중을 그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석현은 이미 자신의 의지로 저승에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규정상 조치는?"
"규정 위반자에 대한 신체 폐기 및 영혼 격리."
"준호는?"
"저승 강제 송출 및 환생 처리."
회의실이 침묵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규정은 규정이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이었다.
"그럼 이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이명희 부장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회의실 문이 열렸다.
석현이 나타났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현생에 있어야 할 공무원이 저승에 있었다. 그것도 반투명한 신체로. 손가락이 보였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형광등의 불빛이 그 사이로 통과했다.
"보고가 있습니다."
석현이 말했다. 목소리가 희미했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허락 없이 저승에 올 수 없는 규칙이 있는데?"
강석준이 물었다. 과장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규정을 어기는 자를 보는 공무원의 표정이었다.
"있습니다. 제가 위반했습니다."
석현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신체 폐기 처분을 진행하겠습니다."
이명희 부장이 손을 다시 들었다.
그 순간, 회의실 뒤쪽 문이 열렸다.
강석준이 일어섰다. 과장의 손이 부장을 막았다. 규정의 수호자가 규정의 집행을 멈추고 있었다.
"기다리십시오."
강석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의 눈은 회의실 뒤쪽을 향했다.
김은철이 나타났다. 손에는 청원서 더미가 들려 있었다.
"규정 개정 청원이 들어왔습니다."
"지금이 시점인가?"
이명희 부장이 물었다.
"지금입니다."
김은철이 청원서를 탁자 위에 놨다. 1,247장. 모든 미해결 사건의 기록. 그 청원서들은 탁자를 넘어 회의실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규정위원회의 위원들이 몸을 일으켜 청원서를 집어 들었다.
"이것들은 뭔가?"
이명희 부장이 물었다.
"석현 공무원 같은 사연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어 저승 신청을 미루고 있는 영혼들입니다."
김은철이 첫 번째 청원서를 펼쳤다.
"이준영. 교통사고로 죽은 아버지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딸을 위해 환생을 미루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잃은 후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규정은 이를 미련이라 하고 처벌합니다."
김은철이 두 번째 청원서를 펼쳤다.
"박미숙. 암으로 죽은 아내입니다. 살아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환생을 미루고 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아내를 찾고 있습니다. 규정은 그들의 만남을 금지합니다."
김은철이 세 번째 청원서를 펼쳤다.
"최영준. 뇌졸중으로 죽은 할아버지입니다. 손자의 첫 생일, 첫 학교, 첫 친구를 지켜보고 싶어 합니다. 규정은 3년을 초과한 체류를 금지합니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손자를 지켜보는 것이 죄라면, 자신은 그 죄를 받겠다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규정위원회의 위원들은 청원서를 읽고 또 읽었다.
"천 년 동안 우리는 규정만 봐왔습니다."
김은철의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규정이 놓친 게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이 1,247건의 청원서는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규정이 사랑을 처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처벌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강석준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 과장의 입술이 떨렸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 그 규정을 어기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규정은 저승의 기초였다. 규정이 없으면 저승은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화면에 떠 있는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규정이 옳다는 확신이 흔들렸다. 투명한 아버지와 투명한 아이. 그들을 지켜보는 할머니와 울고 있는 아내. 그들이 규정을 위반한 것인가? 아니면 규정이 그들을 위반한 것인가?
"규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부장이 말했다.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 아래에는 다른 감정이 있었다. 의문이었다.
"규정이 흔들리면 저승 전체가 흔들립니다. 혼란에 빠집니다. 이건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알겠습니다."
김은철이 대답했다.
"그런데 규정은 사람이 만든 것 아닙니까?"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규정위원회의 위원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도 한때 사람이었다. 죽고 저승에 와서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만든 규정이 사람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막으면 안 됩니다."
김은철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천 년을 지켜온 규정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석현 공무원이 보여준 것이 그것입니다.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
강석준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닫지 않았다.
"규정을 어기는 자가 규정을 바꾼다?"
과장의 목소리는 낮았다.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 안에는 규정 신봉자로서의 신념이 흔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 그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 규정을 어기는 자가 규정을 바꿀 수 있는가? 아니, 규정을 어기는 자만이 규정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강석준은 석현을 바라봤다. 반투명한 신체로 회의실에 서 있는 공무원을. 그리고 강석준은 깨달았다. 석현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규정을 지킬 수도 있었다. 아들을 놓고 저승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규정을 어겼다. 아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사랑을 위해.
"천 년을 지켜온 규정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강석준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자신의 목소리였다. 규정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 명의 공무원으로서, 한 명의 사람으로서.
"부장님."
강석준이 이명희 부장을 바라봤다.
"규정을 개정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이명희 부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장의 얼굴은 여전히 엄격했지만, 눈빛이 변했다. 그 눈빛 안에는 천 년의 무게를 짊어진 공무원의 고민이 있었다.
"규정을 어기는 것이 규정을 바꾸는 것이 된다면?"
이명희 부장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규정을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부장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엔 신체 폐기 처분의 손이 아니었다.
"규정 개정 청원을 접수하겠습니다."
회의실이 침묵했다. 그것은 거부의 침묵이 아니었다. 받아들임의 침묵이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이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명희 부장이 덧붙였다. 부장의 목소리에는 현실적인 우려가 담겨 있었다.
"규정 개정안을 검토하는 데 최소 48시간이 필요합니다. 위원회의 반발도 심할 것입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을 바꾼다는 것은 저승 전체의 시스템을 재검토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장이 화면을 가리켰다. 현생의 아파트. 투명한 아버지와 투명한 아이. 신체 붕괴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석현 공무원의 신체 붕괴는 멈추지 않습니다. 48시간 안에 규정을 바꾸지 못하면, 그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48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강석준이 물었다.
"우리는 규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규정을 바꿀 것인가?"
이명희 부장이 천천히 일어섰다.
"우리는 둘 다 해야 합니다."
부장이 말했다.
"규정 개정안을 검토하고, 동시에 석현 공무원의 신체 붕괴를 최대한 지연시킵니다. 48시간 유보. 그 사이에 규정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석현이 말했다.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유보일 뿐입니다. 보장이 아닙니다."
이명희 부장이 석현을 바라봤다.
"48시간 후 규정을 바꾸지 못하면, 당신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도 저승으로 강제 송출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위원회의 반발도 심할 것입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을 바꾼다는 것은 저승의 기초를 뒤흔드는 것입니다. 일부 위원들은 이를 거부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부족합니다. 48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을 바꾸기에는."
부장의 목소리에는 현실적인 절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부장은 석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는 희미한 희망이 있었다.
"48시간입니다. 그 사이에 기적을 만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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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강남역 근처의 한 카페.
밤 11시 30분.
석현이 앉았다. 반투명한 신체로. 손가락이 커피잔을 통과했다. 하지만 따뜻함은 남아 있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신체 붕괴가 멈췄다. 아직 희미했지만, 더 이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준호가 옆에 앉았다. 투명한 아이가 투명한 아버지를 봤다.
"아빠, 가지 마."
"안 갈 거야. 약속."
석현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이 투명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정말로 작지만 분명한 따뜻함이 있었다.
"48시간이 남아 있어."
"그 안에 뭘 할 거야?"
"규정을 바꿀 거야."
석현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희미했지만, 그 희미한 목소리 안에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확신만으로는 부족했다. 위원회의 반발도 심할 것이고, 신체 붕괴도 가속화될 수 있다. 48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리고 석현은 알고 있었다. 규정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을 바꾸려면, 더 강한 이유가 필요했다. 더 많은 증거가 필요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너 같은 아이가 1,247명 더 있어. 모두 아버지 곁에 있고 싶은 아이들이야. 규정이 그들을 막고 있어."
"그럼 아빠가 바꿀 거야?"
"그럼 우리가 바꿀 거야."
석현이 아이의 손을 더 단단하게 잡았다. 투명한 손가락이 투명한 손가락을 꽉 잡았다. 손가락이 통과하지 않았다. 두 투명함이 겹쳤을 때 따뜻함이 전달됐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따뜻함이. 그리고 그 따뜻함 안에는 1,247명의 영혼들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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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7분.
저승 행정동 회의실에서 긴급 회의가 다시 소집됐다.
안건: 규정 개정 청원서의 1차 검토.
이명희 부장이 첫 번째 문서를 펼쳤다.
**'미련의 재정의: 사랑에 기인한 미련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이어야 한다.'**
강석준이 다음 문서를 펼쳤다.
**'가족 단위 환생 규정 신설: 영혼과 그를 사랑하는 자들이 함께 환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서.
**'석현 공무원에 대한 규정 위반 처벌 유보: 규정을 어긴 자가 규정을 바꾸는 첫 번째 사람이 되도록 허용한다.'**
규정위원회의 위원들은 문서를 읽었다.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는 눈을 감았다. 일부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이것은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을 뒤집는 것입니다."
한 위원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명희 부장이 대답했다.
"하지만 천 년을 지켜온 규정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승의 기초는 어디에 있는가?"
다른 위원이 물었다.
"규정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강석준이 대답했다.
"저승도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와서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승도 사람의 감정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규정위원회의 위원들은 각자 고민하고 있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을 바꾼다는 것. 그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규정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명희 부장은 화면을 봤다. 현생의 아파트. 투명한 아버지와 투명한 아이. 그들을 지켜보는 할머니와 울고 있는 아내. 그들의 모습이 부장의 눈에 들어왔다.
"투표하겠습니다."
이명희 부장이 말했다.
"규정 개정안에 찬성하는 위원은?"
규정위원회의 위원들이 손을 들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지만 손을 들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을 바꾸기로.
"반대하는 위원은?"
일부 위원들이 손을 들었다. 규정을 지키고 싶은 위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화면을 보고 있었다. 투명한 아버지와 투명한 아이. 그들을 지켜보는 가족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반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찬성 다수입니다."
이명희 부장이 말했다.
"규정 개정안을 승인합니다."
회의실의 모든 모니터가 동시에 깜빡였다.
저승의 감시망이 규정의 변화를 감지했다. 천 년을 지켜온 규정이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신체 붕괴의 명령이 취소됐다.
---
현생에서.
투명했던 석현의 손가락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희미한 윤곽이 점점 선명해졌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통과하지 않았다. 투명한 손이 투명한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이제 확실한 온기가 있었다.
준호가 아버지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아빠?"
"여기 있어.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석현이 아이를 안았다. 투명한 팔이 투명한 아이를 안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통과하지 않았다. 두 투명함이 겹쳤을 때 따뜻함이 전달됐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따뜻함이.
거실 문이 열렸다.
이수진이 나타났다.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통과하지 않았다. 온기가 전달됐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온기가.
"아니야, 아니야. 정말?"
이수진이 울었다. 하지만 이제 그 울음은 절망의 울음이 아니었다. 기쁨의 울음이었다. 규정이 바뀌었다. 저승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가족이 다시 만났다.
박옥희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손자를 안았다. 투명한 손자가 할머니의 팔에 안겼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투명한 손자의 따뜻함을 느꼈다.
"할머니가 알았어. 할머니가 알았다고."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속삭임 안에는 천 년의 규정을 바꾼 사랑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