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최고 회의장의 무거운 철문이 거대하게 열리며 제국 감사관 수십 명이 앉아 있는 심판대의 위용이 드러났다.
높은 천장 아래로 쏟아지는 마법 조명은 마치 도살장의 칼날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단상 위, 붉은 법복을 걸친 심사위원들은 먹잇감을 노려보는 독수리처럼 오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 엄숙한 공기 속에서 내 구둣굽 소리만이 댕그랑댕그랑 울려 퍼졌다.
“네페르티 가문의 엘리샤 폰 네페르티. 피고석으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호출한 것은 아카데미 학술 총장이자 사법 심사위원단의 수장인 베르너 후작이었다. 그의 양옆으로는 제국 황실 감사관들이 거만한 자세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 가장 높은 참관석.
황태자 카일과 성자 레이나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카일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당장이라도 나를 납치해 지하 감옥에 가둘 것 같은 소유욕 서린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레이나르는 그 특유의 성스러운 가짜 미소를 지우고, 오직 나만을 관찰하겠다는 듯 기묘하게 가라앉은 안광을 빛냈다.
‘저 가성비 안 나오는 집착광공들 같으니라고. 내 은퇴 계획에 하등 도움이 안 돼.’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도 내 머릿속 ‘정직의 장부’는 요란하게 경고음을 울려대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내 몫의 퇴직금과 카라칼 영지를 지키기 위해 얄팍한 거짓말이나 읍소를 늘어놓는다면, 내 뇌는 사정없이 쪼그라들 것이고 내 전 재산인 금화들이 허공으로 증발할 터였다.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안전한 백수 노후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오직 뼈를 때리는 100%의 진실만을 배설해야 했다.
베르너 학술 총장이 권위적인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엘리샤 폰 네페르티. 너는 학내 보안 결계를 고의로 훼손하고 금기된 마물을 소환하여 학우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비록 네가 심문실에서 비리 심문관을 폭로하는 소동을 일으켰으나, 그것이 네 죄를 면해 주지는 않는다.”
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본 심사위원회는 네가 요구하는 ‘품위 유지 의무 불이행에 따른 카라칼 영지 추방 및 가문 연금 수령’이라는 과분한 처분을 기각한다. 대신, 귀족 작위를 영구 박탈하여 평민으로 강등하고, 평생 황실 마석 광산에서의 강제 노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회의장이 술렁였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귀족 자제들이 고소하다는 듯 킥킥거렸다.
‘뭐? 강제 노역?’
내 머릿속에서 퓨즈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감히 내 소중한 무위도식 라이프를 빼앗고 땀 흘려 일하게 만들겠다고? 일주일에 삼 일만 숨 쉬는 것도 귀찮아하는 나에게 삽질을 시키겠다는 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나는 당당하게 단상 중앙의 발언 연대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단상 주위에 쳐져 있던 황실 제어 결계가 웅웅거리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발언자의 마력을 억누르고 정신적 압박을 가해 자백을 유도하는 악독한 마도 장치였다. 머리가 무거워지려는 찰나, 나는 소매 안쪽에서 벤이 건네주었던 낡고 녹슨 무쇠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가문의 비밀 금고 열쇠라고 구라를 쳐놓고, 실제로는 황실 마도 장치를 강제 우회하는 마스터키를 주다니. 우리 집사, 아주 유능한 범죄자였잖아?’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연단 아래의 마력 제어 핵 틈새로 그 녹슨 열쇠를 찔러 넣었다.
틱.
작고 명쾌한 소리와 함께 머리를 짓누르던 결계의 압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정도가 아니었다. 결계의 마력 흐름이 역류하면서 내 발언대의 마도 확성 장치의 출력이 최대치로 증폭되었다. 이제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이 회의장을 넘어 아카데미 중앙 광장의 거대 마법 화면으로 실시간 생중계될 터였다.
나는 심사위원들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에 든 것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계신 위대하신 심사위원 여러분. 방금 그 판결, 뇌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들이 내린 결정치고는 꽤나 창의적이어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회의장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베르너 총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무례한 언사냐! 이곳은 황실의 권위가 서린 심판대다!”
“권위요? 지나가던 똥개가 짖어도 이것보다는 논리적이겠습니다.”
나는 단상 위에 놓인 두꺼운 라틴어 고서 한 권을 탁 낚아채더니, 심사위원들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들이 내 이단 혐의와 마물 소환의 증거랍시고 제출한 고대 악마론 저서였다.
“학술 총장님. 이 책 3장 4절을 기준으로 저를 기소하셨죠? 여기에 적힌 ‘카라의 피눈물이 대지를 적시고 파멸을 부르리라’라는 구절을 마물 소환 주문이라고 해석하셨더군요.”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고대 악마 카라를 불러내는 금기 주문이다!”
나는 책장을 거칠게 넘겨 해당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쾅쾅 두드렸다.
“유감스럽게도 고대 크론어에서 ‘카라(Karah)’는 눈물이 아니라 ‘양념한 양고기 수프’를 뜻합니다. 그리고 ‘적시다’로 번역된 단어는 ‘냄비에 쏟아지다’예요. 즉, 이 문장의 진짜 뜻은 ‘양고기 수프가 냄비에 쏟아져 대환장 파티가 일어났다’입니다. 그냥 고대 요리책의 실수담이라고요, 이 무식한 영감탱이야!”
“뭐, 뭐라?!”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7장에 나오는 그 장엄한 마물 유도 주문이라는 거, 이건 고대 시장통의 야채 장수가 부르던 호객 행위 송(Song)입니다. ‘싱싱한 감자가 두 푼에 세 개! 안 사면 당신 손해!’라는 구절을 가지고 마물 유도 주문이라며 저를 몰아가다니. 이쯤 되면 총장님의 그 빛나는 대머리는 지성의 상징이 아니라 뇌 용량을 최소화하기 위한 해골의 눈물겨운 다이어트 결과물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해 봐야 합니다.”
“커헉...!”
베르너 총장이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비틀거렸다.
주변의 학자들과 사제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허겁지겁 자신들의 개인 수첩을 꺼내 들었다. 엘리샤의 거침없는 고대어 해석이 너무나 정교하고 완벽했기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학구열에 불타올라 그녀의 말을 받아 적기 시작한 것이다.
사각사각사각.
회의장에 깃펜 움직이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적지 마세요! 돈도 안 내고 남의 고대어 특강을 날로 먹으려 들다니, 양심이 가출해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학술원 예산은 전부 어디로 빼돌리고 번역기 하나 제대로 못 돌려서 이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혀를 차며 품 안에서 또 다른 물건을 꺼내 단상 위에 쾅 내려놓았다.
쇠붙이가 대리석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그것은 카일이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하던 중 부러뜨렸던 마검의 파편이었다.
“그리고 제가 보안 결계를 훼손했다고요? 진짜 결계를 망가뜨리고 마물을 유도한 주범은 이 파편에 각인된 마력 문양의 주인입니다.”
나는 마검 파편의 단면을 마법 조명에 비추어 보였다. 빛을 받은 파편에서 붉은색 마력 문양이 선명하게 허공에 떠올랐다.
“이 문양은 바이올렛 백작가, 즉 마리안 드 바이올렛의 가문이 독점 소유한 광산에서만 추출되는 특수 마석의 유도 각인입니다. 훈련장에서 발견된 마물 유도 장치의 파형과 100% 일치하죠. 황태자 전하께서 부러뜨리신 이 마검의 파편이 아주 훌륭한 물증이 되어 주는군요.”
참관석에 앉아 있던 카일이 그 모습을 보며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내 검의 파편을 그런 식으로 보관하고 있었을 줄이야. 역시 너는 내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있었던 거군, 엘리샤.”
‘아니야, 이 미친 통제광아. 그냥 벤한테 고철값으로 팔아넘기려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들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역시나 가차 없는 팩폭이었다.
“엉뚱한 착각으로 자아도취에 빠지기 전에 그 비뚤어진 대가리부터 분리수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전하? 전 단지 돈이 될 것 같아서 주웠을 뿐이고, 당신의 그 쓸데없이 무식한 완력 덕분에 아주 유용한 증거를 공짜로 건졌을 뿐이니까요.”
카일의 눈빛이 그 독설을 맞고 더욱 황홀하게 타올랐다.
“나를 그렇게까지 매도하다니... 좋아. 아주 좋아. 그 거침없는 태도가 바로 내가 갈망하던 진짜 너다.”
“저 미친놈이 진짜...”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저 집착 필터는 대체 어떤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인 게 분명했다.
그때, 참관석 다른 한편에서 레이나르가 우아하게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놀랍군요, 엘리샤 영애. 아카데미가 수십 년간 신성시하며 감춰온 비전 학문의 교리적 모순을 이토록 완벽하게 깨부수다니. 사제들의 위선적인 번역과 황실의 허술한 행정을 단숨에 폭로하셨습니다. 당신의 그 가식 없는 진실이 제 영혼을 세차게 흔드는군요.”
“성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사기꾼처럼 썩은 미소를 지으며 남의 팩폭에 숟가락 얹지 마시죠. 당신들이 신성하다고 떠드는 그 비전 학문이라는 거, 결국 평민들 돈 뜯어내고 황실 세금 포탈하려고 만든 그럴싸한 개소리 통장 아닙니까? 그 구린내 나는 위선에 장단을 맞춰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귀찮게 굴지 마세요.”
회의장 내부의 사제들과 학자들이 영혼이 안드로메다로 떠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제국의 그 누구도 황태자와 성자, 그리고 학술원의 권위에 이토록 정면으로, 그것도 완벽한 논리와 팩트로 짓밟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벌벌 떠는 손으로 수첩을 꽉 쥔 채, 엘리샤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제국 학술계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가면 완벽한 무죄 방면은 물론이고, 품위 유지 의무 위반으로 인한 카라칼 영지 추방이라는 나의 ‘안락한 백수 계획’이 완벽하게 성취될 판이었다.
‘좋아, 이 흐름이야. 이대로 날 카라칼로 쫓아내라! 가서 평생 따뜻한 방바닥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뒹굴어 주마!’
내 마음에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지려던 바로 그 순간.
단상 밑, 외곽의 귀빈석에서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지를 일으키며 일어선 것은 화려한 보라색 외투를 걸친 거구의 노신사였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은 바이올렛 백작가의 상위 가문이자, 마리안의 강력한 후원자인 바이올렛 대공가의 문장 세공이었다.
“잠깐! 이 말도 안 되는 촌극을 더는 눈뜨고 볼 수 없군!”
그가 호통을 치며 단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눈에는 마리안의 몰락을 막고, 동시에 네페르티 가문을 완전히 매장하겠다는 독사 같은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 모든 폭로와 학술적 논쟁이 사실이라 한들, 엘리샤 폰 네페르티가 카라칼 영지로 추방당하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대공이 황태자 카일과 심사위원단을 번갈아 보며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듯 목소리를 높였다.
“제국 서부의 국경 지대인 카라칼은 최근 마력 반응이 요동치는 극도의 위험 지역이다! 그런 곳에 죄를 지은 영애를 영지 소유권까지 넘겨주며 추방하는 것은, 단순한 유배가 아니라 제국의 신성한 영토를 무단으로 외부에 유출하고 황실의 권리를 포기하는 이적 행위이다! 따라서 엘리샤의 카라칼 영지 추방령은 원천 무효이며, 그녀는 즉시 제국 중앙의 감옥에 수감되어야 한다!”
회의장에 다시 한번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내 노후 자금과 완벽한 갓수 라이프가 걸린 카라칼 영지 획득 계획에,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대공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