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을 뼈째로 으스러뜨릴 기세로 움켜쥔 손아귀의 압박감에 엘리샤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아프다. 지독하게 아프다.
피가 통하지 않아 손끝이 저릿해지는 감각과 함께 머릿속의 주판알이 사정없이 굴러갔다. 제국의 고위 귀족이자 신전의 성자로 떠받들어지는 작자가 여인의 손목을 이리 억세게 쥐다니. 이건 명백한 폭행이자 신체적 상해 미수였다. 치료비에 정신적 위자료, 그리고 이 금싸라기 같은 자유 시간을 방해한 대가까지 합산하면 최소 금화 오십 닢은 뜯어내야 수지타산이 맞았다.
"이거 안 놓지?"
엘리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뱉어냈다. 그러나 레이나르는 백금발 사이로 보라색 눈동자를 기괴하게 번뜩이며 비틀린 미소를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에 힘을 더 주며 그녀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코끝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의 숨결이 엘리샤의 뺨을 간지럽혔다.
"놓아달라니, 섭섭하군요. 방금 전 마리안 영애를 벌레 보듯 짓밟아 사교계에서 매장시키던 그 대담함은 어디로 갔습니까? 참으로 잔인하고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만."
목소리에는 끈적한 유열이 묻어 있었다. 남의 불행과 파멸을 관조하며 즐기는 관음증 환자 특유의 구역질 나는 희열. 엘리샤는 그의 가식적인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 진짜 대가리 깨질 것 같네.'
머릿속에서 '하얀 거짓말'이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가식적인 아부'를 떠올리자마자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편두통이 전조 증상처럼 밀려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골든핑거인 [정직의 장부]가 불길한 붉은빛을 띠며 경고창을 띄웠다.
[경고: 가식적 타협 시도 시 보유 자산 금화 10닢 차감 및 극심한 편두통 부여!]
내 아까운 돈을 이 미친 성자 놈 때문에 날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가식의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 뇌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치명적인 진실을 그의 안면에 정통으로 꽂아 넣는 것.
엘리샤는 한숨을 푹 쉬고는, 레이나르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디서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수작질이야, 이 구린내 나는 위선자 자식아."
"……예?"
레이나르의 미소가 찰나의 순간 굳어졌다. 상냥하고 자비로운 성자의 가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엘리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귀가 처먹었어? 아니면 성자 노릇 하느라 뇌까지 신성력으로 가득 차서 지능이 퇴화했냐? 남들이 진흙탕에서 구르고 찢기는 걸 보면서 '아, 난 저 쓰레기들과 달리 고결한 존재야' 하고 자위하는 꼴이 진짜 역겹다고. 네 그 고상한 척하는 눈빛 뒤에 숨겨진 추악함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엘리샤 영애, 말이 지나치십니다. 저는 그저―"
"닥쳐. 내 말 아직 안 끝났으니까 주둥이 닥치고 들어."
엘리샤가 레이나르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단단한 사제복 너머로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왜 사교계의 온갖 추잡한 소문을 수집하고 도청하는지 알아? 네 본질이 비겁하고 유약한 사생아에 불과하니까 그렇지. 겉으로는 성자랍시고 신의 대리인 행세를 하지만, 속으로는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벌벌 떨고 있잖아. 그래서 남의 상처를 들춰내고, 그걸 가리개 삼아 네 비참한 처지를 위안하는 거야. '저놈보단 내가 낫다' 하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그 역겨운 사생아 본성, 언제쯤 고칠래?"
'사생아.'
그 단어가 공중을 가르는 순간, 정원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레이나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필레아스 가문의 가장 은밀하고도 수치스러운 비밀. 그가 가문의 정식 후계자가 아닌, 길거리의 천한 피가 섞인 사생아라는 사실은 제국 황실조차 완벽히 함구하고 있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그 비밀이,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한낱 공작가의 영애 입에서 너무나도 가볍고 명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신…… 그걸 어떻게……."
레이나르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던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낚아채고 있던 엘리샤의 손목에 들어간 힘이 스르륵 풀렸다.
엘리샤는 붉게 자국이 남은 제 손목을 쓸어내리며, 혀를 쯧 찼다.
"어떻게 알았냐고? 네 면상에 아주 대문짝만하게 써 붙여 놨거든. '나는 사랑받지 못해 미쳐버린 결핍 덩어리입니다'라고. 신전의 성스러운 은총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면 네 더러운 핏줄이 금가루라도 뒤집어쓸 줄 알았어? 웃기지도 않네. 분칠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속에서 썩어 문드러진 구린내는 안 숨겨져, 이 가짜 성자 놈아."
"아……."
레이나르는 숨을 들이켜는 법조차 잊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 깊은 곳, 가장 어둡고 추악한 심연에 처박아 두었던 상처가 날카로운 메스에 의해 남김없이 해부당한 느낌이었다. 아프다 못해 짜릿했다. 그 누구도 감히 그의 가식적인 미소 뒤를 보려 하지 않았다. 다들 그의 신성력에 눈이 멀어 칭송하기 바빴고, 기껏해야 가문의 권력을 탐내며 아부를 떨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탐욕도, 경외도 없었다. 오로지 피아식별 확실한 혐오와 벌레를 보는 듯한 귀찮음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이기적인 눈빛이, 오히려 레이나르의 뒤틀린 영혼에 구원처럼 꽂혔다.
"너 같은 부류는 아주 잘 알지."
엘리샤는 레이나르의 굳어버린 안면을 보며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남들의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상처받기 싫어서 먼저 상대를 조롱하고 우위에 서려는 비겁자들. 네가 성자라면 난 지나가던 길고양이다. 내 알 바 아니니까 앞으로 내 눈앞에 알짱거리지 마. 네 그 구린내 나는 위선에 장단 맞춰줄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정적이 정원을 지배했다.
레이나르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정서적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분노가 아니었다. 공포도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 동안 느껴본 적 없는, 온몸의 세포가 짜릿하게 전율하는 기묘한 해방감이었다.
자신의 추악함을 100% 꿰뚫어 보고, 그것을 가식 없이 매도해 주는 유일한 존재.
그녀의 매서운 독설은 그의 영혼을 짓밟는 회초리이자, 동시에 그를 옥죄던 위선의 굴레를 단번에 끊어내는 칼날이었다.
툭.
레이나르의 무릎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그는 정원의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엘리샤의 구두 끝을 바라보았다.
황홀경에 빠진 듯한 눈빛이었다. 보라색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광적인 집착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엘리샤의 먼지 묻은 구두 끝에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성자로서의 자존심, 가문의 명예,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스라져 내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 눈앞의 여인에게 정화당하고 싶다는 뒤틀린 갈망뿐이었다.
"맞습니다…… 영애의 말이 전부 맞아요."
레이나르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저는 비겁한 사생아이고, 남들의 파멸을 보며 안도하는 쓰레기입니다.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 구린내가 진동하지요. 아무도…… 그 누구도 제게 이런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리샤를 올려다보았다. 뺨이 약간 상기된 채, 그의 입술이 갈증을 느끼는 자처럼 가늘게 떨렸다.
"더 욕해 주십시오. 당신의 그 정직한 독설로, 제 가식 어린 영혼을 더 짓밟아 주십시오. 엘리샤 영애…… 당신만이 나를 온전히 바라봐 주는군요."
"……하?"
엘리샤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아 한 걸음 물러섰다.
'이 미친놈이 드디어 맛이 갔나?'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분명히 뼈를 때리는 팩트 폭행으로 멘탈을 털어버렸는데, 왜 반응이 이 모양 이 꼴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통 이 정도로 신랄하게 까발려지면 화를 내거나 덤벼들어야 정상 아닌가? 왜 갑자기 무릎을 꿇고 구두에 이마를 비벼대며 헐떡이는 건데?
[딩동! '성자 레이나르의 위선 폭로 및 정신적 굴복' 성공!] [성취 포인트 300점 획득!] [체벌적 집착 수치 폭증! 레이나르의 집착도 90% 달성!] [추방 지수 10% 추가 상승!]
머릿속 시스템 메세지를 확인한 엘리샤는 이마를 짚었다.
추방 지수가 올라간 건 좋은데, 남주의 집착도가 폭증했다는 불길한 문구가 눈에 밟혔다. 이 세계관의 남주들은 도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처먹은 걸까.
엘리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제국 귀족 가문들의 육성 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아니, 진짜 제국 대귀족 놈들은 애새끼들을 어떻게 키우는 거야? 조기 교육을 가학이랑 피학으로만 배웠나? 정상적인 칭찬과 훈육을 못 받고 자라니까, 팩트로 뼈를 때려주면 그걸 무슨 성스러운 구원의 회초리랍시고 처맞으며 질질 짜고 앉아 있네. 이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대가리에 든 건 많아도 정서 발달이 이 모양이니 나라 꼴이 잘도 돌아가겠다.'
지독한 정서 결핍과 애정 결핍이 만들어낸 괴물들. 그들이 바로 이 피폐 소설 속 집착 남주들의 본모습이었다. 평생 남들의 눈치만 보며 가식과 위선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전하는 엘리샤의 독설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 오아시스를 무료로 개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꺼져. 네 침 내 구두에 묻으면 세척비 청구할 거야. 가죽 상하니까 얼른 대가리 치워."
엘리샤는 레이나르의 이마를 구두 끝으로 가볍게 밀어내며 차갑게 뱉어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 난 널 정화해 준 게 아니라, 그냥 네가 꼴 보기 싫어서 팩트 폭행한 것뿐이니까. 내 귀한 시간 낭비하게 만들지 말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아…… 짓밟히는 감각마저 참으로 신성하군요……."
레이나르는 밀려난 자리에서 넋을 잃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광기를 넘어선 맹목적인 신앙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엘리샤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털어내며 서둘러 몸을 돌렸다. 이 미친놈들과 한 공간에 더 있다가는 제 정신 건강이 먼저 파탄 날 것이 분명했다. 어서 이 아카데미를 품위 유지 의무 위반으로 안전하게 탈출하여, 변방의 카라칼 영지에서 돈이나 쓰며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벤, 벤은 어디 간 거야. 빨리 마차 준비하라고 해야지……."
엘리샤는 투덜거리며 오솔길을 따라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무릎을 꿇은 레이나르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그의 손가락이 흙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치 상황을, 멀리 떨어진 수풀 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또 다른 눈동자가 있었다.
충격과 수치심으로 얼굴이 짓이겨진 채, 숨을 죽이고 있던 마리안 드 바이올렛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런 천박한 년한테 성자님마저 무릎을 꿇는단 말이야?"
마리안은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렸다.
약혼자 레온 남백작과의 밀회가 폭로되어 사교계에서 매장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 이 모든 파멸의 원인은 오직 하나, 엘리샤 폰 네페르티였다.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제 자리는커녕 목숨줄도 보장받지 못할 터였다.
마리안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녀는 품 안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는 기괴한 형태의 마도 장치를 꺼내 들었다.
황실에서 엄격하게 금지한, 마물을 유도하고 공간을 왜곡하는 금단의 유물.
"엘리샤 네페르티…… 네가 그렇게 잘났다면, 학내 금기 구역에 발을 들이고도 무사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마리안이 미친 듯이 웃으며 마도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다.
치지직, 불길한 붉은 마력이 오솔길 바닥을 타고 엘리샤가 걸어간 방향으로 은밀하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