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검의 울음

"당신이 죽이지 않았다면 저는... 20년을 이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명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검은 옷의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도환의 검은 명진의 어깨에 닿아 있었고, 한 치만 더 내려가면 생명이 끝날 지경이었다.

"제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제 어머니도. 제 형도. 무림맹 사건 때 당신의 검이 부정을 척결한다며... 저희 집안 전체를 베어냈습니다."

도환이 검을 거두었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현실의 무게가 돌아왔다.

"그것이... 내 검이 만든 비극인가."

중얼거림이었다. 손가락이 펼쳤다 닥았다를 반복했다. 떨렸다. 20년간 느끼지 않은 감각이 돌아왔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얼음이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명진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당신이 역적이라고 믿었습니다. 20년을 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서운 스님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제 가족을 죽인 것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한 죽음이었습니까?"

질문이 검처럼 도환을 찔렀다. 도환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 순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수십 명의 기마병이 산길을 내려왔다. 모두 붉은 옷을 입었다. 적월교의 색깔이었다. 앞장선 말 위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얼굴이 곱고, 미소가 따뜻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는 뭔가 다른 것이 숨어 있었다.

적월(赤月)이었다.

"도환 선생님."

목소리는 꿀같이 부드러웠다. 적월은 말에서 내려 한 걸음씩 내딛었다. 현목과 백운이 도환의 뒤에 섰다. 긴장이 팽팽했다.

"강호에서 당신을 뵌 지 20년이 되었군요."

"당신이... 나를 기다렸단 말인가."

도환의 목소리가 낮았다.

"물론이지요. 당신은 강호의 가장 위대한 검객입니다."

적월이 손을 펼쳤다. 부하들이 문서 뭉치를 들고 나왔다. 기록들이었다. 20년 전 무림맹 괴멸 당시의 기록들.

"이것들은 당신의 명예를 회복시킬 증거들입니다. 무림맹 내부의 부정, 약탈, 살인. 모두 당신이 척결하신 악들입니다."

도환이 기록들을 들었다. 종이 위의 글씨들이 흔들렸다. 손이 떨렸기 때문이었다.

기록들은 모두 도환의 죄를 정당화했다. 무림맹의 비리를 나열했다. 그리고 도환의 검이 그것들을 척결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도환은 알았다. 이것들은 거짓이었다.

첫 번째 기록에서 도환의 눈이 멈췄다. 무림맹 내부 비리 적발 명단. 그 목록에는 명진의 아버지 이름이 없었다. 도환이 명진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기록도 없었다. 하지만 명진은 분명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다음 기록은 무림맹 괴멸 당시 사건 경위서였다. 날짜를 보자 도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록된 날짜와 도환이 기억하는 날짜가 맞지 않았다. 3일이 차이났다.

그 3일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가?

도환은 기억할 수 없었다. 뇌 속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감각. 마치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명진의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려 했으나 윤곽이 흐려졌다.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떠올려도 그 얼굴은 안개 속에 잠겼다. 형의 이름을 입술에 올리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혀가 굳었다. 마치 누군가 그 이름을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내고 있는 것처럼.

"당신의 검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적월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당신의 검은 지금 강호의 질서를 지키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검 한 자루가 있다면 강호는 다시 통일될 수 있습니다."

도환이 손을 들었다. 적월의 손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적월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도환이 천혼검법을 사용하려던 순간, 적월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붉은 빛이 도환의 검을 막았다. 적월신공(赤月神功)이었다. 도환의 검이 한 치 앞에서 멈춰 섰다.

"스승님."

적월이 말했다. 그 호칭에는 존경이 아니라 조종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검은 이제 강호의 질서를 지키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진실 따위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정의(正義)로요."

도환의 검이 울음을 냈다. 하지만 멈춰 있었다.

"진실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명예를 원하시나요?"

적월의 질문이 들렸다. 도환은 입을 열었다. 목이 움직였다. 하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실을 택하면 강호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명예를 택하면 자신은 도구가 될 것이었다. 도환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검의 손잡이를 쥔 손이 풀렸다 다시 쥐어졌다. 그 반복 속에서 그는 선택을 거부했다.

현목이 도환의 팔을 잡았다. 눈빛이 간절했다.

"스승님, 물러나십시오."

백운이 검을 들었다. 어린 검술이지만, 의지는 확실했다.

적월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호를 위해 당신의 검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모두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도환이 천천히 물러섰다. 검을 거두었다. 적월의 얼굴에 승리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도환의 눈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밤이 내려왔다.

도환이 객사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검었다. 별들이 떨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손처럼.

그 순간, 한 점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적월교의 탑 위에서 내려오는 검은 실루엣. 그것은 매처럼 내려왔다. 침묵하며. 목표를 정하고.

도환은 직감했다. 그것이 누구인지. 귀영(鬼影). 강호에서 가장 신비로운 살수. 그리고 20년 전 자신의 검을 조종한 자.

"도환!"

명진의 목소리가 밤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

명진이 나타났다. 검은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뒤따르는 것은 적월교의 암살자들이었다. 도환의 뒤에서 현목과 백운이 검을 들었다.

적월의 목소리가 객사에서 들렸다.

"도환 선생님, 이건 우리의 실수입니다. 귀검단의 암살자들이 침입했군요."

거짓이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거짓이었다.

도환이 검을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제는 떨 이유가 없었다. 진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강호는... 이미 죽어 있었구나."

중얼거림이 밤하늘에 흩어졌다.

도환의 검이 공중에서 호를 그렸다. 붉은 기운이 검 위를 흘렀다. 천혼검법. 20년 만에 다시 강호에 울려 퍼지는 그 이름.

"스승님!"

현목이 외쳤다. 하지만 도환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검은 그림자를 좇아 밤하늘을 박찬다. 귀영이 내려오는 궤적을 따라.

명진이 도환의 옆에 섰다. 한혼검이 울음을 냈다. 20년을 갈아온 복수심의 칼이. 도환과 명진, 두 검객이 적월교의 암살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첫 번째 암살자가 쓰러졌다. 도환의 검이 아니라 명진의 검에 의해.

"내 가족을 죽인 죄인이라도, 지금은 함께 싸워야 할 자다."

명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도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진의 그 말이 자신을 깨웠다. 죄인이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도환의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죄책감이 아니라 다른 감정. 누군가에게 용서받은 것 같으면서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그런 감정.

적월교의 암살자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하지만 귀영은 여전히 내려오고 있었다. 매처럼, 정확하게, 피하는 길을 계산하듯이.

그것이 귀영의 방식이었다. 정면 대결이 아니라 기다림. 상대의 피로를 계산하고, 그 순간을 노린다. 도환이 천혼검법을 사용할 때마다 기억이 산산조각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목!"

도환이 외쳤다.

"객사로 돌아가 백운을 지켜라. 적월은 아직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스승님, 함께—"

"가!"

현목이 물러섰다. 그 눈에는 죄책감과 두려움이 함께 떠 있었다. 20년 전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감정들.

도환과 명진이 밤길을 달렸다. 적월교의 탑 방향으로. 그들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울었다.

귀영이 마침내 지면에 닿았다. 검은 옷, 검은 얼굴. 정체불명이라는 것이 그의 정체였다.

"도환."

귀영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 같았다. 없는 것 같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20년 만의 재회군요."

"너는 누구인가?"

도환이 물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천혼검법으로 상대의 업을 읽을 수 있는 자라면, 이미 그것이 누구인지 보이고 있었다.

"나는 강호의 그림자입니다. 당신의 검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는."

귀영이 비수를 들었다. 검은 날개 같은 그것이. 귀검술의 진정한 형태.

"20년 전, 당신의 손으로 죽인 자들은 모두 내가 선택한 자들이었습니다. 당신은 도구였고, 나는 장인이었어요."

명진이 한혼검을 들었다. 그 검에는 20년의 복수심이 담겨 있었다.

"내 가족도... 당신이 죽인 것인가?"

명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검은 떨리지 않았다.

"당신의 가족은 그저 도구에 필요한 무게였을 뿐입니다."

귀영이 대답했다. 그 말 속에는 동정도 죄책감도 없었다.

"당신의 검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이었어요."

도환이 검을 들었다. 천혼검법을 사용하려던 순간,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검이 떨어질 뻔했다. 뇌 속에서 뭔가 터지는 듯한 통증. 기억들이 한꺼번에 흩어지고 있었다.

귀영의 얼굴이 흔들렸다. 명진의 형처럼 보였다. 아니다. 명진의 형이 맞다. 그 이름은... 뭐였지?

도환의 눈이 흐려졌다.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변했다. 귀영의 얼굴 위에 또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젊은 얼굴. 웃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입술을 움직여 그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혀가 굳었다.

"스승님!"

명진이 외쳤다.

"당신의 검을 내려놓지 마세요!"

명진이 도환의 앞으로 나섰다. 한혼검이 귀영의 비수를 막았다. 명진의 검질은 거칠었다. 20년의 복수심이 담긴 움직임이었다.

도환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천혼검법을 사용할 때마다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20년 전의 기억들이 먼저 사라졌고, 이제는 최근의 기억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명진이 누구인가? 명진의 형의 이름이 무엇인가? 자신은 왜 이 검을 들고 있는가?

그 순간, 적월교의 탑에서 붉은 불빛이 솟아올랐다.

적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환! 강호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 말과 함께, 천검문의 방향에서 검은 기운이 하늘을 가르며 올라왔다. 현목의 천검십삼식. 그리고 그 뒤에는 수십 개의 검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강호의 모든 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목의 검은 귀영을 향하지 않았다. 도환을 향하고 있었다. 스승을 지키려는 검이면서도, 동시에 적월의 명령을 따르려는 검. 그 검 위에는 갈등이 선명했다.

"스승님을 지켜야 하나, 아니면 강호의 질서를 따라야 하나?"

현목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검만 울었다.

도환이 천혼검법을 다시 사용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시야가 더욱 흐려졌다. 귀영의 얼굴이 명진의 형의 얼굴로 완전히 겹쳐졌다.

"당신이... 명진의 형이군요."

도환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명진이 도환을 바라봤다. 명진의 눈에 무언가가 스쳤다. 깨달음. 분노. 그리고 슬픔.

"형?"

명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귀영—아니, 명진의 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20년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의 검이 나를 인정할 때까지."

"당신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명진이 한혼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 검은 귀영을 향하지 않았다. 자신의 형을 향했다.

"당신이 도환을 조종했다는 것을?"

"조종이 아닙니다."

귀영이 비수를 거두었다.

"당신의 가족을 죽인 것도, 강호를 흔든 것도, 모두 도환의 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검만이 강호를 바꿀 수 있으니까요."

명진이 한 발 물러섰다. 그 얼굴에는 20년간 쌓인 복수의 대상이 사라진 허전함이 드러났다.

"그럼... 내 가족은?"

"도구였습니다."

귀영이 대답했다.

"당신의 형도, 당신의 부모도. 모두 도환의 검을 깨우기 위한 도구였어요."

명진이 검을 떨어뜨렸다. 한혼검이 땅에 떨어졌다.

도환이 천혼검법을 완성했다. 손가락이 더 이상 경련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검을 들고 있는지, 모두가 안개 속에 잠겼다.

하지만 검은 여전히 울었다.

도환의 검이 귀영을 향해 날아갔다. 명진의 형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비수를 들어 맞받았다.

두 검객의 움직임이 교차했다. 도환의 검질은 더 이상 도구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것이었다.

귀영이 물러섰다. 처음으로 그림자가 형태를 드러냈다.

"이제 끝이군요."

귀영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당신의 검이 만들 끝이."

도환의 검이 귀영의 가슴을 관통했다. 명진의 형이 무릎을 꿇었다.

"형!"

명진이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미 20년 전의 것이었다. 죽은 자를 부르는 목소리.

귀영이 도환을 바라봤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적월교의 탑에서 적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환! 강호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도환은 더 이상 그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밤하늘 어딘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서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도환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누구의 죄를 말하는 것인가.

그 순간, 도환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것은 서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도환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도환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진이 도환을 바라봤다.

"당신이... 이 말을 한 사람입니까?"

도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하늘이 더욱 검어졌다. 별들이 하나둘 꺼져갔다. 마치 누군가 강호의 모든 빛을 끄고 있는 것처럼.

도환의 검이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구를 베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귀영은 이미 죽었고, 적월은 여전히 탑 위에 있었고, 명진은 자신의 형의 시체를 안고 있었다.

현목의 천검십삼식이 하늘을 가르며 내려왔다. 스승을 지키려는 검이면서도, 동시에 강호의 질서를 따르려는 검.

도환은 그 검을 피하지 않았다. 받아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검만은 여전히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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