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 뒤를 밟았더군, 엘리샤 폰 네페르티."
귓가를 찌르는 서늘한 음성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가장 먼저 감각을 자극해 온 것은 코끝을 맴도는 묵직한 가죽 냄새와 오래된 종이 먼지였다. 아카데미 도서관 내부의 깊숙한 응접실. 붉은 벨벳 소파에 파묻혀 있던 몸을 일으키려 하자,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리며 울렸다.
시야를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은 거대한 그림자였다.
빛 조각을 부수어 놓은 듯한 은발, 그리고 오만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 청색의 눈동자. 기사복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넣은 사내의 얼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수려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미간은 사납게 구겨져 있었다.
카일 폰 로젠베르크. 이 피폐 소설 속에서 여주인공을 감금하고 파멸로 몰고 갈, 통제 집착증에 걸린 소공작이자 제국의 황태자였다.
"말이 없을 줄 알았다. 내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사서에게 금화를 찔러 넣은 것이 벌써 세 번째지. 이 구차한 스토킹을 언제까지 눈감아 줄 거라 생각했나?"
카일이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잠깐만. 내가 왜 여기 있어?'
머릿속이 핑 돌았다. 어제 밤새 읽었던 피폐 소설 '피를 흘리는 백야'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악역 영애 엘리샤는 카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다 들통나 결국 황실 감옥에서 비참하게 목이 달아난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 목이 달아날 엘리샤의 몸뚱이에 들어와 있었다.
소름이 쫙 돋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 미친 집착광공의 손에 목이 잘리기 싫다면, 지금 당장 오해를 풀고 비위를 맞춰야 했다. 납작 엎드려 사죄하는 것이 가성비 면에서 가장 확실한 생존 책이었다.
"소, 소공작 전하. 오해이십니다. 저는 그저 전하의 고귀한 모습을 멀리서나마 우러러보고자……."
그 순간이었다.
[띵-!] [경고: '정직의 장부(마음의 울림)'가 각성합니다.] [사용자는 거짓, 아부, 위선적인 언사를 시도했습니다.] [패널티가 부과됩니다: 보유 자산 즉시 차감 및 안구 돌출형 편두통 유발.]
"아악!"
머릿속에서 쇠망치가 사정없이 뇌를 때리는 듯한 극통이 일었다. 눈알이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압박감에 엘리샤는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짚었다.
동시에 드레스 안쪽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짤랑거리는 맑은 소리와 함께, 비상금으로 넣어 두었던 금화 다섯 닢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증발했다.
'내 돈! 내 소중한 금화가 왜 사라져?!'
주머니를 더듬던 엘리샤의 손끝바닥이 잘게 떨렸다. 뇌리로 기계적인 안내음이 사정없이 꽂혔다.
[진실 왜곡률: 99%.] [하얀 거짓말이나 위선적인 타협을 계속할 시, 영혼의 안식처(통장 잔고) 및 신체 기능이 초 단위로 박살 납니다. 오직 100%의 '날것의 진실'만을 전하십시오.]
미친 규칙이었다. 거짓말을 하면 편두통이 오고 돈이 깎인다니. 남의 눈물에 공감하기보다 내 주머니의 푼돈을 지키는 것이 일생의 사명인 이기주의자 엘리샤에게, 자산 차감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우러러봐? 가식적인 변명이 아주 청산유수군."
카일이 턱을 치켜들며 비웃었다.
"내 주의를 끌기 위해 가문의 권력까지 동원하는 네 탐욕스러운 꼴을 모를 줄 알았나? 네 그 얄팍한 속내를 들을 때마다 속이 메스껍다, 엘리샤."
메스꺼워? 누가 할 소리를.
머리는 깨질 것 같고, 내 아까운 금화 다섯 닢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상실감과 분노가 엘리샤의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 미친 광공의 비위를 맞추려다가는 내 전 재산이 탕진되고 대가리가 깨져 죽을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대가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이 장부가 원하는 대로 뼈를 때려 부수는 진실만을 뱉어내리라.
엘리샤는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늘하고도 맑은 안광이 스쳤다.
"하얀 거짓말로 비위를 좀 맞춰 주려 했더니, 아주 지랄도 풍년이시네요."
"……뭐라?"
카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거친 단어에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귀가 먹으셨습니까? 지랄도 풍년이라고 했습니다, 소공작 전하."
엘리샤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카일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키 차이 때문에 턱을 높이 치켜 올려야 했지만, 기세만큼은 그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내가 네 동선을 파악하려고 사서한테 돈을 찔러줬다고? 착각도 유분수지, 뇌에 곰팡이가 피셨습니까? 내가 사서에게 돈을 준 건 아카데미 도서관 신간 목록 중에서 '카라칼 영지 지적도'를 우선적으로 대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네 낯짝은 덤으로도 안 가집니다."
"카라칼 영지……? 지금 나를 피하기 위해 그런 뻔한 거짓말을……."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사서한테 가서 직접 장부를 찢어 발겨 확인해 보시든가요! 그리고 스토킹?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내가 이 넓고 쾌적한 도서관 응접실에서 조용히 노후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굳이 발소리를 쿵쿵 내며 기어 들어와서 시비를 턴 건 그쪽입니다. 누가 누구의 동선을 밟았다는 겁니까?"
엘리샤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망설임도 없었다. 100% 순도 높은 진실이자 본심이었기에 머릿속의 '정직의 장부'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뇌 속의 고통이 가라앉으며 머리가 맑아졌다.
카일은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렸다. 평생 제국 모든 이들의 동경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온 소공작이었다. 그의 면전에 대고 이토록 날카로운 팩트를 사정없이 내리꽂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너, 지금 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건 그쪽 머릿속 사정이고요."
엘리샤는 팔짱을 끼며 비스듬히 실소를 흘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선과 피해망상에 젖어 있는 무능한 덩치 같으니라고. 온 세상이 자기만 쳐다보고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거 정신병입니다. 전문의 치료가 시급해 보여요. 예쁜 쓰레기 피지컬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얼굴값이나 할 것이지, 분리수거도 안 될 쓰레기 같은 인성으로 어딜 감히 사람을 스토커로 몰아붙입니까?"
"쓰레기……? 내가?"
카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검 손잡이로 향했다. 제국의 황태자이자 소공작인 자신에게 '분리수거도 안 될 쓰레기'라니. 사형감으로도 모자랄 모독이었다. 보통의 영애라면 이 기세에 눌려 눈물을 흘리며 빌었을 터였다.
하지만 엘리샤는 오히려 비웃음을 더 짙게 흘렸다.
"왜요? 칼로 찌르시게요? 찔러 보시든가. 지위와 무력만 믿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칼부터 뽑아 드는 꼴이 딱 수준 낮은 깡패 새끼랑 다를 게 뭡니까? 가문을 빼면 제 힘으로 이룩한 건 하나도 없으면서, 오만함만 하늘을 찌르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네요."
[띵-!] [알림: 완벽한 팩트 폭행이 성립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자아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정직의 울림이 성공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머릿속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카일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지도 못한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엘리샤를 응시했다. 은빛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오만한 청색 눈동자에는 분노보다도 더 깊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충격이 일렁이고 있었다.
늘 가식적인 웃음으로 그의 비위를 맞추며 뒤로는 음모를 꾸미던 영애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엘리샤의 눈빛은 맑다 못해 투명했다. 그 어떤 위선도, 숭배도, 숨겨진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향한 날것 그대로의 혐오와 한심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투명하고 정직한 독설이 오히려 카일의 굳게 닫힌 내면에 회초리처럼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이 여자는…… 진짜다.'
카일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아첨을 떨던 수많은 인간들의 위선에 신물이 나던 참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악역 영애는 자신의 가장 추악하고 오만한 내면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내가…… 위선과 피해망상에 젖어 있다고?"
카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서 조금 전의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요. 아주 중증입니다. 남이 자기한테 관심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애정결핍 환자 같으니라고. 내 귀한 시간 낭비하게 만들지 말고 비켜요. 카라칼 영지 서류 정리해야 하니까."
엘리샤는 카일을 어깨로 밀치며 지나치려 했다.
아카데미에서 품위 있게 미움받아, 제국의 극서부 카라칼 영지로 안전하게 추방당해 평생 무위도식하는 '완벽한 갓수'의 삶. 그것이 이 속물적인 엘리샤의 유일한 목표였다. 이런 미친 집착광공과 엮여서 인생을 낭비할 시간 따윈 1초도 없었다.
"기다려."
갑자기 카일이 돌아섰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엘리샤의 옷깃을 거칠게 낚아챘다. 멱살을 잡힌 꼴이 되었지만, 카일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대신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멱살을 쥔 채, 그가 애원하듯 으르렁거렸다.
"가지 마라. 방금 한 말…… 구체적으로 대."
"뭐라고요?"
"내가 구체적으로 뭐가 위선적이고, 어떻게 무능하다는 건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대란 말이다! 네가 내지른 그 독설에 단 한 점의 거짓도 없다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전부 말해!"
이글거리는 청색 눈동자가 엘리샤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았다.
뺨을 맞은 듯 충격을 먹고 굳어버렸던 소공작은, 이제 분노로 칼을 뽑는 대신 엘리샤의 팩트 폭행을 더 갈구하는 기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엘리샤는 황당함에 이마를 짚었다.
'이 새끼, 진짜 미친놈인가?'
질척거리는 집착광공의 서막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오작동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 좀 놓고 말씀하시죠. 이거 실크 혼방이라 구겨지면 복원하는 데만 은화 세 닢이 깨집니다. 소공작 전하께서 제 세탁비 대주실 겁니까?"
엘리샤는 제 멱살을 잡은 카일의 커다란 손을 혐오스럽다는 듯 째려보았다.
평생 누구에게도 거절당해 본 적 없는 황태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샤를 제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기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세탁비 따위는 금화 백 닢이라도 주지! 그러니까 당장 말해. 내가 왜 위선적이고 무능하다는 건가!"
'와, 이 새끼 진짜 진심이네.'
엘리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머릿속의 '정직의 장부'는 거짓을 말하려 할 때만 뇌를 쪼아댔기에, 지금처럼 날것의 팩트를 쏟아낼 때는 오히려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심지어 머리 뒤쪽에서 시원한 민트 향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가성비를 따져보니, 여기서 대충 얼버무리다가 대가리가 깨지거나 돈이 뜯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미친놈의 자아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엘리샤는 한숨을 푹 쉬며 카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좋습니다. 뇌 용량이 부족해서 스스로 인지가 안 되시는 모양이니, 딱 세 가지만 가성비 좋게 요약해 드리죠."
"세 가지……?"
"첫째, 공공장소인 도서관에서 발소리를 쿵쿵거리며 들어와 깽판을 치는 무식함입니다. 전하께서 밟고 다니는 그 카펫, 아카데미 학비에 포함된 학생 공동 재산입니다. 왜 엄한 카펫 수명을 단축시키면서 분노 조절 장해를 전시하십니까? 그게 첫 번째 위선입니다. 고결한 척하면서 공공질서는 조또 신경 안 쓰는 거요."
카일의 턱관절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둘째, 자의식 과잉에 따른 망상벽입니다. 내가 사서에게 돈을 준 게 오직 전하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죠? 그건 전하가 '모든 인간은 나를 우러러봐야 한다'는 오만한 지배욕에 절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제 머릿속에는 카라칼 영지에서 어떻게 하면 숨만 쉬고 누워 살까 하는 완벽한 자산 포트폴리오밖에 없습니다. 전하의 그 잘난 얼굴은 제 노후 계획서의 먼지 한 톨만큼의 가치도 없단 말입니다."
"내, 내 얼굴이…… 먼지 한 톨……?"
카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제국의 모든 여성이 한 번만 눈길을 주기를 갈구하는 그 국보급 미모가, 고작 변방의 똥땅 지적도보다 가치 없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셋째, 팩트를 들었을 때 반성은커녕 멱살부터 잡는 그 졸렬하고 무능한 신체 반응입니다."
엘리샤는 카일의 손등을 톡톡 쳤다.
"진짜 강자는 개가 짖어도 갈 길을 가지만, 똥개는 지가 찔리니까 짖고 멱살을 잡는 법이죠. 지위와 무력을 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면서, 그저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꼴이 딱 골목길 불량배 수준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소공작 전하?"
도서관 응접실에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일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힘없이 툭 떨어졌다.
보통의 영애들이라면 그가 인상을 조금만 찌푸려도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하지만 엘리샤의 눈빛에는 단 한 줌의 아첨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100% 순수한 귀찮음과 한심함만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투명함이 카일의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평생 가식과 위선 속에서 살아오며 정서적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에게, 엘리샤의 독설은 썩은 상처를 도려내는 가장 날카롭고도 구원 같은 메스였다.
"아……."
카일이 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이것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쾌감이자, 제 안의 뒤틀린 소유욕이 올바른 과녁을 찾았을 때 울리는 경종이었다.
"틀리지…… 않았다."
카일이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에서 광포한 오만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묘한 열망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네 말이 전부 맞아, 엘리샤. 나는 오만했고, 졸렬했으며, 내 지위 뒤에 숨어 너를 모함했다. 나를 이토록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예? 아니, 그러니까 깨달으셨으면 이제 꺼지시라고요."
엘리샤가 질색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카일은 오히려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청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집착으로 번뜩였다.
"꺼질 수 없다. 네가 내 눈을 뜨게 만들었으니 책임져라."
"하? 제가 왜요? 제가 무슨 안과 의사입니까?"
"내일부터 당장 황실 기사단 연무장으로 와라. 네가 내 전담 감시관이 되어라. 내가 오만한 짓을 할 때마다, 방금처럼 내 뼈를 때려 부수고 지적해라. 네가 없으면 나는 다시 위선적인 쓰레기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미치셨습니까?! 저 바쁩니다! 품위 유지 의무 위반으로 빨리 아카데미에서 잘려서 카라칼 영지로 추방당해야 한단 말입니다!"
엘리샤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추방당해서 하루 종일 누워 귤이나 까먹는 완벽한 백수 노후를 계획하고 있는데, 황태자의 전담 감시관이라니? 그딴 노동 강도 극상의 직업을 왜 내가 가져야 한단 말인가. 가성비가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그러나 카일은 그녀의 말을 완전히 제멋대로 필터링했다.
"카라칼 영지……? 아, 나를 위해 그 척박한 변방으로 스스로 유배를 떠나면서까지 내 곁을 떠나려 했던 건가? 내 위선에 상처받아서?"
"아니라고 이 자의식 과잉 환자새끼야!!!"
엘리샤가 이마를 짚고 뒷목을 잡았다.
[띵-!] [알림: 상대방의 착각 필터가 폭주합니다.] [카일 폰 로젠베르크의 소유욕 수치가 위험 수준(80%)에 도달했습니다. 사용자의 추방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예상됩니다.]
'망했다.'
머릿속의 기계음이 절망적인 경고를 울려댔다. 이 미친 광공의 오작동이 추방 계획을 정면으로 들이받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도서관 응접실의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어라. 아주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네요."
나긋나긋하면서도 뼈가 시린, 극상의 가식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문가에 서 있는 것은 눈부신 백금발에 성스러운 사제복을 입은 사내였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뒤로 음흉한 살기를 숨긴 하라구로 지능캐.
신전의 성자이자, 또 다른 집착 남주인 레이나르 엘 필레아스였다.
레이나르가 보라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엘리샤와 카일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호선을 그렸다.
"소공작 전하께서 영애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려 계실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엘리샤 영애, 혹시 전하께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신 건가요? 예를 들면…… 그 잘난 자존심을 짓밟아 버렸다던가."
레이나르의 시선이 엘리샤의 얼굴에 닿았다.
그의 미소 뒤에 숨은 가식적인 향취를 맡은 순간, 엘리샤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정직의 장부'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또 다른 미친놈의 등장. 그리고 한층 더 꼬여가는 추방 계획. 엘리샤의 관자놀이가 다시 지끈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