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본문

저승 재정과세청 회의실의 모든 모니터가 동시에 깜빡였다.

석현이 화면에 나타났을 때, 이명희 부장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반투명한 몸, 손가락만 제대로 보이는 형상. 천 년을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공무원의 말로가 이런 것인지, 이명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석현을 바라봤다.

"규정 제7362조를 낭독하겠습니다."

강석준 과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 뒷줄에는 저승 규정 위원회의 위원 열두 명이 앉아 있었다.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수정된 적 없는 규정들. 그들의 얼굴은 모두 엄숙했다.

"사망자가 현생에 체류할 경우, 저승 공무원은 이를 저지할 의무가 있으며, 의무 불이행 시 신체 폐기 처분을 한다."

석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 규정을 천 년을 넘게 집행해왔기 때문이다.

그때 김은철이 일어섰다. 동료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회의실 분위기가 순간 굳었다.

"부장님, 이의 제기합니다."

"이의 사유를 진술하시오."

이명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은철은 서류 묶음을 들어올렸다. 그 안에는 1,247명의 이름과 사건 번호가 적혀 있었다.

"미해결 사건 1,247건입니다. 모두 규정 제7362조로 인해 강제 송출된 유령들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현생의 가족을 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저승에 와서도 그들의 미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화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미련'이라 부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죽음도 끊을 수 없는 감정'입니다."

김은철의 목소리가 떨렸다. 천 년을 저승 공무원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규정은 그 감정을 끊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끊을 수 없습니다. 끊으면 안 됩니다."

강석준이 김은철을 바라봤다. 과장의 얼굴에 가느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규정을 제안합니다. '유령의 미련이 사랑인 경우, 현생 체류를 허가한다. 이를 돌보는 저승 공무원은 '특수 상황 담당자'로 임명되며, 이는 규정 위반이 아닌 신규 업무로 분류한다.'"

회의실의 열두 명 위원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명희 부장을 봤다.

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의 석현을 봤다. 반투명한 몸. 천 년 무결의 기록. 그리고 그 기록을 깨기로 선택한 공무원의 눈.

"투표합니다."

이명희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했다.

투표는 11표 대 1표였다. 유일한 반대표는 저승의 가장 경직된 관료로부터 나왔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새로운 규정은 통과했다. 천 년 동안 한 번도 개정된 적 없는 저승의 규정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무릎을 꿇었다.

화면의 석현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반대다. 다시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

현생 강남 아파트의 거실에서 석현의 몸이 서서히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수진이 먼저 비명을 질렀다.

"남편!"

박옥희가 일어섰다. 손자의 투명한 손가락이 아버지의 셔츠 단추를 더 강하게 집었다.

"아빠, 아빠!"

준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처음으로 확실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저승 공무원의 귀에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현생의 아들이 내는 목소리.

석현의 손가락이 먼저 돌아왔다. 손등. 팔. 그리고 얼굴.

이수진이 남편을 안았다. 오 년 전부터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 그것이 다시 돌아왔다.

"우리 이제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어?"

준호가 묻는 목소리가 떨렸다. 투명한 손가락이 셔츠 단추를 잡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석현이 대답했다. 천 년 동안 규정만 읽어온 입에서 나온 말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약속이야?"

"약속이다."

준호가 아버지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투명한 몸은 여전히 통과했다. 손가락은 닿았지만, 가슴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준호는 '아버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박옥희가 천천히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 이 가족이 앞으로도 매일 함께할 아침들을 위해.

---

**1년 후**

햇빛이 창문을 통해 거실로 들어왔다.

아침 7시 30분. 식탁에는 계란 계란말이, 김, 밥이 놓여 있었다. 이수진이 준비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우울증 약을 끊었다. 손자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준호가 투명하게 아버지 옆에 앉았다. 여전히 투명했지만, 이제 그것은 자연스러웠다. 손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유령이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규정도 개정되었다. 아주 제한적으로, 그리고 매우 천천히.

"우리 준호, 오늘도 투명하네?"

석현이 물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천 년 동안 본 적 없는 미소가 떠 있었다.

"응, 아빠. 근데 괜찮아. 투명해도 아빠가 나 보잖아."

준호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은 여전히 통과했지만, 손가락은 닿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낮에는 준호가 할머니 박옥희와 함께 거실에 앉아 만화를 봤다. 할머니는 손자를 볼 수 없지만, 손자의 웃음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녁에는 석현이 저승에서 돌아왔다. 그는 이제 '특수 상황 담당 공무원'이었다. 1,247건의 미해결 사건을 하나씩 재검토하고, 그들 가족들의 특수 상황을 심사하는 일. 천 년 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 감정이 필요한 일.

"오늘 몇 건을 처리했어?"

박옥희가 물었다.

"세 건. 모두 통과했다."

석현이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있었지만, 눈에는 빛이 있었다.

강남역 근처 카페에서는 저승 공무원 김은철과 강석준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규정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구나."

김은철이 말했다.

강석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 년 동안 본 적 없는 웃음. 그것도 과장의 얼굴에서.

"석현이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영원히 규정만 읽고 있었을 거야."

저승 재정과세청의 사무실에서는 이명희 부장이 새로운 규정 문서를 들고 있었다.

**제1조: 유령의 미련이 '사랑'인 경우, 현생 체류를 허가한다.**

부장의 얼굴은 여전히 엄숙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가만히 그 문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

그날 밤, 거실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아니, 달빛이었다.

석현과 준호가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아버지의 셔츠 단추를 잡고 있었다. 이제 그것이 유일한 접촉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빠, 우리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있어?"

"그렇다."

"약속?"

"약속이다."

석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천 년을 저승에서 살면서 배우지 못했던 감정. 규정이 아닌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죽음도 끊을 수 없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 석현은 알았다.

준호의 투명한 손가락이 단추를 더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규정도, 규칙도, 저승의 명령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이 순간, 이 따뜻한 일상, 이 사랑만이 중요했다.

창문 너머로 별들이 떠올랐다. 천 년을 저승에서 본 별과는 다른 별들. 현생의 별.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보는 별.

석현은 그 별들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생각했다.

'죽음도 못 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까.'

준호가 아버지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아빠, 사랑해."

투명한 손가락이 셔츠 단추를 잡은 채로.

"나도 너를 사랑한다, 준호."

천 년 동안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말. 저승 공무원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현생의 거실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규정의 시작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규정을 바꾼 날. 따뜻한 일상이 저승의 냉정한 시스템을 녹인 날.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밝게 빛났다.

# 새로운 규정, 따뜻한 일상의 시작

저승 재정과세청의 회의실 모니터가 동시에 깜빡였다.

이명희 부장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손은 책상 위의 문서를 짚고 있었다. 규정 위원회 최종 심의 결과. 천 년 동안 한 번도 수정된 적 없는 저승의 절대 규칙.

"석현 공무원의 규정 위반을 인정한다."

부장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그 위반이 만든 선례는 저승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1,247건의 미해결 사건. 모두 같은 이유다. 미련. 사랑하는 사람을 놓지 못하는 마음."

강석준 과장은 회의실 뒤쪽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지만, 눈은 움직였다. 화면에 떠오르는 수치들을 따라가며.

"이 위원회는 새로운 규정을 제안한다."

이명희가 종이를 들어 올렸다. 인쇄 된 글씨가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였다.

"**제1조: 유령의 미련이 '사랑'인 경우, 현생 체류를 허가한다. 단, 저승 공무원의 책임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회의실 안의 공무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펜을 떨어뜨렸다. 그 소리가 울렸다.

강석준은 입을 열려다 다시 닫았다. 규정이 바뀐다. 천 년 동안 절대불변이라고 생각한 규정이.

"**제2조: 현생에 체류하는 유령의 감정 변화는 감시 대상이 아니다. 단, 미련의 영구화를 방지하기 위해 6개월마다 재심사를 실시한다.**"

김은철은 회의실 옆 복도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1,247건의 청원서가 들려 있었다. 미처리 사건들. 저승에서 외면한 사람들. 이제 그들에게도 기회가 생긴다.

부장이 펜을 내려놨다.

"이 규정은 오늘부터 즉시 효력을 가진다. 석현 공무원은 신체 폐기 처분 대신 '특수 상황 담당 공무원'으로 재임명된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1,247건의 사례를 하나씩 재검토하는 것이다."

회의실 안의 공무원들이 웅성거렸다. 규정이 바뀐다. 저승의 규정이 바뀐다.

"이 결정에 이의가 있는가?"

이명희가 물었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

현생 아파트의 거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3시쯤.

석현의 몸이 다시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손가락부터. 손목. 팔. 어깨. 얼굴. 한 줄기 빛이 몸을 따라 흐르듯이, 투명함이 걷혀나갔다.

"어...어?"

이수진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석현이?"

박옥희가 주방에서 나왔다.

"아빠!"

준호가 거실 한가운데서 투명한 손을 펼쳤다.

석현의 몸이 완전히 불투명해지는 순간, 거실이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이수진이 울었다. 준호가 웃으며 울었다. 박옥희가 손을 모아 입에 가져갔다.

"왔다. 돌아왔다."

석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담담했지만, 눈에는 습기가 있었다.

준호가 아버지를 안으려고 뛰어왔다. 투명한 팔이 석현의 목을 감싸려고 했다. 손가락은 여전히 통과했다. 몸은 여전히 닿지 않았다.

하지만 준호는 웃고 있었다.

"상관없어. 아빠가 나 보잖아."

투명한 손가락이 석현의 셔츠 단추를 잡았다. 손가락은 통과했지만, 손가락은 닿았다.

이수진이 투명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6개월 전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슬픔이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것도 있었다. 감사함. 기쁨. 아이가 아버지 곁에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우리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어?"

준호가 물었다.

"그렇다."

석현이 대답했다.

"약속?"

"약속이다."

석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천 년을 저승에서 살면서 배우지 못했던 표정. 규정이 아닌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표정.

---

일주일 후.

저승 재정과세청의 사무실은 다르게 보였다. 같은 책상, 같은 의자, 같은 형광등. 하지만 공기가 달랐다.

강석준 과장의 책상에는 이제 두 개의 파일이 놓여 있었다. 기존의 '규정 준수' 파일과 새로운 '특수 상황 심사' 파일.

"다음 사건은?"

강석준이 물었다.

석현이 파일을 펼쳤다. 사진 한 장. 50대 남성. 생전에 아내와 함께 있고 싶어 저승 신청을 미룬 유령.

"미련의 대상: 배우자. 사망 후 8개월. 아내는 여전히 남편의 신발을 현관에 놓아두고 있습니다."

석현이 읽었다.

"규정 위반 판정?"

"아니오. 규정 1조 승인 권고."

강석준은 잠깐 파일을 들었다 놨다.

"승인하겠다."

그리고 다음 파일을 펼쳤다.

"다음."

---

강남역 카페. 오후 4시 30분.

김은철과 강석준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규정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구나."

김은철이 말했다. 그의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다.

강석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 년 동안 본 적 없는 웃음. 과장의 얼굴에서 나온 그 웃음은, 마치 얼음이 녹는 소리 같았다.

"석현이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영원히 규정만 읽고 있었을 거야."

"그래도 규정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어."

김은철이 말했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규정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이제 알았어."

강석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1,247건 중 몇 건이 통과했어?"

"325건. 아직도 심사 중이야."

"석현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모르겠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김은철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도시 풍경. 현생의 거리.

"그게 뭐라고 생각해?"

"그 아이를 만나지 못했으면, 규정은 영원히 바뀌지 않았을 거야. 석현이가 준호를 만나지 못했으면, 우리는 영원히 이 규정 안에서만 살았을 거고."

강석준이 대답했다.

"죽음 속에서 사랑을 찾은 아이가, 저승의 규정을 바꿨다."

---

현생 아파트. 밤 10시.

거실의 불이 꺼져 있었다. 창밖의 달빛만 들어오고 있었다.

석현과 투명한 준호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아빠, 그 별이 뭐야?"

준호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투명한 손가락이. 통과하지만, 가리켜진다.

"오리온자리야."

석현이 대답했다.

"왜 그런 이름이야?"

"옛날 사람들이 별들을 보고 그림을 그렸어. 그 그림이 오리온이라는 사냥꾼처럼 보여서."

"아빠, 저 별들도 아빠처럼 규정 있어?"

준호가 물었다.

석현은 잠깐 생각했다.

"없을 거야. 별들은 자유로워."

"아빠는 이제 자유로워?"

투명한 손가락이 석현의 셔츠 단추를 더 강하게 잡았다.

"그렇다. 너 덕분에."

석현이 말했다.

---

저승 재정과세청. 밤 11시 50분.

이명희 부장의 책상 위에는 새로운 규정 문서가 놓여 있었다.

**제1조: 유령의 미련이 '사랑'인 경우, 현생 체류를 허가한다.**

강석준이 그 문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옆에서 김은철이 말했다.

"이제 또 다른 석현들이 나올 거야."

"그렇지."

강석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해."

"규정이 허락하는 한?"

"규정이 허락하는 한."

부장의 책상 위에서, 새로운 규정의 글씨가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였다.

---

현생 아파트. 새벽 1시 15분.

거실의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석현과 준호가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아버지의 셔츠 단추를 잡고 있었다.

이제 그것이 유일한 접촉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빠, 우리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있어?"

"그렇다."

"약속?"

"약속이다."

석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천 년을 저승에서 살면서 배우지 못했던 감정. 규정이 아닌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죽음도 끊을 수 없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 석현은 알았다.

준호의 투명한 손가락이 단추를 더 강하게 잡았다.

"아빠, 사랑해."

투명한 손가락이 셔츠 단추를 잡은 채로.

"나도 너를 사랑한다, 준호."

천 년 동안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말. 저승 공무원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현생의 거실에 울려 퍼졌다.

---

1년 후.

이준석 가족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침 7시. 거실에서 석현과 준호가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준호는 여전히 투명했지만, 투명한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을 수 있었다. 손가락이 통과했지만, 의지가 있으면 물건을 들 수 있었다. 저승 규정이 바뀌면서, 유령의 상호작용 범위도 넓어진 것이다.

"아빠, 할머니가 뭐라고 했어?"

준호가 물었다.

"할머니가 오늘 떡국을 끓인대."

"우리도 먹을 수 있어?"

"그렇지."

석현이 준호의 투명한 머리를 쓸어내렸다. 손가락은 통과했지만, 쓸어내렸다.

낮 12시. 이수진과 준호가 거실에 앉아 만화를 보고 있었다. 엄마는 아들을 볼 수 없지만, 아들의 웃음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녁 6시. 박옥희가 거실에 들어왔다. 손자를 볼 수 없지만, 손자의 존재는 느낄 수 있었다. 거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따뜻해졌다.

밤 8시. 석현이 저승에서 돌아왔다. 그는 이제 '특수 상황 담당 공무원'이었다. 1,247건의 미해결 사건을 하나씩 재검토하고, 그들 가족들의 특수 상황을 심사하는 일. 천 년 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 감정이 필요한 일.

"오늘 몇 건을 처리했어?"

박옥희가 물었다.

"일곱 건. 모두 통과했다."

석현이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있었지만, 눈에는 빛이 있었다.

---

강남역 카페. 오후 3시.

김은철과 강석준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규정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구나."

김은철이 말했다.

강석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 년 동안 본 적 없는 웃음. 그것도 과장의 얼굴에서.

"석현이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영원히 규정만 읽고 있었을 거야."

---

거실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석현과 투명한 준호가 함께 앉아 있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아버지의 셔츠 단추를 잡고 있었다.

석현의 얼굴에는 천 년 동안 본 적 없는 미소가 떠 있었다.

규정이 아닌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미소.

"아빠, 영원히?"

"영원히."

투명한 손가락이 단추를 더 강하게 잡았다.

---

저승 재정과세청의 사무실.

이명희 부장의 책상에는 새로운 규정 문서가 놓여 있었다.

**제1조: 유령의 미련이 '사랑'인 경우, 현생 체류를 허가한다.**

강석준이 그 문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옆에서 김은철이 말했다.

"규정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구나."

강석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제 우리는 알았어. 저승의 규정도 사람을 위해 있는 거고, 사람이 규정을 만드는 거라는 걸."

모니터 화면에는 325건의 '승인' 표시가 떠 있었다.

그 아래로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건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1,247건 중 325건이 통과했다.

그리고 아직도 심사 중이었다.

저승의 규정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변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따뜻한 일상이 저승의 냉정한 시스템을 녹이고 있었다.

---

그날 밤, 거실의 창문으로 별들이 떠올랐다.

천 년을 저승에서 본 별과는 다른 별들.

현생의 별.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보는 별.

투명한 손가락이 아버지의 셔츠 단추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규정도, 규칙도, 저승의 명령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이 순간, 이 따뜻한 일상, 이 사랑만이 중요했다.

---

그런데 그 밤, 저승 재정과세청의 모든 모니터가 동시에 깜빡였다.

새로운 신호.

새로운 사건.

새로운 미련.

그리고 그 미련들을 정리할 새로운 규정.

이명희 부장은 책상에서 일어섰다.

"강석준."

"예?"

"석현의 일이 이제 시작이야. 우리는 이제 1,247건을 넘는 사건들을 마주할 거야. 모두 같은 이유로. 사랑."

"알겠습니다."

강석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모두 도와야 해."

이명희 부장이 새로운 규정 문서를 들었다.

**제1조: 유령의 미련이 '사랑'인 경우, 현생 체류를 허가한다.**

"이것이 시작이다."

부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제는 다른 것도 있었다.

결심. 책임감. 그리고 아주 작지만 분명한, 따뜻함.

저승의 규정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변하고 있었다.

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규정 개정이 아니라, 저승 전체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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