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거실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준호는 여전히 만화를 보고 있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리모컨을 잡으려고 몇 번이나 헛도는 중이었다. 석현은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내의 발걸음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11시 55분.

"준호, 깨있어?"

"네."

투명한 아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나왔다.

박옥희가 거실 문을 열었다.

형광등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텔레비전만 켜져 있었고, 리모컨은 소파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화면의 밝기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어?"

박옥희는 눈을 깜빡였다. 아까는 분명히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할머니, 나 여기 있어."

소파 위의 공간에서 투명한 손가락이 나타났다. 그리고 7살 아이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투명한 머리, 투명한 어깨, 투명한 작은 손. 준호였다.

박옥희의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영화를 보듯 화면 안의 무언가를 바라보듯, 그저 바라봤다. 60년을 살면서 본 것이 아닌 것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

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얼굴이 박옥희를 향했다.

"준호야."

박옥희의 목소리는 속삭임이었다. 마치 손자가 꿈속에서 나타난 것 같아서, 너무 큰 목소리로 부르면 깨어날 것 같았다.

"할머니 여기 있어. 아버지 옆에 있어."

투명한 손가락이 소파의 한쪽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하지만 그곳이 석현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박옥희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투명한 손자의 어깨를 안으려고 팔을 벌렸다. 손가락이 투명한 신체에 닿으려고 했다.

손이 통과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박옥희의 팔이 떨어졌다.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이번엔 더 조심스럽게. 투명한 손을 잡으려고 했다. 준호도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석현)가 그렇게 하듯이, 손자도 할머니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손이 다시 통과했다.

"아."

박옥희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그것이 울음인지 숨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손자를 안을 수 없다는 현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할머니?"

준호가 물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또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박옥희의 얼굴을 향해.

"그래도 괜찮아, 준호."

박옥희가 말했다.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냥 흘렀다.

"할머니가 여기 있고, 너도 여기 있고, 아버지도 여기 있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해."

박옥희의 손은 더 이상 투명한 손자를 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손을 공중에 멈추었다. 통과할 것을 알면서도, 그저 가까이 두었다.

"할머니."

"응. 할머니가 여기 있단다."

거실의 형광등이 또 깜빡였다.

부엌에서 석현이 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발걸음이 거실로 향했다.

"어머니?"

석현이 거실 문을 열었다. 박옥희의 옆에 투명한 준호가 있었다. 할머니의 손이 손자의 어깨 위에 멈춰 있었고, 할머니의 눈은 젖어 있었다.

"뭐가 있는 거야?"

박옥희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준호가 있어요."

석현이 말했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평생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유령이에요. 6개월 전에 죽었어요. 이준석의 아들이에요."

박옥희가 천천히 돌아섰다. 석현을 바라봤다.

"그건 내가 이미 알고 있었어."

박옥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머니?"

"처음부터 알았어. 준호가 태어났을 때부터."

박옥희가 다시 돌아섰다. 투명한 준호를 바라봤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아니었다. 3년 전 산실에서 처음 준호를 봤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무도 울지 않았다. 의사도, 간호사도, 심지어 이수진도. 오직 석현만 울었다. 그 후 아이는 자라면서 이상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났다. 준호가 있는 곳의 온도가 떨어졌고, 개들이 짖었고, 때론 거울이 흐려졌다. 박옥희는 60년을 살면서 많은 것을 봤다. 할머니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도 여기 있다는 게 고마워. 할머니가 너를 못 안아도, 여기 있다는 게."

"할머니, 사랑해."

준호가 말했다. 투명한 목소리였지만, 7살 아이의 목소리였다.

"할머니도 사랑해, 우리 준호."

박옥희가 손자의 투명한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통과할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이 투명한 머리를 스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손자는 느낀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석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저승 공무원의 전용 신호음이었다. 그것은 현생 휴대폰에서 나지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 거실에서는 들렸다.

석현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강석준 과장이었다.

"이준석 공무원. 48시간이 남았다. 저승 규정 제47조 제3항에 따라, 당신은 현생 체류를 즉시 종료하고 저승으로 귀환해야 한다. 미처리 사건 등록 상태로 인해 추가 규정 위반 시 징계 절차가 개시된다."

전화의 음성은 기계적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인간적인 고민이 있었다. 강석준도 이 규정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그것을 말할 수 없을 뿐이었다.

"48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석현이 물었다.

"신체 생명력 0%, 영혼 고착 확정. 당신은 현생 시신으로 남고, 이 아이는 저승 미처리 사건으로 영구 등록된다."

전화가 끊겼다.

석현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거실의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이번엔 한 번이 아니라 계속 깜빡였다. 마치 시간의 박자를 세고 있는 것처럼.

박옥희가 말했다.

"48시간 안에 뭘 해야 한다는 거야?"

"저승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 전에 준호를 송출해야 하고요."

"송출?"

"저승으로 보내는 거예요. 규정상 유령은 현생에 있을 수 없거든요."

박옥희가 준호를 바라봤다.

"그럼 우리 준호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저승으로 가요. 그곳에서 다시 환생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또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돼요."

"그럼 우리가 못 본단 말이야?"

석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박옥희가 다시 손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통과할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이 투명한 손과 만났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손을 거기에 두었다.

"그래도 괜찮다."

박옥희가 다시 말했다.

"왜?"

"우리 준호가 여기 있으니까. 비록 만질 수 없지만, 여기 있으니까."

박옥희의 목소리에는 슬픔만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있었다. 규정이 아닌, 할머니의 사랑이 있었다.

석현은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천 년을 저승 공무원으로 살면서, 규정이 절대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흔들렸다. 죽음도 빼앗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규정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이수진이었다.

"어머니? 뭐 하세요?"

이수진이 거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멈췄다. 남편의 옆에서 어머니가 손을 공중에 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안으려고 팔을 벌린 채로.

"뭐가 여기 있어?"

이수진이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마지막 3년을 함께 한 남편의 비밀을 마주하려는 두려움이었다.

"우리 아들이야."

박옥희가 대답했다.

"뭐?"

이수진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투명한 공간을 향해.

"준호가 여기 있다는 거야."

박옥희가 손자의 투명한 머리를 가리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하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준호가 있었다.

이수진이 손을 내밀었다. 투명한 아들을 안으려고. 손가락이 투명한 신체에 닿으려고 했다.

손이 통과했다.

이수진의 손이 떨어졌다.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

투명한 목소리가 나왔다. 준호였다.

이수진의 무릎이 꺾였다. 어머니(박옥희)가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거실의 형광등이 계속 깜빡였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48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수진이 소파에 앉았다. 움직이지 않고. 어머니 박옥희는 그 옆에 서 있었고, 한 손은 여전히 공중에 있었다. 투명한 손자를 안으려던 팔이.

"준호가 정말... 여기 있는 거야?"

이수진의 목소리는 부러진 그릇처럼 갈라져 있었다.

"네."

석현이 대답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그럼 이 3년... 넌 뭘 한 거야?"

"규정을 어겼어요."

"규정?"

"저승의 규정이에요. 죽은 사람은 일정 시간 안에 저승으로 가야 한다는."

이수진이 웃음처럼 들리는 음성을 냈다. 울음이 섞인 웃음이었다.

"저승? 넌... 저승 공무원이야?"

"네."

석현은 이준석의 신체를 빌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완전한 진실을 말했다.

"천 년 동안."

이수진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손을 놨다. 박옥희의 손에서.

"이게 말이 돼? 이게 말이 돼?"

반복했다. 계속 반복했다.

"3년을 함께 살았어. 함께 밥을 먹었어. 함께 잤어. 그런데 넌 다른 사람이었어?"

이수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우리 준호는 죽어 있었어? 3년을 내 옆에서?"

"네."

석현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뭐 하는 거야?"

이수진의 분노는 거실 가득 퍼졌다. 그것은 3년간 억눌러 온 불안감이 한 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남편이 아닌 누군가, 죽은 아들, 자신이 모르던 세상.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깨달음.

"날 버리고 가는 거야? 우리 준호를 저승으로 보내는 거야?"

"아니요."

"뭐?"

"저는 준호를 데려갈 수 없어요. 규정상 유령은 계속 현생에 있으면 영구적으로 저승으로 갈 수 없게 돼요."

석현이 천천히 말했다. 이수진의 분노를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저는 현생에 남겠어요."

거실이 조용해졌다. 이수진의 분노가 갑자기 사그라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했다. 남편이 자신을 버린다는 분노에서, 남편이 죽음을 택한다는 깨달음으로.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 혼란이 밀려들었다. 이 남자가 정말 자신의 남편인가? 천 년을 저승에서 산 공무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3년을 함께 산 남편이 죽으려 한다는 게 현실인가?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박옥희가 석현을 바라봤다. 할머니의 눈이 흐려졌다.

"넌 정말 그럴 거야?"

"네."

"규정을 어기고?"

"네."

"그럼 넌?"

"저도 이곳에 남아요. 아마 신체가 점점 약해질 거고, 언젠가는 죽을 거예요. 하지만... 그 전까지는 준호의 곁에 있을 거예요."

투명한 준호가 석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손가락들이 거의 통과했지만, 극히 일부만 닿았다. 극히 일부만 감각이 전달되었다.

"아빠."

"응."

"고마워."

7살 아이의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천 년을 저승에서 살아온 공무원도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있었다.

이수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남편이 죽으려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손자를 안으려고 팔을 벌렸던 것처럼, 이수진도 아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들은 공중에서 맴돌 뿐이었다.

"우리 준호..."

이수진이 투명한 공간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을. 하지만 이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3년을 어떻게 지냈어?"

"엄마?"

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나 여기 있어. 아버지 옆에."

이수진이 손을 내밀었다. 아들을 안으려고. 손가락들이 공중에서 맴돌았다. 잡을 것이 없었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박옥희가 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잡혔다.

"우리 준호가 여기 있다. 비록 손은 안 잡혀도, 우리 준호가 여기 있다."

박옥희의 목소리에는 할머니의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절대 굽히지 않는 사랑이 있었다.

저승 감시망의 경보음이 울렸다. 이번엔 전과 다른 신호였다. 규정 완전 위반. 공무원 신분 박탈. 강제 귀환 불응 확정.

석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저승 재정과세청의 과장 강석준이었다.

"석현."

"네."

"47시간 내에 저승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현재 신체의 모든 생명력이 차단된다. 동시에 유령 준호는 영구 체류 상태로 등록되어 저승의 환생 시스템에서 제외된다. 이것이 규정이다."

"알겠습니다."

"이것이... 정말 선택인가?"

강석준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있었다. 규정을 지키는 관료의 의문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의문이었다. 천 년을 규정만 따르는 것이 옳은가? 이 남자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려 한다. 그것이 규정을 어기는 일인가? 아니면 규정을 초월하는 사랑인가?

"네."

"그럼 이제 넌 죽는 거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거실의 형광등이 한 번 크게 깜빡였다. 그리고 멈췄다. 더 이상 깜빡이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빛났다.

이수진이 손을 내렸다. 얼굴이 젖어 있었다. 눈을 들어 석현을 바라봤다.

"정말 죽을 거야?"

"네."

"그럼 우리는... 또 혼자가 되는 거야?"

박옥희가 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 우리 준호가 여기 있으니까."

이수진이 투명한 공간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을. 하지만 이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준호... 안녕?"

투명한 목소리가 나왔다.

"엄마, 나 여기야."

거실의 형광등이 부드럽게 빛났다.

박옥희가 시계를 봤다.

"47시간 남았네."

"할머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47시간 동안."

박옥희가 일어났다. 손자의 투명한 손가락이 할머니의 손을 만지려고 했다. 거의 통과하지만, 극히 미세한 감각이 전달되었다.

이수진이 일어났다.

"내가... 우리 아들을 봐야 해."

"어떻게?"

"그 사람이 있잖아."

이수진이 석현을 가리켰다.

"뭘?"

"너가 우리 준호를 볼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럼... 넌 우리 준호를 그려줄 수 있지 않을까?"

석현이 멈췄다.

"그림?"

"우리 아들이 지난 3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수진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죽은 아들을 만날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도, 아들이 남긴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은 어머니의 간절함이.

"엄마?"

투명한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 준호, 할머니하고 엄마한테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줄래?"

박옥희가 손자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바라봤지만, 그곳에 있는 손자를 바라봤다.

"응, 할머니."

거실이 조용해졌다. 형광등이 부드럽게 빛났다.

47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가족은 함께할 것이었다. 죽은 아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3년을 함께 산 남편의 마지막 시간을 지키고, 손자가 남긴 흔적을 가슴에 새길 것이었다.

석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천 년을 저승에서 살면서 배우지 못한 것을 이제 배우고 있다는 것을.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제한된 시간 안에서, 사랑은 가장 큰 규정이 되었다.

거실의 형광등이 부드럽게 빛났다.

현생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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