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라, 엘리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대란 말이다!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난 내가 얼마나 썩어빠진 인간인지 알 길이 없다!"
카일은 분노로 칼자루를 쥐는 대신,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엘리샤의 멱살을 덥석 움켜쥐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소공작이자 황태자인 사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애원하고 있었다. 그 꼴이 마치 밥 달라고 떼쓰는 대형견 같기도 했고, 자아성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환자 같기도 했다.
엘리샤는 기가 막혀 숨이 턱 막혔다.
"이것 좀 놓으시죠, 전하. 귀한 남의 옷자락 구겨지는 꼴 안 보이십니까?"
"대답하기 전까지는 절대 놓지 않겠다! 네가 나를 거부하는 이유가 내 위선 때문이라면, 그 위선의 껍데기를 어떻게 벗겨내야 하는지 네가 직접 가르쳐줘야 할 것 아닌가!"
카일의 눈동자가 집착과 열망으로 번들거렸다.
그 광경을 도서관 문가에서 지켜보던 레이나르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부추겼다.
"어머나, 전하. 영애의 멱살을 잡고 애원하시다니 품위가 말이 아니십니다. 엘리샤 영애, 전하께서 저렇게까지 매달리시는데 한 말씀 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영애의 그 날카로운 혀끝이 참 그리웠거든요."
레이나르는 성스러운 사제복을 입은 채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음흉한 살기와 조롱이 가득했다. 어떻게든 엘리샤가 황태자에게 무엄한 짓을 저질러 파멸하기를 바라는 하라구로의 전형적인 태도였다.
엘리샤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정직의 장부'가 요란한 경고음을 울려댔다.
[띵-!] [알림: 상대방의 가식적인 도발이 감지되었습니다. 뇌 수축성 편두통 방지를 위해 100% 정직한 본심을 출력하십시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가성비 최악인 인간들에게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엘리샤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카일의 손목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짝, 하는 마찰음과 함께 카일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가문 빽, 황태자라는 타이틀 빼면 시체인 분이 어디서 꺼드럭거리며 징징대시는 겁니까? 진짜 꼴불견이네요."
도서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레이나르의 입꼬리가 호기심으로 가늘게 떨렸고, 카일은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귀가 먹으셨습니까? 제 시간은 전하의 자아성찰 일기장을 들어줄 만큼 저렴하지 않단 말입니다. 1초당 금화 한 닢씩 쳐줄 것 아니면 그 무거운 자의식 과잉은 혼자 분리수거함에 처박으시죠. 가문이 다 깔아준 꽃길 위에서 걷는 주제에, '아, 나는 왜 이리 위선적일까' 하면서 감성 센티해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제 위장이 다 뒤틀립니다. 한마디로 요약해 드릴까요? 배가 처불러서 나오는 배부른 소리입니다."
엘리샤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직 '귀찮음'과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이기적인 갈망만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보통의 황족이라면 당장 목을 치라며 길길이 날뛰었을 상황이었다. 레이나르 역시 엘리샤의 파멸을 예감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피폐 소설의 집착 남주란 존재들은 일반적인 상식의 범주를 아늑하게 초월해 있었다.
카일이 천천히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묘한 희열과 전율이었다.
"가문 빽…… 배가 불렀다라."
카일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붉어진 얼굴에 황홀경에 가까운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 나는 황태자라는 껍데기 뒤에 숨어, 스스로 고뇌하는 척 고결한 척을 떨고 있었던 거야. 아무도 내 지위가 두려워 지적하지 못했던 본질을, 너는 단 한 번에 꿰뚫어 보았구나."
"예?"
엘리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이렇게 가차 없이 꾸짖고, 내 초라한 민낯을 똑바로 마주하게 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엘리샤."
카일의 보랏빛 눈동자가 광적인 소유욕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네 말이 맞다. 나는 더 배워야 해. 네 그 가식 없는 회초리가 없으면, 나는 다시 위선적인 쓰레기로 돌아가고 말 테니까. 카라칼 영지 따위에 널 보낼 수 없다. 넌 내 곁에서 평생 나를 꾸짖어 줘야겠어."
[띵-!] [알림: 카일 폰 로젠베르크의 소유욕 수치가 폭주합니다 (85%).] [알림: 대상의 집착 필터가 완벽하게 고착되었습니다.]
"아니, 미친놈아! 내 말 좀 들으라고!"
엘리샤는 뒷목을 잡았다.
이 미친 광공의 뇌내 필터는 대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인가? 험담을 쏟아낼수록 호감도가 수직 상승하는 이 기괴한 현상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저 바쁩니다! 꺼지세요!"
엘리샤는 카일을 거칠게 밀쳐내고, 멍하니 서 있는 레이나르를 어깨로 팍 치며 도서관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카일이 "엘리샤! 내일 다시 배움을 청하러 가겠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 달렸다.
***
그날 밤, 아카데미 내 네페르티 가문 전용 접견실.
엘리샤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눈앞의 찻잔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왜 이리 미친놈들 천지일까요, 벤?"
맞은편에서 우아하게 홍차를 따르던 수석 집사 벤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는 안경테를 가볍게 밀어 올리며 회계 장부를 넘겼다.
"세상이 미쳤다기보다는, 아가씨의 지극히 정직하고 이기적인 매력이 그들의 뒤틀린 정신 상태를 자극한 것이겠지요. 그보다 아가씨, 카라칼 영지 추방 계획의 포트폴리오를 점검할 시간입니다."
벤의 차분한 목소리에 엘리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래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내 안락한 노후! 내 무위도식 백수 라이프! 벤, 자산 변경 청사진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순조롭습니다."
벤이 서류 한 장을 밀어 보였다. 가문의 인장이 찍힌 비밀 자산 양도서였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국 중앙의 사치스러운 부동산과 보석류를 빠르게 처분하여 유동 자산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카라칼 영지는 제국 극서부의 척박한 변방이라 사치품의 가치가 떨어지니까요. 대신 그곳은 제국의 세무망이 미치지 않는 완벽한 조세 피난처입니다."
"아주 좋아. 세금 한 푼 안 내고 가문 연금만 타 먹으며 살 수 있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서 공식적으로 '품위 유지 의무 불이행' 및 '학우 난동죄'로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하시는 순간, 가문에서는 아가씨를 카라칼 영지로 영구 유배 보낼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해 영지 내에 가장 안락하고 따뜻한 저택을 가계약해 두었습니다. 은퇴 자금의 이자율만 해도 매달 최고급 귤 열 상자와 푹신한 거위털 침구를 무한정 바꿀 수 있는 수준이죠."
엘리샤는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변방이라도 상관없었다. 돈이 썩어 넘쳐나는데 추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마법 온풍기를 방마다 대여섯 개씩 틀어놓고 하루 종일 귤이나 까먹으며 누워 지내면 그곳이 바로 극락이었다.
"훌륭해요, 벤. 당신은 정말 최고의 집사예요. 내가 추방당하면 당신도 관리인으로 데려가서 퇴직 연금을 두둑이 챙겨줄게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무위도식을 위해 제 뼈를 묻지요."
벤이 소리 없이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손바닥 크기만 한, 붉은 녹이 잔뜩 슨 무쇠 열쇠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투박하고 무겁기만 한 고철 덩어리 같았다.
"그리고 아가씨, 이것을 보관해 두십시오."
엘리샤가 찌푸린 눈으로 열쇠를 바라보았다.
"이게 뭔데? 고철상에 가져다줘도 1동전도 안 주게 생겼잖아. 나 무거운 거 딱 질색인 거 알죠?"
"가문의 숨겨진 낡은 금고 열쇠입니다. 카라칼 영지로 가시기 전에 혹시 모를 비상 상황이나, 비상금이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일 테니 주머니에 넣어 두십시오."
"비상금이라니, 솔깃하네."
엘리샤는 투덜거리면서도 열쇠를 받아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공짜 돈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엘리샤는 알지 못했다.
벤이 건넨 그 녹슨 열쇠가 사실은 황실 마도 장치를 해제하고 결계를 무력화하는 만능 우회 도구라는 것을. 벤은 아가씨가 아카데미의 음모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조용히 쥐여준 것이었다.
"자, 그럼 자산 포트폴리오의 마지막 세부 사항을……."
엘리샤가 다음 장을 넘기려던 순간,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렸다.
[띵-!] [알림: 하얀 거짓말 시도 감지.] [상황 분석: 낮에 황태자 카일에게 '나중에 뵙지요, 전하'라며 가식적인 타협의 의사를 내비친 잔여 의도가 시스템에 포착되었습니다.] [패널티: 보유 자산 금화 50닢 즉시 차감.]
"억……!"
엘리샤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소파로 쓰러졌다. 머리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아가씨? 어디 불편하십니까?"
벤이 놀라 다가왔지만, 엘리샤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증발해 버린 금화 50닢의 형상이 둥둥 떠다녔다.
'내 돈! 내 소중한 귤값! 내 안락한 노후 자금이!!!'
진짜로 개인 금고에서 금화 50닢 분량의 가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느낌이 영혼을 타고 전해졌다.
이 빌어먹을 '정직의 장부'는 조금의 타협도, 아주 미세한 위선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남들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려 하거나, 영혼 없는 빈말을 뱉으려 시도하는 즉시 뇌를 찌르는 편두통과 함께 자산이 깎여 나갔다.
엘리샤는 소파 시트를 꽉 쥐며 눈물을 머금고 다짐했다.
'안 돼. 내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겠다. 오직 뼈 때리는 진실, 날것의 독설만 뱉겠어! 그게 내 자산을 지키고 가장 빠르게 아카데미에서 쫓겨나는 길이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벤, 괜찮아요. 그냥…… 세상의 위선에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이에요."
"과연 아가씨이십니다. 위선을 극도로 혐오하시는 그 고결한 성품,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고결은 개뿔, 돈 아까워서 그래요."
엘리샤가 팩 쏘아붙였다. 벤은 그저 허허 웃으며 장부를 덮었다.
***
다음 날 오후, 엘리샤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아카데미 본관 뒤편에 위치한 정원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정원의 공기는 어딘지 모르게 무겁고 음산했다. 실력주의와 가문의 서열만이 지배하는 루나 아카데미의 이면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했다.
'품위 유지 의무 위반으로 잘리려면, 슬슬 한 건 더 터뜨려야 하는데.'
엘리샤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황태자 카일에게는 이미 충분히 어그로를 끌었으니, 이제 다음 타겟을 물색해야 했다.
그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잘 정돈된 장미 덤불 사이에서 누군가 불쑥 걸어 나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눈부신 백금발에 성스러운 사제복을 입은 사내. 어제 도서관 문가에서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신전의 성자, 레이나르 엘 필레아스였다.
그는 어제와 달리 자애로운 미소 뒤로 눈에 불을 켠 채, 기이한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엘리샤 영애. 드디어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겼군요."
레이나르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어제 도서관에서의 연극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전하의 비위를 맞추는 대신, 오히려 그의 자존심을 짓밟아 소유욕을 자극하다니. 대단한 고단수더군요. 하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레이나르가 차가운 마력의 기운을 흘려보내며 엘리샤를 압박했다.
"당신의 그 가식 없는 얼굴 뒤에 숨겨진 진짜 욕망은 무엇인가요? 황태비의 자리? 아니면 제국을 뒤흔들 다른 음모?"
그의 목소리에는 불신과 함께, 자신과 같은 '위선자'를 찾아냈다는 동질감과 비틀린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엘리샤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또 한 명의 미친놈이 제 발로 땔감을 들고 찾아온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정직의 장부가 요란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떤 팩트로 이 가식적인 성자의 대가리를 깨부수어 주어야 할까. 엘리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