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후 3시 47분. 침대 옆 모니터가 맥박을 기록했다. 이준호의 손가락에서 전극 패드가 떨어져 나갔다. 신경통은 진정했지만 몸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의사 서준영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이준호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이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서준영의 질문에 이준호는 손가락을 굽혔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전부다. 선명하다."

"기록해두셨습니까?"

이준호는 침대 옆 노트북을 가리켰다. 여섯 번째 기억을 텍스트로 옮기는 일은 끝났다. 손가락으로 입력한 글자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는 읽지 않았다. 읽으면 그것이 더 현실이 될까봐.

서준영이 뇌 스캔 이미지를 들고 다가섰다. 흰색과 검은색의 뇌 단면도. 측두엽과 해마 부위가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재생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48시간이 36시간으로, 이제 24시간으로 축소되었어요."

서준영이 이미지를 가리켰다.

"동시에 신경 재생 영역이 확대되고 있어요.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한 패턴입니다."

이준호가 이미지에서 눈을 돌렸다.

"누군가 약을 썼다고 했잖아."

"네. 엄지손가락의 주사 자국으로 볼 때, 신경 성장 인자를 지속적으로 투여받으신 것 같습니다. 뇌 손상 직후부터요. 하지만 이 약물은 민간에서 구할 수 없어요. 의료기관이나 연구기관에서만 사용하는..."

서준영의 목소리가 끝나지 않았다. 이준호가 침대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결정적이었다. 그는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의료용 슬리퍼가 바닥을 스쳤다.

"누가 왔나?"

"누가요?"

"방문객. 어제 이후로."

서준영이 기록을 확인했다. 아내 수진. 형사 정현택. 그게 전부였다.

"정현택을 불러."

---

정현택이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반이었다. 그는 이준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았고,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기억이 돌아왔나?"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여섯 번째 기억의 기록이 떠 있었다.

정현택이 읽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지하 3층."

"고문실이 아니었다."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정확했다.

"고문 도구를 설치하는 장면이다. 내가. 2년 전. 드릴을 들고 벽에 구멍을 뚫고 있다. 손잡이가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 금속이다. 누군가 손목을 잡으면 이 손잡이에 매달린다. 그리고..."

이준호가 멈췄다.

"그리고?"

"이수영이 옆에 있다. 내가 손을 떨 때 그가 말한다. '이건 국방을 위한 거야. 불순한 세력들을 막기 위한 거다. 자네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나중엔 안다. 국가의 안보는 개인의 도덕으로 운영되지 않아.' 내 손이 드릴을 내려놓는다. 그 순간 드릴의 회전 속도가 변한다. 느려진다. 아니, 내가 느려지는 거다. 마치 내 손이...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손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정현택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신은 피해자입니다."

이준호가 정현택을 봤다.

"나는 범인이다."

"당신은 둘 다입니다."

정현택이 이준호 앞에 앉았다. 거리를 좁혔다.

"당신은 경찰청의 도구였어요. 10년 이상. 당신이 저지른 모든 행동은 지시였어요. 고문, 증거 조작, 그리고 살인. 특히 박민지. 그 사건은 당신이 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 시킨 거예요. 용의자가 아니라 실행자로."

이준호의 얼굴 근육이 떨렸다. 아래턱이 움찔했다.

"내가 칼을 들었다."

"지시를 받아서."

"내 손이 움직였다."

"명령에 따라서."

"내가 죽였다."

정현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이 선택을 강요받았어요. 박민지를 죽이거나, 자신이 죽거나. 둘 중 하나. 그리고 당신은... 자신을 택했어요. 아니, 당신은 선택지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도구였으니까."

이준호가 일어났다. 침대 가장자리에서 벗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블라인드 사이로 강남역 일대가 보였다. 낮의 햇빛이 차 지붕을 반사했다.

"박민지는?"

"5년 전 사라졌어요. 경찰청 비리를 목격했거든요. 당신이 조작한 증거, 당신이 행한 고문들. 그녀가 신고를 준비했을 때 경찰청은 그녀를 없애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보냈어요."

이준호의 손이 블라인드를 집었다. 플라스틱 봉이 끼걱거렸다.

"내 아내는?"

"당신의 아내는 박민지의 친구였어요. 박민지가 신고할 생각을 했을 때, 당신의 아내는 침묵했어요. 그리고 5년을 그 침묵 속에서 살았어요. 지난 3개월 동안 박민지의 시체가 발견되고 나서도."

이준호가 돌아섰다. 정현택을 마주봤다.

"그럼 내가 살인한 건 맞는 거다."

"당신이 선택한 것도, 지시받은 것도 맞아요."

정현택이 천천히 말했다.

"그게 법의 관점에서는 모순처럼 보이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둘 다 참이에요. 당신이 손을 들었고, 당신이 칼을 들었고, 당신이 죽였어요. 동시에 경찰청이 당신을 강요했고, 당신은 거부할 수 없었고,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했어요."

이준호가 침대로 돌아갔다. 노트북을 켰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파일을 열었다. 다섯 번째 기억의 기록. 술집의 남자. 협박. 칼. 그리고 그 남자의 얼굴이 박민지의 아버지였다는 수진의 말.

"내가 그 남자를 협박한 이유는?"

"알 수 없어요. 기억이 끝났으니까."

"기억 속에 이유가 없나?"

정현택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준호의 기록에는 감정이 없었다. 행동만 있었다. 칼을 들었다. 협박했다. 뇌물을 요구했다.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당신은 피해자였어요."

정현택이 다시 말했다.

"경찰청에 의해 도구로 만들어진. 하지만 당신도 그들의 일원이었어요. 명령을 받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명령을 내리는 위치도 있었어요."

이준호가 노트북을 닫았다.

"여섯 번째 기억을 받기 전에 누군가 날 찾아왔나?"

정현택이 침묵했다.

"내 아내 말고."

"아뇨."

"거짓이다."

이준호의 눈이 정현택의 얼굴을 스캔했다. 형사의 직감. 정현택의 호흡이 바뀌었다. 입술이 움직였다가 멈췄다.

"누가?"

"이수영의 사람들이에요. 어제 밤 10시쯤."

"뭘 하려고?"

정현택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했다.

---

오후 5시 23분. 이준호의 손이 자신의 기억 기록을 정렬했다. 스프레드시트 형식이었다.

**첫 번째 기억 (사고 3일 후)**: 고문실. 용의자 김태희. 폭행. 목표: 자백 추출.

**두 번째 기억 (사고 6일 후)**: 주차장. 박민지. 살인. 목표: 증인 제거.

**세 번째 기억 (사고 9일 후)**: 지하실. 누군가. 자위 방어. 목표: 생존.

**네 번째 기억 (사고 12일 후)**: 형사실. 이수영. 지시. 목표: 추가 살인 명령.

**다섯 번째 기억 (사고 15일 후)**: 술집. 박민지의 아버지. 협박. 목표: 입막음.

**여섯 번째 기억 (사고 18일 후)**: 고문실. 이수영. 장비 설치. 목표: 조직 운영.

열 여섯 개의 행으로 정렬된 데이터. 각 행에는 날짜, 장소, 인물, 행동, 목표가 있었다.

이준호가 마지막 열에 입력했다.

**연결성**: 모두 경찰청의 지시. 모두 비리 은폐. 모두 당신의 선택. 모두 당신의 손. 모두 당신의 죄.

그가 엔터를 눌렀다. 행이 저장되었다.

정현택이 옆에서 봤다.

"이것들이 증거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의 기억이 경찰청의 조직적 범죄를 증명하는 거죠."

"내가 범인이 되는 거다."

"네. 동시에 경찰청이 범인 조직이 돼요."

이준호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데이터를 응시했다. 자신의 행동들의 목록. 자신의 죄들의 기록. 자신의 손이 만든 증거.

"일곱 번째 기억은?"

"아직 안 왔어요."

"언제 올까?"

"48시간 주기가 24시간으로 줄었어요. 내일이에요."

정현택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경통이 예정보다 일찍 올 수도 있어요. 약물 투여량이 늘었거나 누군가 개입했다면."

이준호가 정현택을 봤다.

"누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집에 가면 위험해요."

이준호가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바닥을 딛고 섰다. 몸이 흔들렸다. 정현택이 팔을 잡았다.

"어디 가세요?"

"집."

"위험해요. 경찰청이..."

"알아."

이준호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환자복을 벗고 자신의 옷을 끌어당겼다. 손이 단추를 채웠다.

"당신의 아내가 떠나기로 했어요."

정현택이 말했다.

"알아."

"그럼?"

이준호가 신발을 신었다.

"내가 돌아가서 확인해야 한다."

"확인해요?"

"그녀가 정말 떠나는 건지. 아니면 기다리는 건지."

---

오후 6시 47분. 도곡동 집의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준호가 문을 열었을 때, 수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짐은 여전히 풀려 있었다. 검은색 여행 가방이 거실 한 켠에 놓여 있었고, 수진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기억이?"

수진이 물었다. 목소리는 평온했다.

"돌아왔다."

"또 누가?"

이준호가 앉지 않았다. 거실의 중앙에 서 있었다.

"경찰청. 내가 어떻게 도구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도구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수진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을 닫았다.

"그럼 이제 뭐할 거야?"

"마지막 기억을 기다린다."

"마지막이?"

"일곱 번째."

수진이 일어났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이준호를 마주봤다.

"그 기억이 무서워?"

"네."

이준호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입술이 떨렸다.

"그 기억 속에서는 누가 죽나?"

"모른다."

"당신이?"

"아니면 나."

수진의 얼굴이 변했다. 눈이 가늘어졌다. 입술이 다물어졌다. 그리고 한 박자 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웃음. 거의 신음에 가까운. 그 웃음 속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인정이 담겨 있었다.

이준호가 수진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녀의 눈동자. 그녀의 미세한 떨림.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움직임. 그녀는 이미 이준호가 무엇인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남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준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이준호의 머리 뒤쪽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신경통이었다. 하지만 보통과는 달랐다. 더 강했다. 더 빨랐다.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이준호가 무릎을 꿇었다. 손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준호!"

수진이 달려왔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녀를 밀어냈다.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이 그녀의 목을 향했다.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그 손은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다. 보호하려고.

일곱 번째 기억이 왔다.

---

**어둠.**

칠흑 같은 어둠. 그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칼을 들고 있다. 그 손은 이준호의 손이다. 그런데 손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손처럼 느껴진다.

"이준호."

목소리다. 남자의 목소리.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수영의 목소리. 하지만 한 명이 아니다. 여러 명의 이수영.

"자네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나중엔 안다."

칼이 아래로 내려온다. 이준호의 가슴을 향해.

그런데 다른 손이 칼을 잡는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이준호의 목소리다. 하지만 그것도 두 개다. 하나는 현재의 목소리. 하나는 과거의 목소리.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칼을 잡은 손이 위로 올라온다. 얼굴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 윤곽이 드러난다.

이준호다.

아니다.

이준호가 아니다.

그건 이수영이다.

아니다.

그건 경찰청이다.

아니다.

그건 자신이다.

칼이 가슴을 뚫고 들어간다.

피가 나온다. 어느 쪽 피인지 알 수 없다.

둘 다 죽는다.

아니다.

둘 다 산다.

아니다.

하나가 죽고 하나가 산다.

그런데 죽은 것과 산 것이 같은 사람이다.

---

이준호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수진이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강하게.

"이준호. 이준호!"

그의 눈이 떨렸다. 초점을 찾지 못했다.

"기억이 왔어. 일곱 번째."

이준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뭐였어?"

"나를 죽이려던 사람."

"누가?"

이준호가 수진의 눈을 봤다. 그녀의 눈이 두렵게 흔들렸다.

"나다. 이수영이 시킨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다른 손이 그걸 막았어. 누구 손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경찰이 들어왔다. 여럿. 무장한.

이수영이 그들 뒤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전과 달랐다. 거기에는 승리의 표정이 없었다. 대신 차가운 결정만 있었다.

"이준호. 당신을 체포한다."

이수영의 목소리가 낮았다.

"혐의는 살인죄, 증인 협박, 조직폭력. 그리고 경찰청 비리 관련자 살해 미수죄. 당신이 들고 있던 칼. 우리가 증거로 가지고 있다."

이준호가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경찰들이 그를 눌렀다.

수진이 비명을 질렀다.

"이준호!"

그 순간, 이준호는 자신이 정말 무엇인지 알았다. 경찰청의 도구. 박민지의 살인자. 그리고 이제 자기 자신의 살인자가 되려던 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 도구이면서 범인. 그 모순이 그를 정의했다.

경찰관들의 손이 그를 끌어냈다.

문이 닫혔다.

수진이 남겨졌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여행 가방은 여전히 풀려 있었다. 그녀가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그 가방은 의미를 잃었다. 하지만 그것이 왜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사랑인가. 공모인가. 아니면 증거 수집인가. 수진은 창밖을 바라봤다. 거리에서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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