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심문관 발레르가 붉게 달아오른 낙인을 치켜들고 내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핏빛으로 이글거리는 마력 문양이 코앞까지 육박해 오자, 뜨거운 열기가 앞머리를 지지며 단백질 타는 냄새를 풍겼다.

낙인이 닿기 직전, 나는 숨을 가볍게 들이쉬며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던 물건을 꽉 쥐었다.

“발레르 심문관님, 그 닭발 같은 손을 3센티미터만 더 전진시키면, 당신이 다음 달에 은퇴하고 사려던 호숫가 별장은 영원히 매물에서 사라질 겁니다.”

발레르의 손끝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붉은 낙인의 열기가 내 미간 사이에서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지만, 내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의 코앞에서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세웠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지금 당신 엉덩이 밑에 깔려 있는 의자 다리를 보면 알겠죠.”

나는 테이블 밑으로 무릎을 살짝 굽혔다.

내 오른손에는 가문의 수석 집사 벤이 ‘가문의 낡은 금고 열쇠’라며 챙겨 주었던 녹슨 무쇠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벤은 분명 낡고 쓸모없는 고철이라며 은근슬쩍 내 손에 쥐여 주었지만, 소설 속 기억을 가진 내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이 시커멓고 투박한 고철의 정체는 과거 황실 마도 학자들이 비상 상황 시 모든 마도 결계를 강제로 정지시키기 위해 제작했던 ‘만능 우회 마스터키’였다.

철컥.

나는 발이 닿지 않는 어둠 속, 심문용 마도 테이블 아래쪽에 숨겨진 결계 흐름의 혈점을 정확하게 찾아냈다. 마력의 파동이 가장 짙게 뭉쳐 있는 톱니바퀴 모양의 홈. 그 좁은 틈새로 녹슨 무쇠 열쇠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과감하게 비틀었다.

서그럭, 하고 녹슨 쇳가루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파열음이 심문실 바닥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웅웅거리며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보라색 차단 결계가 순식간에 빛을 잃고 바래 가기 시작했다. 마치 전압이 급격히 떨어진 전등처럼, 방 구석구석을 구속하던 마력의 그물이 허물어졌다.

“이, 이게 무슨...... 결계가 왜 꺼지는 거지? 마력 제어 장치가 왜 반응을 안 해!”

발레르가 허둥지둥 낙인을 거두며 테이블 아래를 내려다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결계가 해제됨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정직의 장부’가 맑고 고운 종소리를 울리며 페이지를 요란하게 넘기기 시작했다.

[위선적인 직무 유기 및 뇌물 수수 정황 감지.] [보유 자산 보호를 위해 ‘뼈 때리는 진실’의 강제 출력을 시작합니다.]

머릿속을 찌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대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맑고 투명한 독설의 기운이 내 성대를 지배했다. 오해를 해명하겠다며 얄팍한 하얀 거짓말을 하려 했다면 대가로 내 피 같은 금화가 뭉텅이로 날아가고 편두통이 뇌를 찔렀겠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뚱보 심문관을 팩트로 두들겨 패는 일은 장부조차 대환영하는 정당방위였다.

나는 조용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결계가 왜 꺼지냐고요? 당연히 당신이 쓰는 싸구려 마도 장비가 제 수명을 다했거나, 아니면 신이 당신의 그 파렴치한 면상을 더는 눈 뜨고 봐줄 수 없어서 파업을 선언한 거겠죠. 발레르 심문관님, 마리안 드 바이올렛에게서 받은 금화 오백 닢은 벌써 세탁이 끝났습니까?”

“뭐, 뭐라? 무슨 망발을......!”

“망발은 지금 그쪽 가슴팍에 달린 황실 심문관 배지가 울고 있는 게 망발이고요.”

나는 턱짓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오늘 아침 내 기숙사 방에서 발견됐다는 ‘황실 보안 결계 훼손 도구’ 말인데 말이죠. 참 눈물겨운 삼류 연출이더군요. 그 무식하게 큰 마력 증폭용 마석은 제국에서 딱 세 군데 광산에서만 채굴되는 물건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 곳이 바로 마리안의 외가인 바이올렛 백작가의 독점 소유지죠. 심지어 장부 일련번호까지 고스란히 박혀 있는 따끈따끈한 신상을 범죄 증거랍시고 내 방 침대 밑에 쑤셔 박아 두다니. 머리는 모자 위에 얹어 두는 장식품입니까?”

“이, 이 교활한 년이 감히 날 모함하려 드는구나! 증거도 없이 황실 직속 심문관을 모독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발레르가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뚱뚱한 뺨이 수치심과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증거요? 증거라면 방금 당신이 내 이마에 찍으려던 그 직인 낙인에 아주 예쁘게 묻어 있겠네요. 결계를 훼손한 진범의 마력 반응을 검출하기도 전에, 피의자를 협박해서 즉결 처분으로 입을 막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확실한 증거 아닙니까? 아카데미 행정 실장직을 약속받았다고 해서 이렇게 대놓고 앞잡이 노릇을 하시면 곤란하죠. 제국 사법부가 아무리 썩었다 한들, 공작가의 영애를 야밤에 독방으로 끌고 와 불법 심문한 사실이 알려지면 당신 목줄이 먼저 날아갈 텐데요.”

“헛소리! 이 방은 완전 차단 결계가 처져 있다! 여기서 네가 무슨 짓을 당하든, 밖에선 아무도 알 수 없어!”

발레르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외침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방금 전까지는 완전 차단 결계가 작동하고 있었던 게 맞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쥐여진 녹슨 무쇠 열쇠는 결계를 해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열쇠의 손잡이 부분을 한 번 더 꾹 눌렀다.

지잉하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심문실 천장 구석에 매달려 있던 기록용 마도 영상 거울이 붉은빛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결계가 꺼졌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머리 나쁜 심문관님.”

나는 생긋 웃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방금 제가 그쪽 결계의 마력 흐름을 우회해서, 이 방 안의 상황을 중계하는 기록 거울의 회선을 아카데미 중앙 광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강제 연결해 드렸습니다. 축하드려요. 지금쯤 온 학내 생도들과 교수진, 그리고 마침 저를 찾으러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던 황태자 전하까지 당신의 그 우아한 즉결 심판 장면을 아주 실감 나는 화질로 감상하고 계실 겁니다.”

“......!!”

발레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의 안색이 마치 며칠 동안 물에 젖어 방치된 하얀 도화지처럼 푸르스름하게 탈색되어 갔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장의 거울과 내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거짓말이겠지. 네가 어떻게 황실 결계의 마도 회선을 만진단 말이냐! 네까짓 공작가 영애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학도 주제에!”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든가요. 아, 참고로 제국 법전 제12조 4항에 따르면, 학내 공정성을 위반하고 특정 가문의 뇌물을 받아 무고한 학생을 기소하려 한 자는 가산 적몰 및 종신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답니다. 안 그래도 카라칼 영지로 가기 위해 은퇴 자금을 넉넉히 챙겨 두고 싶었는데, 당신이 몰수당할 그 호숫가 별장, 경매에 나오면 제가 아주 헐값에 낙찰받아 드리죠. 고맙기도 해라.”

나는 일부러 턱을 괴고 그를 조롱했다.

발레르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려 그의 풍성한 턱수염을 적셨다. 그가 쥐고 있던 직인 낙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그의 영혼을 짓누르는 것은 내 독설의 날카로움뿐만이 아니었다.

정직의 장부가 내뿜는 기운은 상대방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위선과 죄책감을 강제로 끄집어내어 스스로를 갉아먹게 만드는 기묘한 마력이 있었다. 발레르는 이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이건 무효다...... 이건 음모야! 네가 마법으로 날 조종한 게 분명하다!”

“조종은 무슨. 뇌물 받아먹을 때는 본인 자유의지로 아주 싱글벙글하셨으면서, 걸리고 나니까 마법 탓을 하십니까? 그 나이 먹고 남 탓하는 버릇은 아직 못 고치셨나 보네요. 하긴, 마리안의 눈물 흘리는 연기에 홀려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든 시점에서 당신의 지능 수준은 이미 증명된 셈이지만요.”

나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을 돌아서 발레르의 앞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 낙인을 구두 굽으로 가볍게 밟아 뭉개며,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파멸할 뻔한 불쌍한 악역 영애를 괴롭히려다, 본인이 제국의 공식 범죄자로 전 세계에 생중계된 소감이.”

“너, 너는...... 괴물이야......!”

발레르가 이빨을 딱딱 맞부딪치며 뒤로 자빠졌다. 그의 엉덩이가 심문실 바닥을 보기 좋게 쓸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다시 한번 울렸다.

[학내 공정성 위반 행위 폭로 완료.] [성취 포인트 200점 획득!] [추방 지수가 15% 상승하여 현재 45%에 도달했습니다.] [자산 방어 성공: 보유 금화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좋아, 아주 순조롭군.’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비록 이마에 낙인이 찍히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추방당하는 것은 무산되었지만, 학내 심문관의 비리를 폭로하고 사법 체계를 뒤흔들었으니 ‘학우 난동죄’ 및 ‘품위 유지 의무 불이행’ 항목은 아주 훌륭하게 충족된 셈이었다. 이제 이 소동이 마무리되면, 아카데미 이사회는 골치 아픈 나를 어떻게든 변방으로 쓸어버리려 안달이 날 것이다.

카라칼 영지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거릴 내 완벽한 백수 라이프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쾅ㅡㅡㅡ!!!

심문실의 두꺼운 철문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쇳가루와 돌가루 먼지 사이로, 붉은색 검기가 사납게 소용돌이치며 방 안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엘리샤!!!”

짐승처럼 포효하는 목소리가 심문실을 뒤흔들었다.

먼지 구덩이를 뚫고 나타난 것은 황태자 카일 폰 로젠베르크였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대검에는 아직도 흉포한 마력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의 눈은 완전히 핏발이 선 채 미쳐 있었다. 평소의 품위 넘치던 황태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모든 것을 도륙할 듯한 살귀의 형상이었다.

“어떤 놈이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 여자에게 손을 대려 한 거지?”

카일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발레르에게 닿았다.

그의 검 끝이 바닥을 긁으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카일의 등 뒤로, 또 하나의 그림자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성자 레이나르 엘 필레아스였다. 늘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다니던 그의 얼굴에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무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성력이 깃든 은빛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어둡게 침전되어 있었다.

“발레르 심문관님. 주님의 자비도 가끔은 길을 잃을 때가 있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죠.”

레이나르가 기괴할 정도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이 완전히 뒤집힌 채 살기를 뿜어내는 두 남자가 무기를 든 채 좁은 심문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제발...... 그냥 나 좀 편하게 추방해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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