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술의 진실
신경통이 밀려올 때 이준호는 언제나 같은 것을 본다.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들. 이번엔 달랐다.
술집이었다. 강남역 인근 술집의 어두운 테이블. 정현택이 앉아 있었는데, 그의 얼굴이 지금의 정현택과 다르다. 더 차갑다. 더 위험하다. 기억 속의 정현택은 이준호를 향해 웃고 있다. 이빨을 드러낸 웃음.
"박민지는 아직 살아있어요."
기억 속 정현택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낮다. 협박처럼 들린다.
"당신이 죽이지 못한 여자가 계속 살아서, 계속 말하고 있어요. 경찰청에 대해. 당신에 대해."
이준호는 기억 속에서 무언가 마시고 있다. 위스키인 듯하다. 손이 떨린다. 현재의 이준호가 느낀 것처럼, 기억 속의 이준호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불렀거든요. 당신이 제대로 마무리하도록."
정현택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린다. 칼이 나타난다. 짧은 칼. 그것을 이준호에게 밀어준다.
"이번엔 제대로 끝내세요."
신경통이 폭발했다. 이준호는 유치장의 침대에서 몸을 굴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일곱 시간? 아니, 여덟 시간인가. 신경통 주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이전엔 48시간이었는데.
의사들이 와서 약을 주입했다.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이준호는 그저 버티며 기억을 기록했다. 손가락으로 침대 위에 글자를 썼다. 누가 봐도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사라진다. 새로운 기억이 오면 이전 기억이 희미해진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당신이 제대로 끝내세요."
정현택의 말이 계속 울린다.
밤 11시쯤 서준영이 나타났다. 병원 의사 서준영. 유치장 담당 경찰은 서준영이 '형사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고 했을 때 아무 의심 없이 이준호를 혼자 두었다. 의료진이니까. 경찰청 산하 의료진이니까.
서준영은 문을 닫고 이준호를 봤다. 그의 눈이 흔들린다.
"당신을 데려가야 해요."
"어디로."
이준호가 물었다. 목이 쉬었다. 신경통으로 지난 8시간을 어떻게 견딘 건지 모르겠다.
"안전한 곳으로."
서준영이 손을 내민다. 이준호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신이 나한테 뭔가 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서준영이 멈췄다. 손이 공중에서 흔들린다. 그러다 내려왔다.
"맞아요."
의사는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말을 시작했다.
"당신의 뇌 손상은 자연적이 아니었어요. 교통사고로 인한 손상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요."
이준호의 호흡이 천천해진다.
"우리가 했어요. 경찰청 의료팀. 당신이 의식을 회복했을 때, 당신의 뇌에 특수 시술을 했어요."
"뭘 했는데."
"당신이 억압한 기억들을 활성화시켰어요. 의도적으로 잊으려던 것들을."
서준영이 눈을 마주친다. 그의 눈이 진지하다. 무섭다.
"당신은 10년 이상 지하 3층에서 일했어요. 고문실에서. 당신이 고문한 사람들, 당신이 죽인 사람들. 그 기록들이 모두 당신의 뇌에 있어요. 경찰청은 당신을 없애고 싶었어요."
"왜."
"당신이 말하게 되기 전에. 당신이 증거가 되기 전에."
서준영이 더 가까워진다.
"시술의 목적은 당신을 자살로 몰아가는 거였어요. 당신이 자신이 한 일들을 깨닫게 하고, 그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끝내도록. 그럼 모든 게 깔끔해져요. 자살한 형사. 기억상실로 인한 정신 불안정. 그리고 그의 모든 기록은 없는 것이 되어요."
이준호가 일어난다.
"근데 당신이 말하는 건 전부 거짓일 수도 있다는 뜻이네."
"네."
"내가 고문하지 않았을 수도, 박민지를 죽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네."
"혹은 모두 사실일 수도 있고."
서준영이 일어선다. 그리고 이준호의 얼굴에 가까워진다.
"여기가 핵심이에요. 당신의 기억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아무도 모르게 설계됐어요. 당신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경찰청도 모르게. 왜냐하면 당신이 이미 저지른 범행과 우리가 활성화한 기억의 경계가 없으니까요."
의사가 침대에 다시 앉는다.
"당신은 고문실에서 일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당신은 명령을 받았어요. 그것도 사실이에요. 당신이 고문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박민지를 죽였는가? 당신이 협박을 했는가? 그건 우리가 활성화한 기억일 수도 있고, 원래 있던 기억일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알아?"
"못 알아요."
서준영이 이준호를 본다.
"당신의 뇌에서 활성화된 기억과 자연 기억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신경 수준에서 똑같이 작동하거든요. 그래서 당신은 영원히 의심 속에서 살아야 해요. 당신이 정말 누구인지 모르면서."
이준호가 의사의 목을 움켜쥔다. 서준영이 숨을 못 쉰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는다. 의사는 그저 이준호를 본다.
"난 알아. 당신이 지금 뭘 생각하는지."
서준영이 갈식거리며 말한다.
"날 죽이면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걸. 하지만 날 놔두면 경찰청이 우리 둘 다 죽여요. 나도 죽게 되니까, 당신을 도와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생각하실 거고요."
이준호가 손을 놓는다. 의사가 공기를 들이마신다.
"근데 난 왔어요. 당신에게. 왜냐하면..."
서준영이 숨을 고르며 계속한다.
"당신이 시술을 반대했던 내 판단을 짓밟았거든요. 내가 의료 기록을 남긴 죄도 있지만, 그것보다... 당신은 내 양심이 맞았다는 증거예요. 나는 그걸 외면할 수 없어요."
의사의 목소리가 떨린다.
"당신은 이미 우리를 이겼어요. 당신이 기억을 기록하고 있었으니까요."
"뭐?"
"당신은 정현택한테도 보여줬어요. 당신의 모든 기억을. 그리고 정현택은 그걸 가지고 검찰에 제출했어요. 당신이 고문한 사람들의 기록. 당신이 명령받은 일들의 기록. 경찰청의 비리가 드러나고 있어요."
서준영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제 경찰청은 당신을 빨리 없애야 해요. 당신이 더 말하기 전에. 그리고 나도 당신의 의료 기록을 남긴 죄로 죽어야 해요. 우리는 둘 다 죽어요."
이준호가 의사의 팔을 잡는다.
"그럼 왜 도와주는 거야?"
"당신의 기억들은 계속 남아있을 거예요. 검찰에. 미디어에. 영원히.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서준영이 이준호를 본다. 그 눈빛이 결연하다.
"당신을 빼내가야 해요. 여기서. 그리고 당신은 정현택을 만나서, 마지막 기억을 기록해야 해요."
"마지막 기억?"
"여덟 번째 기억이 올 거예요. 곧. 당신이 우리의 시술을 받는 장면. 그것까지 기록하면, 모든 게 증명돼요. 경찰청의 의료진이 당신의 뇌를 조작했다는 게."
이준호가 의사를 본다. 서준영의 눈이 진지하다. 두렵다. 죽음 직전의 두려움.
"당신이 정말 날 믿을 거야?"
"다른 선택이 없어."
서준영이 문을 연다. 복도는 비어 있다. 늦은 밤, 경찰청 유치장은 거의 무인지경이다. 의사는 이준호를 복도로 이끈다. 계단. 비상구. 지하 주차장.
차에 탈 때 이준호는 뒤돌아본다. 경찰청 건물. 30년을 일한 곳. 자신이 뭘 했는지 모르는 곳.
"정현택은 어디 있어?"
"강남역 주차장. 당신의 기억 속 장소예요. 그곳에서 당신은 자신의 진실을 마주해야 해요."
강남역 주차장은 밤 1시쯤 거의 텅 비어 있다. CCTV 사각지대. 그곳에 정현택이 서 있다. 이준호를 보는 정현택의 얼굴이 기억 속의 얼굴과 다르다. 더 인간적이다. 더 절박하다.
"기억을 다 기록했어?"
정현택이 물었다.
"일곱 개."
"여덟 번째가 올 거야. 곧. 그때 당신은 진실을 알게 돼."
"무슨 진실?"
정현택이 다가온다. 그의 얼굴이 흔들린다. 무언가 결정하려는 듯하다.
"당신의 기억이 진짜든 거짓이든, 당신은 여전히 범인이에요. 형사."
이준호가 물러선다.
"뭐라고?"
"당신이 고문했어요. 그건 진짜예요. 당신이 협박했어요. 그것도 진짜예요. 우리가 기억을 활성화했다고 해도, 당신이 원래 한 일들은 없어지지 않아요. 당신은 여전히 범인이에요."
정현택이 한 발 더 가까워진다. 이준호는 더 물러난다.
"그럼 박민지는?"
"아직 살아있어요."
정현택이 말을 멈춘다. 뭔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그의 침묵이 무겁다.
신경통이 밀려온다. 이준호는 무릎을 꿇는다. 머리가 깨진다.
여덟 번째 기억이다.
의료 시설. 그것도 낡은 의료 시설. 병원이 아니다. 경찰청 지하 어딘가. 이준호는 침대에 누워 있다. 머리에 뭔가 씌워져 있다. 뇌 스캔 기기. 주변에 의료진들이 서 있다. 서준영도 있다. 더 젊은 서준영.
"억압된 기억을 활성화하는 거예요."
의료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입이 아니라. 당신이 이미 경험한 일들. 당신이 의도적으로 잊은 일들. 그걸 다시 깨워주는 거예요."
기억 속의 서준영이 말한다.
"당신은 고문실에서 일했어요. 당신은 그걸 알아요. 당신은 명령을 받았어요. 그것도 알아요. 당신은 사람을 때렸어요. 그것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우리가 깨워주는 거예요. 당신의 양심을. 당신의 죄를."
기억 속의 이준호가 말한다.
"박민지는?"
기억 속의 서준영이 잠시 멈춘다. 뭔가 말을 고르는 듯하다.
"당신이 죽이려고 했던 여자예요."
뇌 스캔 기계가 윙윙거린다.
"당신은 여덟 개의 기억을 받을 거예요. 여덟 번째까지 오면, 당신은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알게 돼요. 그리고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해요. 자살하거나, 자수하거나."
현재의 이준호는 주차장 바닥에 누워 있다. 신경통이 사라진다. 정현택이 위에서 내려다본다.
"당신이 자살하길 바랐어요. 경찰청은. 그럼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되니까. 하지만 당신은 죽지 않았어요. 당신은 기억을 기록했어요. 당신은 정현택을 찾았어요. 당신은 살기를 택했어요."
이준호가 일어난다. 정현택을 본다.
"그럼 박민지는? 죽은 건가?"
정현택이 입을 다물었다가 연다. 그의 목소리가 낮다.
"당신이 죽이려고 했던 여자는 이미 당신 손에 죽었어요. 기억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이준호가 뒤로 물러난다. 정현택의 말이 계속된다.
"당신의 기억이 진짜라면, 그녀는 죽었어요. 당신의 기억이 거짓이라면, 그녀는 살았어요. 하지만 둘 다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정현택이 이준호를 본다. 그의 눈이 차갑다. 다시 기억 속의 정현택이 되었다.
"당신이 그녀를 찾으면, 그건 당신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죽은 사람을 찾을 수는 없거든."
이준호가 한 발 더 물러선다.
"경찰청은 지금 당신을 찾고 있어요. 서준영도 찾고 있어요."
정현택이 숨을 쉰다. 마치 죄책감에 짓눌린 듯.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 한 말은... 내가 당신을 팔았다는 뜻이에요."
"왜?"
정현택이 눈을 감는다. 잠시 침묵한 후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당신의 기억이 검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니까. 당신이 박민지를 찾으면, 당신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는 증거가 되거든요. 경찰청에서 나한테 압박이 왔어요. 당신의 가족에 대한 협박도 있었고. 나는..."
정현택이 눈을 뜬다. 그 안에 비통함이 가득하다.
"내 가족을 선택했어요. 당신 대신에."
이준호가 정현택의 목을 움켜쥔다. 하지만 정현택은 저항하지 않는다.
"당신의 기억이 진짜라면, 당신은 이미 사람을 죽여봤어요. 그래서 날 죽일 거겠지. 하지만 당신의 기억이 거짓이라면?"
정현택이 웃는다. 이를 드러낸 웃음.
"그럼 당신은 누구야?"
이준호가 손을 놓는다. 정현택이 넘어진다.
사이렌이 들린다. 경찰차 사이렌. 주차장 입구에서 경찰차들이 들어온다. 정현택은 바닥에서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준호는 달린다. 주차장 깊숙한 곳. 비상구. 계단을 올라간다. 지상. 강남역 앞 거리. 밤 3시. 거리는 비어 있다.
전화가 울린다. 수진이다.
"당신 어디 있어?"
음성이 떨린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하다.
"집에 와. 제발. 지금 당장."
배경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 경찰 무전기인 것 같다.
"서준영이... 서준영이 죽었어. 여기서."
수진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하다.
"제발, 집에 와."
이준호는 전화를 끊는다. 집에 가면 경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경찰청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면, 집도 감시 중일 것이다. 그리고 서준영이 죽었다. 경찰청의 보복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 현장의 상황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수진이 거기 있다. 그리고 그녀도 용의자일 수 있다. 경찰 입장에서 보면.
이준호는 택시를 탄다. 도곡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