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의 무게
회사에서 나오는 길, 석현의 신발은 아스팔트를 헛디뎠다.
"이준석 과장, 혹시 괜찮으세요?"
비서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렸다. 석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울역 지하 대합실의 형광등이 눈을 내려찍고 있었고, 손에 쥔 종이는 붉은 글씨로 점철되어 있었다. **'성과 부진 경고장'**. 현생 회계사 이준석의 직함으로 삼 년을 버텨온 기록이 이 한 장의 종이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천 년을 저승에서 일했다. 결산 오류는 한 번도 없었다. 환생 자격 심사도 정확했다. 규정 위반도 없었다. 그런데 지난 사흘, 단 사흘 동안 이준석의 회계 일을 완전히 팽개쳤다. 클라이언트 미팅 취소, 보고서 미제출, 이메일 무응답. 부장은 오늘 아침 석현의 목을 낚아챘다.
"이준석, 자네 최근 태도가 뭔가요? 25년을 함께 일해온 동료를 모르겠네."
25년. 석현은 그 시간을 이준석의 기억 속에서만 알고 있었다. 이준석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마감은 절대 넘기지 않았고,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도 깔끔했다. 지금 그 모든 신용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탔다. 14층.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는데 손이 떨렸다. 저승에서는 떨림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규정이었고, 규정 안에서는 감정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손이 떨리고 있었다.
거실 문을 열었을 때 준호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몸이 햇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만화책을 보고 있는 척했지만, 석현의 얼굴을 본 순간 준호의 눈빛이 변했다.
"아빠, 일찍 왔네."
"응."
석현이 구두를 벗고 소파에 앉았다. 준호가 한 뼘 물러섰다. 아이는 여전히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투명한 손가락이 소파 쿠션을 만지작거렸다. 아이도 감지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늘 회사가 어땠어?"
준호의 목소리는 일곱 살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어른스러움으로 꾸며져 있었다. 죽은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괜찮았다."
거짓말이었다. 석현은 거짓말을 했다. 천 년을 저승에서 근무하며 거짓말이란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규정 앞에서 거짓말은 불가능했다. 규정은 절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석현은 일곱 살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투명한 눈동자가 석현을 관통했다.
"아빠가 거짓말해."
"뭐?"
"엄마도 말했어. 아빠가 요즘 자꾸 거짓말한대."
석현의 목이 졸렸다. 이수진이 알아챘다는 뜻이었다. 아내는 준호의 존재를 모르지만, 남편의 변화는 이미 감지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감지했을 것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여보, 지금 어디야?"
"집이다."
"아, 그래? 다행이야. 지금... 지금 가도 돼?"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수진은 회사에서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사무실 소음이 배경에서 들렸다. 그리고 가는 길에 뭔가 먹고 올 거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아래에는 다른 뭔가가 깔려 있었다. 결연함? 두려움? 석현은 현생의 감정을 아직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응. 괜찮아."
"정말? 정말 괜찮아?"
"응."
다시 거짓말이었다. 전화를 끊자 준호가 물었다.
"엄마가 울고 있었어?"
"아니다."
"아빠가 또 거짓말해."
석현은 아이를 쳐다봤다. 투명한 손이 소파 쿠션을 꽉 쥐고 있었다. 일곱 살 유령이 아버지보다 더 진실을 보고 있었다.
저승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규정 앞에서 모든 것이 투명했다. 누구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규정이 모든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생은 달랐다. 현생은 거짓말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거짓말들이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준호, 엄마가 계속 울어. 그거... 나 때문이야?"
아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투명한 손가락이 석현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아이는 자신의 죽음이 어머니의 슬픔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싶어 했다.
"아니다."
"또 거짓말이야."
석현이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옳았다. 이수진은 울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의 변화, 그 알 수 없는 따뜻함 속에서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준호를 그리워하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남편이 아들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망인지 고통인지 구분할 수 없어서 울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아빠를 잃고 싶지 않아."
석현이 고개를 들었다. 준호가 말했다.
"엄마가 어제 밤에 울었어. 아빠 옆에서. '제발 나도 잃지 마'라고."
저승 감시망이 울렸다. 석현의 가슴팍에 작은 기계음이 울렸다. 비상. 미련 수치 상승. 감정 레벨 초과.
석현은 준호의 손을 잡았다. 투명한 손가락이 자신의 손을 통과했다. 아이를 붙잡을 수 없었다. 아이를 안을 수 없었다. 아내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구할 수 없었다.
문이 열렸다. 이수진이 들어왔다. 얼굴은 부어 있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남편을 보자 멈췄다.
"여보."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 준호 때문에 이렇게 변한 건가?"
석현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준호가 투명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머니를 만지려고 했지만 손이 통과했다.
"아니다."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석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수진이 걸어왔다. 남편의 옆에 앉았다. 손을 잡으려고 했다. 석현이 손을 피했다. 규정이 자신을 제어하고 있었다. 감정이 남을수록 저승 감시망이 울린다. 만약 아내를 안으면, 만약 눈물을 흘리면, 감시망이 더 크게 울릴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어? 우리 남편이... 왜 자꾸만 멀어져?"
이수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들썩였다.
"준호가 죽고 난 뒤로 넌 자꾸 어딘가 멀리 있어. 내 말도 안 들리는 것처럼."
석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수진이 손을 다시 내밀었다. 이번엔 석현이 손을 맞잡았다.
"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럼 뭐야? 뭐가 문제야? 왜 자꾸 숨겨? 왜 내한테 거짓말을 해?"
이수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손으로 남편의 얼굴을 잡았다.
"우리 준호 때문에 자책하는 거야? 너 때문에 준호가 죽은 게 아니야. 제발... 제발 나한테 말해. 뭐가 이렇게 달라졌어?"
준호가 투명한 손을 아버지의 어깨에 얹었다. 아이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령도 울 수 있었다. 저승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너를 잃을까봐 두려워. 준호도 잃었는데 너까지..."
이수진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목이 메었기 때문이다. 석현은 아내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규정도 중요했다. 하지만 아내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천 년을 저승에서 일했지만 배우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규정보다 무거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저승 감시망이 계속 울렸다. 비상음이 커졌다.
"미련 수치 98%. 현생 체류 신체 생명력 62%."
음성이 울렸다. 저승의 음성이었다. 차갑고 무정한 톤으로 현생의 마지막을 알리고 있었다.
"아빠, 뭐야? 뭐가 울어?"
준호가 물었다. 아이는 저승 감시망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봤다.
"아무것도 아니다."
또 거짓말이었다. 석현은 거짓말의 무게를 처음으로 느껴봤다. 하나의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았다. 경고장이 나왔고, 아내가 울기 시작했고, 아이가 의심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이수진이 남편의 얼굴을 들었다. 남편의 눈이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언가가 자신을 향한 거짓말이라는 것도.
"미안해."
석현이 말했다.
"뭐가 미안한데?"
"모든 것이."
현관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박옥희였다. 시어머니는 장을 보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할머니는 거실로 가려다가 멈췄다.
소파 쿠션 사이에 뭔가가 끼어 있었다.
"어? 이게 뭐지?"
박옥희가 손을 뻗었다. 준호의 손가락이 들려 있는 작은 피아노 장난감이었다. 할머니의 손이 멈췄다. 이 집에는 아이가 없었다. 아이가 죽었다. 육 개월 전에.
그런데 할머니의 눈이 소파 쿠션 위의 공기를 바라봤다. 그곳에 뭔가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투명한 무언가. 할머니는 그 형상을 분명히 봤다. 아이의 형상.
박옥희는 손가락으로 공중을 만져봤다. 그곳에 뭔가가 있었다. 따뜻한 손. 손가락이 닿는 순간, 할머니의 몸이 경직되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시각이 흔들렸다. 육 개월 전에 느꼈던 그 따뜻함. 준호의 손.
"준호?"
할머니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이수진이 일어섰다. 석현도 움직였다. 박옥희는 손에 들린 장난감을 바라봤다.
"할머니?"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명한 아이의 목소리가. 할머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자신의 손가락 아래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박옥희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호의 장난감을 들었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떨렸다. 깨달음과 공포가 뒤섞인 떨림이었다.
"이거... 우리 준호 장난감이지?"
할머니의 목소리는 확신에 찼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다른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공포. 경악. 그리고 이해.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편이 아들의 이름을 자꾸 부르는 이유를, 거실에서 공중을 향해 말하는 이유를. 하지만 알고도 모르는 척 했다. 아들이 자신의 비밀을 지키려 한다면, 할머니도 그 비밀을 지킬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비밀이 손 안에 있었다. 따뜻한 아이의 손. 죽은 아이의 손.
박옥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석현을 먼저 찾았다. 그 다음 이수진을 봤다. 마지막으로 공중을 바라봤다. 준호가 있는 자리를.
"봤지. 방금."
"어디?"
"거기 앉아 있었어. 장난감 들고."
이수진이 소파로 달려갔다. 손을 내밀었다. 손이 통과했다. 아내는 아들을 안을 수 없었다.
"준호! 우리 준호!"
박옥희는 이수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석현을 봤다. 할머니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질책이 아니었다. 이해였다.
"그래서 넌 왜 이렇게 달라졌구나."
할머니는 장난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준호가 앉아 있을 자리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할머니의 손 위에 올라왔다. 할머니는 그것을 느꼈다. 손자의 온기. 육 개월 만에 다시 느끼는 그 따뜻함.
"할머니가 너를 지켜줄게."
박옥희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호했다. 규정이 무엇이든, 저승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다짐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저승 공식 라인이었다.
"현생 회계사 이준석 신체 빙의 공무원 석현. 이것은 저승 재정과세청 강석준 과장으로부터의 최종 통보입니다."
음성이 차갑고 명확했다. 석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 끝이었다. 모든 거짓말이 폭로되는 순간이 왔다.
"규정 위반 징계 절차 2단계: 현생 빙의 신체 회수 명령. 48시간 내에 현생 체류를 종료하고 저승으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기한 내 복귀하지 않을 경우 강제 귀환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통보가 끝났다. 거실에는 침묵만 남았다.
"48시간?"
이수진이 중얼거렸다. 아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빠, 48시간이면... 오늘 포함해서?"
준호가 물었다. 투명한 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옥희가 물었다. 할머니의 눈이 손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석현을 봤다. 마지막으로 이수진을 봤다.
"48시간 안에 연락 줄 거지? 어디로 가든... 우리한테?"
그것은 질문이면서 동시에 명령이었다. 아무리 규정이 무섭더라도, 아무리 저승이 강력하더라도, 가족을 버릴 수는 없다는 명령.
석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실의 형광등이 계속 밝게 빛나고 있었고, 투명한 아이의 손가락이 아버지의 셔츠 단추를 더 강하게 잡고 있었다. 이수진은 여전히 소파 위의 공기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이 통과했다. 아내는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48시간. 석현은 그 시간 안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규정을 어길 수 있을까. 아내를 안을 수 있을까. 아이를 안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석현은 결정하고 있었다. 규정이 절대라고 생각했던 천 년의 세월이 이 순간 흔들리고 있었다. 가족보다 무거운 규정이 있을까. 아내의 눈물보다 중요한 규정이 있을까. 아이의 손보다 소중한 규정이 있을까.
석현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