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샤 폰 네페르티! 학내 금기 소환 마도서를 무단 도용하여 연무장에 마물을 소환하고, 아카데미의 신성한 보안 결계를 고의로 훼손한 혐의로 즉시 체포한다!”
선도부장의 벼락같은 호통이 사방이 막힌 연무장 천장을 무겁게 때렸다. 시퍼런 마력을 뿜어내는 마도 창끝 수십 개가 구둣발 코앞까지 일제히 밀려들었다. 보통의 영애라면 기겁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쓰러졌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심장은 전혀 다른 의미로 세차게 고동치고 있었다.
‘아카데미 보안 결계 파손에 금기 소환죄?’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다. 단순한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을 넘어, 공식적인 학내 난동죄이자 중범죄다. 이대로 유죄 판결만 조용히 받아낸다면 가문에서도 나를 포기할 것이고, 아카데미에서는 즉각 퇴학 처분을 내려 제국 국경 밖으로 유배 보낼 터였다.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극서부 카라칼 영지로의 ‘안전하고 신속한 추방’ 편도 티켓이 제 발로 굴러들어 온 셈이었다.
“순순히 포박당해라, 네페르티 영애! 저항하면 무력을 사용하겠다!”
선도부원의 윽박지름에 나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 힘 빼실 필요 없어요. 기꺼이 가 드릴 테니까 예쁜 은식기 채우듯 부드럽게 채워 주시겠어요? 혹시 이거 진짜 순은인가요? 도금이면 살알레르기가 돋아서 치료비 청구서를 그쪽 가문으로 보낼지도 모르니까요.”
“......뭐?”
체포를 집행하던 선도부원의 얼굴이 단숨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범죄 혐의자를 연행하면서 연고지 보상 청구 걱정을 먼저 하는 용의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터였다.
저 멀리 구석에서 여전히 훌쩍이며 가련한 척을 하던 마리안 드 바이올렛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입꼬리는 미세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완벽하게 파 놓은 함정에 내가 걸려들었다고 확신하는 비열한 미소였다.
나는 연행되면서 그녀의 곁을 지나칠 때, 일부러 발걸음을 멈추고 낮게 속삭였다.
“마리안, 연기 연습 좀 더 하고 오지 그랬니? 억울한 척 즙을 짜내는 꼴이 삼류 극단의 엑스트라만도 못해서 눈 뜨고 봐주기 괴롭단다. 그리고 네 구두 굽 밑바닥에 잔뜩 묻은 붉은 마도 가루나 좀 털고 울어. 증거물 보존도 못 하는 멍청한 머리로 음모를 꾸미느라 고생이 많구나.”
“흐윽......! 에, 엘리샤 영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마리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경악으로 크게 벌어진 그녀의 눈동자를 뒤로한 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선도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연무장을 나섰다.
연무장 입구 그늘에 대기하고 있던 수석 집사 벤이 소리 소문 없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소맷자락 아래로 묵직한 감촉을 밀어 넣었다.
주머니 속으로 쑥 들어온 것은 차갑고 단단한 무쇠의 감촉이었다.
‘녹슨 무쇠 열쇠.’
벤이 가문의 숨겨진 낡은 금고 열쇠라며 건넸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황실의 삼류 마도 장치 따위는 가볍게 우회하여 해제해 버리는 만능 마도 도구라는 걸 나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유능한 내 집사는 내가 심문실로 끌려갈 것을 한 발 앞서 예측하고 최고의 탈출구이자 무기를 쥐여 준 것이다. 역시 퇴직 연금을 두둑이 챙겨줄 가치가 있는 훌륭한 고용인이다.
* * *
아카데미 본관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제1심문실.
사방이 마력을 차단하는 검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방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썩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방 한가운데 놓인 차가운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는 한 사내와 마주 앉아 있었다.
새빨간 심문관 제복을 입은 사내의 명패에는 ‘고위 심문관 바론 발레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마리안의 친가인 바이올렛 후작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받아 챙기는 부패한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발레르는 뚱뚱한 몸집을 의자에 깊숙이 묻은 채,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서류 뭉치를 툭툭 쳤다.
“엘리샤 폰 네페르티. 네죄를 네가 알렸다?”
상투적이고 지루한 오프닝이었다. 나는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제 죄라면 지나치게 정직해서 사교계의 위선자들에게 안구 테러를 가한 죄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그보다 발레르 심문관님, 그쪽 머리 위에 얹어진 가발이 왼쪽으로 약 15도 정도 돌아갔습니다. 심문의 엄숙함을 유지하고 싶으시다면 접착제 풀칠부터 다시 하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이, 이 건방진 년이......!”
발레르의 얼굴이 돼지 껍데기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어디선가 묵직한 진동이 지하 심문실 벽면을 타고 전해졌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강력한 검기와 신성력이 충돌하며 내는 마력의 파열음이었다.
뒤이어 두꺼운 철문 너머 복도에서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당장 그 문 열어라! 내 약혼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했다간, 이 아카데미 지하 감옥 전체를 통째로 용암으로 채워 버릴 것이다!”
황태자 카일 폰 로젠베르크의 목소리였다. 성대가 찢어질 듯 분노를 터뜨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집착광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 뒤를 이어 나긋나긋하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미성이 철문을 긁고 들어왔다.
“아아, 가여운 엘리샤 영애를 이토록 음습한 곳에 가두다니요. 신전의 이름으로 이 더러운 지하실을 정화해 드려야겠습니다. 아, 물론 그 정화의 범위에는 심문관님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답니다?”
성자 레이나르 엘 필레아스였다. 평소의 가식적인 성자 미소는 내팽개쳤는지, 그가 뿜어내는 신성력의 압박이 문틈을 타고 스며들어 심문실 바닥의 먼지를 사방으로 흐트러뜨렸다.
밖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로 날뛰는 남주들의 소란에, 정작 갇혀 있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저 미친놈들이 진짜 왜 저러는 거야?’
나는 분명 카일에게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 피지컬”이라며 욕설을 퍼부었고, 레이나르에게는 “썩은 미소 짓지 마라, 위선자야”라며 뼈를 때려 주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모욕감에 부르르 떨며 나를 매장하려 드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데 왜 나를 구하겠답시고 아카데미 선도부 건물을 박살 내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들의 집착 필터는 이미 치료 약이 없는 말기 증세가 분명했다. 이대로 밖의 남주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나를 구해준다면, 내 완벽한 ‘학내 난동죄 기소 및 추방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전에 이곳에서 유죄 판결을 확정 지어야 했다.
심문관 발레르는 밖에서 들려오는 황태자와 성자의 협박에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그는 품속에서 빛나는 마도구를 꺼내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후, 황태자 전하와 성자께서 아무리 날뛰셔도 소용없다. 이 방은 제국 황실이 보증하는 ‘왜곡 결계’가 상시 작동하는 곳이니까!”
발레르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마도 장치를 작동시켰다.
*웅—!*
순간, 심문실 사방의 검은 대리석 벽면에서 가느다란 보라색 빛줄기들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서 얽히고설켰다. 공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지며 머리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엄습했다.
‘왜곡 결계’의 정체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피폐 소설 속에서 억울한 죄인들을 양산할 때 쓰이던 최악의 마도 장치였다. 이 결계 안에서는 피심문자가 어떤 진실을 말하든, 결계의 지배자가 설정한 대로 모든 진술이 거짓과 왜곡으로 치환되어 기록되었다. 즉, 내가 “나는 마물을 소환하지 않았다”라고 말해도, 결계의 마력은 이를 “내가 마물을 소환하여 결계를 부수었다”라는 자백으로 왜곡하여 마도 서판에 새겨 넣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결계의 강제력에 저항하여 억지로 진실을 관철하려 들면, 영혼을 갉아먹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신체에 영구적인 범죄자의 낙인이 찍히게 설계되어 있었다.
발레르가 기고만장한 태도로 서류판을 들이밀었다.
“자, 순순히 입을 열어라, 엘리샤 폰 네페르티! 네가 금기 마도서를 도용해 연무장의 결계를 파괴하고 마물을 불러내어 학우들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시인해라! 입을 열지 않아도 이 왜곡 결계가 작동하는 한, 네 침묵은 곧 묵시적 자백으로 처리될 것이다!”
보라색 마력의 사슬이 내 손목과 발목을 휘감아 오기 시작했다.
정직의 장부 시스템이 감지한 듯,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만약 여기서 비굴하게 타협하거나 거짓 자백을 유도하는 질문에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간, 즉시 머리가 깨지는 편두통과 함께 내 소중한 은퇴 자금인 금화 수십 닢이 허공으로 증발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자니 왜곡 결계가 내 말을 왜곡하여 강제로 유죄 낙인을 찍으려 들 터였다. 진퇴양난의 상황.
하지만 내 주머니 속에는 벤이 전해준 ‘녹슨 무쇠 열쇠’가 있었다.
*스스스스—*
주머니 속에서 열쇠가 기묘한 고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 열기는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온몸의 혈관을 타고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놀랍게도 나를 쭝긋거리며 옥죄던 왜곡 결계의 무거운 압박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보라색 마력 사슬들이 내 피부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틱, 틱 소리를 내며 불꽃이 되어 흩어졌다.
‘역시.’
이 열쇠는 단순한 쇳조각이 아니었다. 황실 마도 장치의 주파수를 완벽하게 교란하여 무력화하는 무력화 도구였다. 결계는 겉보기에는 멀쩡히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주변의 마력 흐름은 이미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즉, 지금 이 방에서 왜곡 결계의 지배력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존재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발레르는 내가 두려움에 질려 침묵하는 줄 알고 한층 더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왜 대답이 없지? 벌써 겁에 질려 다리가 떨리는 모양이군! 네가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 할지라도, 황실 보안 결계를 훼손한 죄인은 이 자리에서 즉결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아주 천천히, 비스듬하게 끌어 올렸다.
조롱과 멸시가 가득 담긴 엷은 미소였다.
“......뭐가 그리 우스운가?”
발레르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절망이나 공포의 기색은커녕, 눈앞의 소녀는 마치 서커스단의 우스꽝스러운 광대를 구경하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레르 심문관님.”
내가 조용히 입을 열자, 발레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자백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
“자백이요? 아니요. 그 머리 나쁜 마리안에게 뇌물로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성비가 참 떨어지는 짓을 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나이 먹도록 남의 집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삼류 악당 노릇을 하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 튀어나온 뱃살만큼 뇌에도 기름이 낀 게 아니라면, 지금 본인이 얼마나 멍청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지 깨달으셔야 할 텐데요.”
“이, 이 미친 년이 끝까지......!”
발레르는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이제 붉은색을 넘어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밖에서는 철문이 부서져라 쾅쾅거리는 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문짝의 힌지가 비틀어지며 쇳가루가 바닥으로 후수수 떨어졌다.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발레르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건방진 입술을 놀린 대가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즉결 처분으로 네 이마에 죄인의 낙인을 새겨주마!”
그가 테이블 옆에 거치되어 있던 붉게 달아오른 ‘직인 낙인’을 움켜쥐었다. 마력이 주입된 낙인 끝부분에서 핏빛 문양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이 낙인이 이마에 찍히는 순간, 영혼에 범죄 사실이 각인되어 평생 제국 영토 내에서는 고위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박탈당하게 된다.
나에게는 그야말로 ‘완벽한 추방 자격 조건’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굳이 고통스럽게 이마에 흉터를 남기며 쫓겨날 필요는 없었다. 돈이 많은 갓수가 되려면 얼굴 품위는 유지해야 하니까.
발레르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낙인을 치켜들고 내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붉은 열기가 내 앞머리를 스치며 타들어 가는 냄새를 풍기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주머니 속의 녹슨 열쇠를 가볍게 쥔 채, 마침내 서서히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