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왕립 루나 아카데미의 중앙 대연무장은 이른 아침부터 흙먼지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황족과 대귀족 자제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공동 마도 전투 훈련 날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각자 가문의 위세를 자랑하느라 빳빳하게 깃을 세우고 거드름을 피웠을 영애와 영식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모두의 시선이 연무장 한구석에 쏠려 있었다.
그 시선의 중심에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훈련용 목검을 짝다리 짚은 채 바닥에 콕콕 박아대고 있는 엘리샤가 있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엘리샤는 아주 작고, 그러나 뼈가 시릴 만큼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사흘 전부터 아른거리던 카라칼 영지의 황량하고도 아름다운 무위도식 라이프가 3D 입체 화면처럼 재생되는 중이었다. 뜨끈한 벽난로 옆에서 가문에서 보내주는 연금을 흥청망청 쓰며 귤이나 까먹는 삶. 그것이 엘리샤가 바라는 우주 유일의 진리이자 구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차가운 흙바닥이었고, 손에 쥐어진 것은 쓸데없이 무거운 목검이었다.
“영애, 오늘 훈련은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참관하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렇게 성의 없는 태도로 임하시다간 가문의 명예에 흠집이 갈 것입니다.”
지나가던 담당 교관이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주었지만, 엘리샤는 콧방귀를 뀌었다.
“가문의 명예가 밥 먹여 줍니까? 어차피 제국 세무국에서 털어가면 남는 것도 없는 껍데기 명예 따위, 가질 사람이나 가지라고 하세요. 전 그냥 오늘 품위 점수 빵점 맞고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고 싶을 뿐이니까요.”
“뭐, 뭐라고요?”
교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엘리샤의 머릿속 ‘정직의 장부’는 가차 없이 뇌를 찌르는 편두통 대신, 지극히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날것 그대로의 본심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머릿속에서 맑고 고운 종소리가 울리며 성취 포인트가 소폭 상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연무장 반대편에서 사흘 동안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던 마리안 드 바이올렛이 한 무리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걸어왔다. 그녀의 눈동자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입가에는 기괴할 정도로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머, 엘리샤 영애. 오늘도 여전히…… 당당하시네요.”
마리안은 소매 속에 손을 감춘 채,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소매 틈새로 아주 미세한 붉은색 마력의 입자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엘리샤는 놓치지 않았다.
‘저년이 또 무슨 약을 사발로 드셨나.’
엘리샤는 본능적으로 주머니 속에 넣어둔 ‘녹슨 무쇠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수석 집사 벤이 건네준 가문의 유물이자 황실 마도 결계를 무력화하는 만능 만능 우회 도구. 열쇠는 마리안의 소매 끝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에 반응하듯 주머니 속에서 미세하게 웅웅거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마리안 영애, 사흘 전에 남백작과의 밤샘 밀회 건으로 그렇게 울며불며 도망치시더니 벌써 붓기가 다 빠지셨나 봐요? 안면 가죽의 회복 탄력성이 거의 괴수 수준이시네요. 부러워라.”
“너, 너……!”
주변 영애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리안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마리안은 이를 악물며 소매 속의 손가락을 튕겼다.
*찌지지직!*
순간, 연무장 바닥에 새겨진 거대한 방어 결계의 룬 문자들이 붉게 타오르며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대기를 가르는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연무장 중앙의 흙더미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꺄악! 이게 무슨 소리야?”
“결계가…… 결계가 깨졌어!”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솟구친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칠흑 같은 그림자로 둘러싸인 기괴한 형상의 하급 마물, ‘섀도우 하운드’였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마물은 아카데미 결계 내부에서는 절대로 스스로 소환될 수 없는 존재였다.
마물은 나오자마자 고개를 팃팃 돌리더니, 마리안의 유도 신호를 받은 것처럼 정확히 엘리샤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드디어 걸려들었어, 엘리샤 네페르티! 마물 소환의 덫에 걸려 뼈도 못 추리고 찢겨 죽어라!’
마리안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가련하게 뒤로 넘어지는 척 연기를 시작했다.
“어머나! 마물이……! 엘리샤 영애, 조심하세요!”
목소리는 몹시 다급하고 걱정스러웠지만, 눈동자에는 명백한 살의와 희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뇌내 시뮬레이터인 ‘정직의 장부’가 실시간으로 붉은색 안내선을 연무장 바닥에 그려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험 감지: 섀도우 하운드 돌진 경로 분석 완료.] [우측 10도 방향으로 1.2미터 이동 후, 상체를 15도 숙일 시 완전 회피 가능.]
“귀찮게 시리 정말.”
엘리샤는 한숨을 푹 쉬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슈우욱!*
마물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며 허공을 갈랐다. 엘리샤는 마치 산책로의 물웅덩이를 피하듯 우아하고도 무심한 동작으로 그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려보냈다. 단 한 가닥의 머리카락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회피였다.
“……어?”
마리안의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연히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줄 알았던 엘리샤가 너무나도 멀쩡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엘리샤의 걸음은 마물을 피한 탄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바닥에 주저앉아 내숭을 떨고 있던 마리안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어, 영애? 왜 이쪽으로…….”
마리안이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엘리샤는 들고 있던 훈련용 목검을 가볍게 한 바퀴 회전시키더니, 그대로 마리안의 턱밑을 향해 내질렀다.
*탁!*
단단한 목검의 끝부분이 마리안의 새하얀 목덜미, 정확히 목젖 앞 1밀리미터 지점에 딱 멈춰 섰다. 조금만 더 전진했어도 목뼈가 으스러졌을 정교하고도 위협적인 궤적이었다.
“히익……!”
마리안의 숨소리가 단숨에 턱 막혔다. 그녀는 엉덩이를 바닥에 찧은 채, 눈을 크게 뜨고 목검 끝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목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스치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움직이지 마.”
엘리샤가 목검을 쥔 채, 내려다보는 시선은 얼음물보다 차가웠다.
“어머, 마리안 영애. 얼굴색이 왜 그래요? 마물이 무서운 건가요, 아니면 자기가 불러온 똥구가 자기를 물까 봐 무서운 건가요?”
“무, 무슨 소릴 하는지 난 전혀……!”
“입 닥쳐. 그 삼류 연극배우 같은 콧소리 한 번만 더 내면 네 목구멍에 이 목검을 수직으로 꽂아줄 테니까. 네가 흘린 눈물 냄새보다 네 머리통에서 굴러가는 얄팍한 잔머리 구린내가 더 지독해. 사흘 전에 그렇게 털리고도 정신을 못 차렸으면 뇌 구조를 리모델링해 줄까?”
엘리샤의 거침없는 독설이 연무장에 쨍쨍하게 울려 퍼졌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학생들은 엘리샤의 서슬 퍼런 기백에 압도당해 침을 꼴깍 삼켰다. 마리안은 수치심과 공포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눈물을 흘렸지만, 이번 눈물은 연기가 아닌 진짜 생리적인 공포의 눈물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나한테 이런 짓을……!”
“내가 왜 못 해? 가성비 떨어지는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 네 대가리를 깨부수는 건 내 노후 대책보다 쉬운 일인데.”
엘리샤가 혀를 쯧 차며 목검을 거두려는 찰나, 소멸하지 않은 섀도우 하운드가 분노에 찬 포효를 지르며 다시 엘리샤의 등 뒤를 향해 도약했다.
“엘리샤! 피해라!”
멀리서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연무장의 공기를 완전히 찢어발기며 광폭한 마력이 난입했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누구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폭풍 같은 오라를 두르고 나타난 것은 황태자 카일이었다. 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고 붉게 뒤집혀 있었다. 카일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황실 특제 마검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그러나 마리안이 설치해 둔 마도 장치의 왜곡된 위상 마력과 카일의 폭주하는 오라가 허공에서 기괴하게 충돌했다.
*쿠콰콰쾅!*
마검이 마물의 대가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림과 동시에, 엄청난 마력의 역류가 발생했다. 카일의 손에 들려 있던 명검이 그 무지막지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쩍 갈라지며,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했다.
*쨍그랑! 콰드득!*
마물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고, 카일의 연청색 마검은 수십 개의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연무장 바닥으로 요란하게 흩뿌려졌다.
“하아, 하아……!”
카일은 거친 숨을 내쉬며 곧바로 엘리샤의 어깨를 붙잡았다.
“엘리샤! 다친 곳은 없느냐? 내가 늦어서 미안하다. 네 몸에 먼지 한 톨이라도 묻었다면 내 스스로를 용서치 못했을 것이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집착과 안도감이 기괴하게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소유욕 수치가 가히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샤는 카일의 감동적인 눈빛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바닥에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진 마검의 파편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잠깐만. 저거 황실 장인이 평생을 바쳐 제련했다는 그 귀하디귀한 마도 금속 ‘아스트룸’이잖아?’
엘리샤의 머릿속 뇌세포들이 가차 없이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저 정도 순도의 마도 파편이라면 암시장에 내다 팔기만 해도 최소 금화 백 닢, 아니 이백 닢은 가뿐히 챙길 수 있었다. 카라칼 영지에서 은퇴 자금으로 쓰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꽁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놓아봐, 이 귀찮은 덩치야.”
엘리샤는 카일의 손을 사정없이 뿌리치고는, 망설임 없이 바닥으로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드레스 자락이 흙바닥에 쓸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바쁘게 손을 놀려 마검의 부러진 파편들을 줍기 시작했다.
“……엘리샤?”
카일은 멍하니 자신의 빈 손을 바라보다가, 바닥에서 파편을 조심스럽게 모으는 엘리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내 검의 파편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이냐? 비록 부러졌을지언정, 나의 흔적을 간직하고 싶어서…….”
집착 필터가 완전히 왜곡된 형태로 작동한 카일의 얼굴에 기묘한 홍조가 돌았다. 그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 엘리샤. 네 마음이 이토록 깊을 줄은…….”
“개소리 좀 정성스럽게 하지 마.”
엘리샤가 가차 없이 팩트 폭행의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황태자씩이나 되어서 칼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고 부러뜨리는 무능함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중이야. 그 멍청한 대가리로 소설 쓸 시간 있으면 칼집이나 새로 알아봐. 이 고철 덩어리들이 네 그 느끼한 눈빛보다 백배는 더 값어치 나가니까 줍는 거지, 착각도 유분수지 진짜.”
엘리샤는 마지막 파편 하나까지 싹싹 긁어모아 품에 안았다.
“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을 때마다 삼겹살 기름을 통째로 들이켠 것처럼 속이 부대껴서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내 시야 차단하지 말고 저리 좀 비켜줄래? 눈 썩을 것 같으니까.”
카일의 가슴에 날카로운 화살이 연달아 꽂혔다. 하지만 그의 멘탈은 바스러지는 동시에 기묘한 희열로 다시 조립되었다.
‘그렇군. 그녀는 내가 황태자라는 지위에 안주하여 검술 수련을 게을리한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더 강해져서 완벽하게 자신을 지켜내라고 채찍질하는 거야……!’
“……명심하겠다, 엘리샤. 네 지적대로 난 아직 부족하군. 네 곁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도록 더 채찍질해다오.”
카일이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샤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아 양팔을 비볐다. 저 새끼는 치료약도 없는 말기 착각증이 분명했다.
그녀는 연무장 구석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수석 집사 벤을 향해 손짓했다. 벤은 고양이가 쥐를 채듯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엘리샤의 곁에 섰다.
“벤.”
엘리샤는 품에 안고 있던 마검 파편들을 벤에게 슥 넘겨주었다.
“이거 암시장에 갖다 팔아. 흠집 안 나게 포장 잘하고, 장부에는 ‘잡화 처분액’으로 조용히 올려놔.”
벤은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품속에서 낡은 회계 장부를 꺼내 깃펜으로 슥슥 적어 내렸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카라칼 영지의 은퇴 자금 포트폴리오에 아주 훌륭하고도 짭짤한 보탬이 되겠군요. 세무국의 눈을 피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세탁해 두겠습니다.”
역시 내 유능한 집사다. 엘리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려다, 마물이 튀어 나왔던 바닥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기괴하게 타들어 간 붉은 마력의 궤적이 뱀처럼 볏을 세우고 남아 있었다.
‘어라?’
주머니 속의 ‘녹슨 무쇠 열쇠’가 한층 더 강하게 진동했다.
엘리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의 궤적이 뻗어 나간 끝자락에는, 아까 마리안이 서 있던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마리안의 구두 굽 밑바닥에는 결계를 인위적으로 훼손할 때 쓰이는 특수한 붉은 마도 가루가 묻어 있었다.
‘이거였군.’
마리안이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아카데미의 보안 결계를 훼손하고 금기 구역의 힘을 끌어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엘리샤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아카데미 보안 결계 훼손이라니. 이거야말로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을 넘어 공식적인 학내 난동죄로 즉시 추방당할 수 있는 최고의 명분이잖아? 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난 합법적으로 쫓겨날 수 있어!’
그녀가 속으로 완벽한 인과관계를 완성하며 쾌재를 부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연무장의 육중한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은빛 갑옷을 입은 아카데미 선도부 마도병들이 대거 밀어닥쳤다. 그들의 수장인 선도부장이 엄숙한 표정으로 마도 지팡이를 치켜세우며 엘리샤를 가리켰다.
“엘리샤 폰 네페르티! 학내 금기 소환 마도서를 무단 도용하여 연무장에 마물을 소환하고, 아카데미의 신성한 보안 결계를 고의로 훼손한 혐의로 즉시 체포한다!”
연무장에 찬물이 끼얹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구석에 주저앉아 있던 마리안이 그제야 눈물을 훔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상황은 순식간에 엘리샤를 향한 덫으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