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앙ㅡㅡㅡ!
심문실의 무거운 철문이 쇳가루를 사방으로 뿜어내며 찢겨 나갔다. 고막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들이닥친 자욱한 먼지 구덩이 사이로 비현실적으로 번뜩이는 붉은색 검기가 날뛰었다.
“엘리샤!!!”
포효하는 목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과 닮아 있었다. 먼지 장벽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나타난 황태자 카일 폰 로젠베르크의 눈은 이미 정상적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피가 맺힐 듯 핏발이 선 눈동자에는 오직 파괴적인 분노만이 가득했다. 그의 손에 들린 대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마력이 바닥의 대리석을 까맣게 태워 먹고 있었다.
“어떤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 여자에게 손을 대려 한 거지?”
말 한마디에 서린 살기에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던 심문관 발레르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흉포한 그림자 뒤로,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백색의 빛이 스며들었다. 성자 레이나르 엘 필레아스였다. 늘 구원의 미소를 가식적으로 입가에 걸고 다니던 남자의 얼굴에는 이제 가죽가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 내린 무표정.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은빛 단검은 자비가 아닌 무자비한 집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발레르 심문관님. 주님의 자비도 가끔은 길을 잃을 때가 있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죠.”
심문실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두 미친놈이 무기를 쥔 채 당장이라도 발레르의 목을 따버릴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 압도적인 광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정작 그 살기의 중심에 서 있는 나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짚은 내 오른손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금속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 전, 심문실의 모든 통신 결계와 마도 장치를 완벽하게 먹통으로 만들고 이 더러운 뇌물 수수 현장을 아카데미 전체에 생중계할 수 있게 해 준 일등 공신. 수석 집사 벤이 ‘가문의 낡은 금고 열쇠’라며 슬쩍 쥐여 주었던 녹슨 무쇠 열쇠였다.
‘낡은 금고 열쇠는 개뿔.’
이건 황실의 최상위 마도 결계조차 단숨에 무력화하고 강제 우회 통로를 개방하는 규격 외의 마스터키였다. 벤이 대체 어디서 이런 흉악한 물건을 구했는지는 나중에 따지더라도, 덕분에 발레르의 아가리를 열고 뇌물 장부까지 만천하에 까발리는 데 성공했으니 돈 값은 톡톡히 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학우 난동죄’와 ‘품위 유지 의무 불이행’으로 아카데미 이사회의 뒤통수를 갈겨 은퇴 자금이 두둑한 카라칼 영지로 고상하게 추방당하는 것뿐이었는데.
갑자기 문짝을 부수고 난입한 이 두 마리의 미친 광공들이 내 완벽한 은퇴 설계도에 시뻘건 낙서를 휘갈기고 있었다.
“엘리샤! 다친 곳은 없나? 저 더러운 손가락이 네 몸깃 하나라도 건드렸다면, 내 당장 이자의 삼대를 멸하고 아카데미를 피로 씻어내겠다!”
카일이 대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적인 집착 수치는 이미 85%를 넘어 폭주하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저하. 더러운 피가 튀면 엘리샤 님의 고결한 드레스가 더러워집니다. 고통 없이 영혼을 도려내는 것은 제 전문이니, 비켜 서 계시지요.”
레이나르가 기괴할 정도로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내 머릿속에서 ‘정직의 장부’가 요란하게 경고음을 울려댔다. 여기서 저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어머, 저를 구하러 와주셨군요!” 같은 가식적인 헛소리를 뱉는 순간, 내 뇌가 반쪽으로 갈라지는 극심한 편두통과 함께 내 소중한 보유 금화들이 공중으로 증발할 터였다.
내 돈을 지키고, 내 안락한 백수 라이프를 지키기 위해선 오직 단 하나. 날것 그대로의 뼈 때리는 진실만을 배설해야 한다.
“적당히 좀 하세요, 이 무식하고 시끄러운 민폐 덩어리들아!!!”
심문실 벽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카랑카랑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순간, 당장이라도 발레르의 목을 벨 것 같던 카일의 대검이 공중에서 딱 멈췄다. 레이나르의 은빛 단검을 감싸고 있던 성력도 찌르르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두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뻣뻣하게 내 쪽으로 돌아왔다.
“……엘리샤?”
카일이 멍청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드레스 자락에 묻은 돌가루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두 놈을 쏘아보았다.
“누구더러 무사하냐 마냐야? 니들이 문짝을 아주 화끈하게 박살 내고 들어오면서 사방으로 튄 돌가루 때문에 내 한정판 실크 드레스 올이 다 나갔잖아! 이 드레스가 얼마짜리인지 알아? 카라칼 영지에서 일주일 동안 호의호식할 수 있는 거금이라고! 니들이 내 노후 자금 보태줄 거야?”
“그, 그건 내가 당장 상단을 통째로 사서라도……”
“닥쳐! 돈이 문제가 아니야!”
나는 카일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삿대질을 해댔다.
“그리고 너, 성자랍시고 돌아다니는 레이나르! 구원? 정화? 웃기고 있네. 니들이 여기서 저 영감탱이를 칼로 쑤시고 피칠갑을 해놓으면,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 니들 살인 공모자로 엮이잖아!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녀?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살아? 왜 다 차려놓은 밥상에 재를 뿌리다 못해 독극물을 들이붓고 난리야!”
기가 막혀서 숨이 가빠왔다. 하지만 정직의 장부는 멈추지 않았다. 뇌물 수수 현장을 대대적으로 폭로해 내 ‘학우 난동죄’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던 내 원대한 계획이 이 무식한 무력파들 때문에 한순간에 폭력 사태로 변질될 위기였으니까.
“내가 이 부패한 영감탱이의 비리를 아카데미 전체에 생중계해서, 아주 합법적이고 품위 있게 ‘난동죄’를 적용받아 변방 카라칼 영지로 쫓겨나려고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니들이 다 망쳤어! 구조하러 왔다면서 내 계획만 처말아먹는 민폐 덩어리 시끄러운 개새끼들아! 얌전히 짖지도 못해? 왜 주인이 밥상 차려놓으니까 밥그릇을 엎어버려!”
내 입에서 쏟아지는 거침없는 폭언과 독설에 심문실 안은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보통의 영애라면 황태자와 성자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기절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품에 안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면전에 대고 ‘시끄러운 개새끼들’이라는 상스러운 비속어를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때려 박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발레르 심문관은 이제 공포가 아니라 황당함과 경악으로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와 성자에게 저딴 욕설을 퍼붓는 영애가 존재하다니, 이건 반역죄로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욕을 처먹은 당사자들의 반응은 내 예상을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려버렸다.
“아……”
카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는 이제 기묘한 황홀경과 자책으로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대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랬군…… 네 깊은 뜻을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엘리샤.”
“네?”
내가 멍청하게 반문하자, 카일이 가슴을 쥐어짜듯 애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단순히 네 개인의 억울함을 풀려는 것이 아니었어. 이 썩어빠진 아카데미의 사법 체계와 위선을 스스로의 몸을 던져 폭로하고, 제국의 공정함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었군. 그런데 내가 경솔하게 무력을 써서 네 숭고한 정화 계획을 망치고, 네 고결한 명예에 흠집을 낼 뻔했어.”
그는 정말로 괴롭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어리석었다. 네 말대로 나는 네 발밑에서 얌전히 짖지도 못하는 멍청한 사냥개에 불과했군. 나를 지책해 주어서 고맙다, 엘리샤. 네 날카로운 회초리가 아니었다면 내 오만함이 또다시 너를 가둘 뻔했어.”
‘아니, 저기요? 황태자 전하? 뇌 필터링에 심각한 오류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내가 경악하는 사이, 옆에 있던 레이나르가 스르륵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서 단검이 힘없이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 쨍그랑 소리를 냈다.
“오 주여…… 제가 또다시 폭력이라는 얄팍한 수단으로 당신의 깊은 자비를 가릴 뻔했군요.”
레이나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마치 성화 속의 성녀를 바라보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광적인 숭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카라칼이라는 척박한 변방으로 유배 보내면서까지 제국의 위선을 정화하려 하시다니. 당신의 그 희생정신과 가식 없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내 지저분한 소유욕으로 당신의 발목을 잡으려 했습니다. 얌전히 짖으라는 당신의 훈계는, 제 귀먹은 영혼을 깨우는 구원의 종소리와 같습니다.”
“……예?”
“앞으로는 짖으라 하실 때만 짖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위선자로 되돌아가지 않게 가르쳐 주십시오.”
두 공작과 마도 명가의 후계자이자 제국의 기둥들이, 심문실 바닥에서 나란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성취 포인트 15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남주들의 집착도가 폭주하여 ‘구원의 종속’ 상태가 고착되었습니다.] [자산 방어 성공: 보유 금화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시스템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게 아니다. 내가 원한 그림은 이게 전혀 아니었다. 나는 저들에게 미움을 사서 “네 이년! 네페르티 가문의 수치로다! 당장 서부 카라칼 영지로 유배를 명한다!”라는 판결을 받아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 미친 광공들이 제 발로 내 대형견을 자처하며 쩔쩔매고 있는 거냔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니들 다 꺼지라고.”
내가 지치고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드레스에 먼지가 더 묻기 전에 이곳을 정리하겠다.”
카일이 벌떡 일어나며 바닥에 엎드려 바르르 떨고 있는 발레르 심문관의 뒷덜미를 짐짝처럼 움켜쥐었다.
“이 부패한 버러지는 황실 직속 감찰관에게 직접 인계하겠다. 네가 시작한 이 정의로운 폭로의 마무리를 내가 더럽히지 않도록, 법의 이름으로 가장 처참하게 찢어발겨 주지.”
“저하, 법의 심판 이전에 종교무관들의 이단 심문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 자의 더러운 영혼을 아주 잘게 쪼개어 정화해 드려야지요.”
레이나르가 가련하게 웃으며 발레르의 다리를 붙잡았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엘리샤 영애! 제발 저들을 말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발레르가 내 쪽을 향해 피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었지만,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 알 바인가요? 뇌물 받아 처먹을 때 그 정도 각오는 하셨어야죠. 그리고 내 드레스 수선비는 니들이 아니라 저 영감탱이 전 재산 압류해서 청구할 거니까 그리 아세요.”
내 가차 없는 팩트 폭행에 카일과 레이나르는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눈을 빛냈다.
“역시 공정하시군. 이 자의 전 재산을 몰수하여 네가 머물 카라칼 영지의 정착 자금으로 송금하도록 조치하겠다.”
카일의 말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 그건 아주 훌륭한 생각인데?’
그렇게 두 남주가 발레르를 질질 끌고 심문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부서진 철문 밖 복도에는 이미 아카데미의 수많은 원생들과 기사단원들이 몰려들어 숨을 죽인 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악과 경외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난폭하고 오만한 황태자 카일과, 누구에게도 속내를 보이지 않던 성자 레이나르가 단 한 명의 영애 앞에서 사냥개처럼 쩔쩔매며 훈계를 듣는 기이한 역설적 권력 구도.
“들었어? 엘리샤 영애가 황태자 전하더러 ‘시끄러운 개새끼’라고 하셨어……”
“그런데 전하는 화를 내기는커녕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셨다고…… 오, 주여. 대체 엘리샤 폰 네페르티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몸을 던져 아카데미의 썩은 비리를 폭로하려 하시다니. 우리는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어. 그녀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고결한 영애다!”
소근거리는 원생들의 착각 필터가 아주 예술적으로 작동하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아니야, 이 멍청이들아. 나 그냥 갓수가 되고 싶은 속물 이기주의자라고……’
그때, 소란스러운 군중 사이를 헤치고 익숙한 인영이 내게 다가왔다.
단정한 턱시도 차림에 안경을 치켜올리며 소리 없이 미소 짓는 남자. 네페르티 가문의 수석 집사, 벤이었다. 그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녹슨 무쇠 열쇠를 힐끗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무사히 위기를 넘기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보유 자산 역시 아주 훌륭하게 방어하셨군요.”
“벤, 네가 준 이 열쇠 말인데……”
“가문의 낡은 금고 열쇠가 맞습니다, 아가씨. 다만 그 금고가 황실의 마도 핵과 우연히 연결되어 있었을 뿐이지요.”
벤이 뻔뻔하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속삭였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일전에 수석 기사단 연무장에서 수거해 두었던 마검의 파편 역시 안전한 금고에 보관 중입니다. 조만간 아주 유용하게 쓰일 곳이 있을 듯합니다.”
나는 벤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5화에서 카일이 훈련 중 부러뜨렸던 그 마검의 파편. 당시에는 그냥 고철값이라도 벌어보려고 벤에게 처분하라고 던져둔 것이었는데, 벤의 눈빛을 보니 단순한 고철 이상의 쓰임새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저 멀리, 멀어지는 카일과 레이나르의 뒷모습을 보며 군중 틈바구니에서 피눈물을 흘리듯 입술을 깨물고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마리안 드 바이올렛.
자신이 설계한 누명 씌우기 작전이 완전히 역풍을 맞아 발레르 심문관만 날아가고, 사교계 평판마저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그녀의 얼굴은 독기로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리며, 품속에 숨겨둔 기괴한 형상의 검은 마석을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마리안의 눈동자에 서린 집착과 광기는 이제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쏘아보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엘리샤…… 다가오는 대연회에서, 반드시 네년의 가식을 찢어발겨 주마. 마물을 조종한 진짜 더러운 악녀가 누구인지, 전 제국민 앞에서 증명해 보이지.’
다가오는 아카데미 최종 평가와 대연회.
마리안이 준비하는 최종 음모의 썩은 냄새가 벌써부터 사방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내 드레스 자락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앞으로 뜯어낼 합의금과 내 안락한 카라칼 영지 백수 라이프의 단가를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디 한번 올 테면 와봐라. 내 노후 자금의 밑거름이 되어줄 삼류 연기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