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비의 자리? 제국을 뒤흔들 음모?"
엘리샤는 어이가 없어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헛웃음을 삼켰다.
참으로 눈부시고 거창한 망상이었다. 눈앞의 성자는 혼자서 무슨 피폐 장르의 암투물이라도 찍고 있는 모양인데, 미안하게도 엘리샤의 뇌 용량은 그런 복잡하고 피곤한 정치 공작을 담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고 품위 있게 이 아카데미에서 쫓겨나 저 멀리 서부의 카라칼 영지에서 평생 무위도식할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인 은퇴 계획뿐이었다.
레이나르가 뿜어내는 차가운 마력의 기운이 살갗을 스쳤다. 피부가 찌릿거리는 불쾌한 감각에 엘리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가장 먼저 계산한 것은 제국의 안위도, 성자의 숨겨진 의도도 아니었다. 오직 소지품의 감가상각비였다.
"레이나르 경."
엘리샤가 아주 차분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쓸데없이 화려하고 위협적인 마력 방출은 좀 멈춰 주시겠어요?"
"……예?"
예상치 못한 반응에 레이나르의 아름다운 백금발 아래로 보랏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엘리샤는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톡톡 털며 말을 이었다.
"이 드레스의 기단부 레이스는 아주 미세한 마력 진동에도 올이 풀리기 쉬운 고급 실로 짜여 있습니다. 지금 경이 뿜어내고 계신 그 음산한 마력 파동 때문에 레이스 끝부분이 조금씩 마모되고 있거든요. 이거 수선비만 최소 금화 세 닢입니다. 신전에서 그 수선비와 세탁비를 전액 지원해 줄 게 아니라면, 그 썩은 미소와 함께 마력부터 당장 거두어 주시죠."
"수선비…… 말입니까?"
레이나르의 목소리에 난생처음 겪는 종류의 당혹감이 묻어났다. 그는 신전의 고결한 성자이자, 아카데미 내에서도 손꼽히는 천재 마도사였다. 그가 마력을 개방해 상대를 압박할 때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공포에 질린 비명이거나, 비굴한 굴복, 혹은 팽팽한 적대감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옷자락의 감가상각비를 들이밀며 마력을 끄라고 요구하는 인간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보았다.
"고작 드레스 수선비라니요. 지금 이 엄숙한 질문 앞에서 그런 사소한 자산을 따지고 계신 겁니까?"
"사소하다니요? 머리에 꽃밭과 신성력만 가득 차 있으셔서 돈의 소중함을 모르시나 본데, 제국 서부의 가난한 영지민들은 금화 세 닢이면 한 달 동안 따뜻한 수프를 먹고살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남의 앞길을 무단으로 가로막고 음모론을 펼치기 전에, 본인 입가에 묻은 가식이나 좀 닦으시지 그래요."
"가식……?"
레이나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애롭고 성스러운 성자의 가면 뒤로, 날 선 불쾌함이 고개를 들었다. 엘리샤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예. 가식요. 신전의 자애롭고 고결한 얼굴을 하고서, 속으로는 어떻게든 남의 약점을 잡아서 손아귀에 쥐고 흔들 생각만 가득하시잖아요. 그 얄팍하고 구린내 나는 위선자 특유의 음모론, 보고 있는 제 눈이 다 피로할 지경입니다. 황태자의 소유욕을 자극해? 제가 무슨 한가한 연애 놀음이나 하러 아카데미에 온 줄 아십니까? 제 목표는 오직 하나, 이 지긋지긋한 사교계와 아카데미에서 안전하게 추방당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귀찮게 굴지 말고 저리 비키세요."
엘리샤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어 레이나르의 탄탄한 어깨를 툭 밀쳐냈다.
성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 '정직의 장부'는 아주 평온했다. 오히려 뇌를 찌르던 편두통이 눈 씻은 듯 사라지고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역시 솔직하게 뼈를 때리는 팩트 폭행이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엘리샤의 뒷모습을 보며, 레이나르는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그의 어깨에 닿았던 그녀의 손길은 차가우면서도 기묘하게 단호했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지저분한 독점욕과 위선을 이토록 날카롭고 정확하게 궤뚫어 본 인간은 없었다. 다들 그의 성스러운 수식어 뒤에 숨어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을 뿐.
"추방……이 목적인 척하면서, 결국 내 본질을 통째로 뒤흔드는군요."
레이나르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기이한 호선을 그렸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소유욕과 집착이 싹을 틔우며 붉은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가식 없게 대하는 유일한 존재를 향한, 아주 깊고 어두운 갈망이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가 뒤에서 무슨 음침한 오해를 쌓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바 없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 오솔길을 빠져나왔다.
'품위 유지 의무 위반으로 확실하게 도장을 찍으려면, 오늘 열리는 사교 모임이 아주 적격이지.'
정원 중앙의 대리석 정자 근처에는 이미 화려한 양산을 든 영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카데미의 실세이자, 원작의 여주인공인 마리안 드 바이올렛이 주최한 야외 다과회였다.
엘리샤가 다과회장 근처로 접근하자, 향긋한 차 향기 사이로 뾰족한 시선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마리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글생글 웃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먹잇감을 발견한 뱀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머, 엘리샤 영애 아니세요? 예약도 없이 이 누추한 정원까지 발걸음을 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마리안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가련한 척 눈꼬리를 접었다. 그녀의 주변에 앉아 있던 영애들이 일제히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영애, 오늘도 여전히…… 참으로 '검소한' 차림이시네요. 네페르티 가문이 최근 재정난이라도 겪고 있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봐요. 아카데미의 품위를 생각해서라도 최소한의 격식은 차려야 할 텐데, 저렇게 장식 하나 없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사교회에 나오시다니. 이래서야 아카데미 사교계에서 퇴출당해도 할 말이 없겠어요."
마리안의 노골적인 텃세와 비아냥거림에 주변 영애들이 맞장구를 쳤다.
"정말요. 황태자 전하의 이목을 끌어보려고 애쓰신다더니, 드레스 한 벌 살 돈도 없으셨나 봐요."
"보는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네요."
엘리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교계 퇴출? 어머나, 대환영인데! 제발 날 퇴출해 줘!'
당장이라도 무릎을 탁 치며 "그럼 저 퇴출당할게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기쁘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의 '정직의 장부'가 가차 없이 뇌세포를 자극했다.
[경고: 가식적인 양보 및 타협 시도 감지. 실행 시 보유 자산 금화 10닢 즉시 차감 및 3단계 편두통 발생.]
'아오, 진짜 이 빌어먹을 장부 유예 기간도 없나!'
엘리샤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미세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돈을 잃을 수는 없었다. 금화 열 닢이면 카라칼 영지에서 은퇴한 뒤 사 먹을 수 있는 최고급 맥주가 몇 박스인가.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내숭녀의 주둥이를 다물게 하기 위해서라도 정직한 팩트 폭행의 포문을 열어야만 했다.
엘리샤는 마리안의 위아래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마리안은 연분홍빛 레이스가 겹겹이 쌓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샤의 예리한 시선은 그녀의 드레스 밑단, 아주 은밀한 구석에 묻은 미세한 흔적을 포착했다.
그것은 햇빛을 받아 아주 미세하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고운 가루였다. 단순한 글리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카데미의 마도학 수업을 이수한 엘리샤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저건 황실 마도 학부의 수석이자, 이미 후작 가문의 영애와 약혼한 레온 남백작의 개인 연구실에서만 사용하는 특제 마도 촉매 가루잖아.'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원작에서 마리안은 황태자 카일의 집착을 유도하는 한편, 뒤로는 수많은 남조연들을 어장관리하며 자신의 세력을 불렸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약혼자가 있는 레온 남백작이었다.
엘리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속물적인 정의감과 날것의 독설이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마리안 영애."
엘리샤가 찻잔을 들지도 않은 채, 테이블 앞으로 다가와 턱을 치켜들었다.
"남의 드레스가 검소하네 어쩌네 훈수 두기 전에, 본인 드레스 밑단에 잔뜩 묻어 있는 가루나 털고 말씀하시죠."
"네? 가루라니요? 이건 그냥 평범한 장식용 은박……."
"은박은 개뿔. 그 은빛 가루, 황실 마도 학부의 레온 남백작이 개인 연구실에서 가연성 마도구를 정제할 때만 쓰는 특제 촉매 가루잖아요. 그 남백작, 아카데미 서편의 폐쇄 구역 연구실을 혼자 쓰기로 유명한데, 어젯밤에 거기서 둘이 뭘 하셨길래 온몸에 그걸 뒤집어쓰고 나오셨을까? 아, 참고로 레온 남백작은 지난달에 후작 가문의 영애와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몸이죠?"
정원에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마저 멈춘 듯했다. 다과회를 즐기던 영애들의 손이 공중에서 굳어버렸다.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려던 한 영애는 너무 놀란 나머지 차를 치마에 쏟았지만, 뜨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저는 어젯밤에 내내 기숙사 방에서 신학 기도를 드리고 있었어요! 억울해요!"
마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특유의 가련한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도했다. 몸을 가녀리게 떨며 주변 영애들의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냉소를 흘렸다.
"기도요? 신전의 성자 레이나르 경이 바로 저기 숲 뒤에 계시는데 감히 신을 파는 거짓말을 하시다니, 대담하기도 하셔라. 그 촉매 가루는 마력 반응식이라 물로는 절대 안 지워지고, 오직 마도 해제용 특수 비누로만 씻겨 나갑니다. 지금 당장 마도 측정기라도 가져와서 대조해 볼까요? 당신 드레스에 묻은 가루와 레온 남백작의 연구실 마력 파형이 일치하는지 안 하는지?"
"이, 엘리샤 영애……!"
"만약 일치하면, 약혼자 있는 남자의 은밀한 연구실에 밤늦게 기어 들어가 밀회를 즐긴 불륜녀로 사교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하는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일 텐데요? 어디 한번 학부장님께 검증을 요청해 볼까요? 제 드레스 수선비 아끼는 셈 치고 마도 측정기 대여료는 제가 기꺼이 내겠습니다만."
가차 없는 팩트 폭행의 연속타에 마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주변 영애들의 시선은 이미 동정에서 경멸과 충격으로 변해 있었다.
"세상에, 정말이야? 레온 남백작이랑?"
"어쩐지 요즘 마리안의 드레스에서 묘한 마도 향기가 난다 했어……."
"약혼녀가 있는 사람을 건드리다니, 정말 겉과 속이 다른 애였구나."
수군거리는 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웠다. 마리안은 수치심과 공포에 질려 눈물을 펑펑 흘리며 다과회 테이블을 밀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이탈했다. 그녀를 따르던 영애들도 차마 마리안을 옹호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순간, 엘리샤의 머릿속에서 경쾌하고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딩동! '가식적인 위선자 폭로' 성공!] [성취 포인트 100점 획득! 자산 방어율 120% 달성!] [추방 지수 15% 상승!]
엘리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남겨진 고급 쿠키 하나를 쏙 집어 입에 넣었다.
"사교계 퇴출 운운하기 전에 본인 사생활 관리나 똑바로 하세요. 제 드레스는 비록 검소할지언정, 남의 남자를 훔쳐 입은 더러운 얼룩은 묻어 있지 않으니까요."
우물거리며 쿠키를 씹어 삼킨 엘리샤는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가려 했다. 아주 완벽하고 상쾌한 승리였다.
그런데 그녀가 오솔길 초입의 울창한 느릅나무 그늘을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 부근에서 은밀하게 이 모든 광경을 도청하고 있던 그림자가 불쑥 걸어 나왔다.
백금발을 느슨하게 흐트러뜨린 채, 보라색 눈동자를 기괴하게 빛내며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사내. 레이나르였다.
그는 엘리샤가 반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억센 손귀로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가차 없이 낚아챘다.
"정말이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엘리샤 영애."
그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엘리샤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낚아챈 손목을 쥔 손길에는 거부할 수 없는 단단한 귀기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